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중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땅으로 돌아오는 발바닥처럼. ‘외로움이란 매순간 이렇게 나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푹 꺼지는 싱크 홀처럼 언젠가, 아마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을까. 인간은 원래 고독한 거야. 많은 철학자와 작가들의 잠언과도 같은 말도 별반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 것이 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바라볼 때와는 확연히 다르니까. 거리가 확보된 관찰은 시각적인 효과만을,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후각적인, 손을 뻗는다면 외피의 감촉만을 느낄 뿐이다. 옷을 직접 입는 것은 내피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촉각은 이런 면에서 마음으로 가장 빠르게 스며든다. ‘외로움이 감각되는 자극의 일종이라면 아마 촉각으로 감지되는 것이리라. 적당한 슬픔이 고인 축축함과 공허함으로 바싹 말라버린 푸석거림과 스스로의 체온만으로 데워진 몸과 옷의 미세한 간극을 선명하게 느끼는.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낯선 풍경의 공기를 전하는 여행 산문집이다. 작가의 발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남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여행이란 본디 외로워지는 일이니까.(p225)’ 글에서 채도가 다른 작가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언젠가는 혼자 여행을 하고 말거야. 막연히 꿈꾸곤 했다. 여행의 결론이 외로워지는 거라면, 지금도 근근이 버거운 외로움을 걸어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비 내리는 바닥에 흘러내린 기름을 보듯 어지러워졌다. 약간의 거부감이 들어앉아 그의 문장들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이 계속 겉돌았다.

 

내 외로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것은 그것을 안고 디뎌야할 발걸음의 방향이었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물체를 손에 올려놓고 어찌해야 할지 방황하는 과정이랄까. 마지막 부분에서 따뜻한 빵과 같은 온기를 주는 답을 찾았다. <사진으로 다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란 제목의 글에서였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 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 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 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p235)’

 

<모든 게 끝났으니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라는 마지막 글을 보자 작가가 이 산문집을 쓴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건 여행의 목적에 관한 생각이었고, 이제껏 그가 말했던 수많은 여행지에서의 경험은 하나의 점으로 모아졌다. 이 책은 여행지의 풍광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었다.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하게 하는 출발의 호루라기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p255)’,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p256)’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일 수밖에 없다. 외로움을 감당하는 것도. 지구라는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 아니라 기준점을 바꿔야하는 일이었다.

 

-저 산의 높이가 얼마나 될 것 같아?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친구가 물었다.

-글쎄, 한 구백 몇 미터?

인터넷으로 산의 높이를 검색해본 친구가 감탄한다.

-역시, 과학 쌤!

-그냥 감으로. 한라산 높이가 1,950m이라니까 그것보다는 훨씬 낮을 테니 대충 찍은 거야. 근데 참 놀라워. 저게 1킬로미터 가까이 된다니.

-높이의 기준이 여기부터가 아니니까 보정을 한다면 그보다는 낮겠지?

!!! 잠시 잊고 있었다. 모든 산의 높이는 해발고도라는 사실을. 우리가 서 있던 장소는 기준점으로부터 다소 높은 곳이었으니 나의 감은 엄청나게 빗나간 셈이다.

 

나만의 이야기를 보정해가는 과정에도 외로움은 늘 바탕화면처럼 깔리며 나를 당길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여행이란 그 기준점을 다소 높여줄 수 있는 썩 괜찮은 방법이라 말하고 싶다. 여행이란 외로움을 보정하는 과정이라고. 중력처럼 당기는 외로움을 그나마 견디며 걸어갈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건조해보였던 보정이란 낱말이 위안으로 다가온다. 실제로는 그다지 높지 않다며, 바라볼만 하다며, 조금씩 쉬면서 올라가다보면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의미를 품은 채. ‘여행이란 말이 중력처럼 나를 당긴다는 느낌이 들자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졌다.

 

 

p105, 9째줄 : 타시오 타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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