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 김제동의 헌법 독후감
김제동 지음 / 나무의마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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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잘 모른다.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책을 따라가 보니 우리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무는 글들이었구나 싶다. 굳어진 공기 밥처럼 딱딱하고 말라 보이는 헌법에, 저자는 물을 한껏 붓고 끓여서 부드러운 죽으로 만들었다. 헌법이 친숙하게 다가왔다. 갖가지 비유와 유쾌한 묘사로 헌법을 제대로 소개한 책이다.

메인보다 주변에 눈길이 머물 때가 있다. 횟집에서의 계란찜이나 새우튀김, 동양화에서의 여백, 드라마에서의 애드 립, 영화에서의 씬스틸러처럼. 작은 제비꽃 같은 요소들이 마음을 제대로 훔칠 때, 흘러나온 여운은 향기처럼 주변을 맴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는 이런 의미로 내 곁에 머물렀다.

 

저자는 헌법을 읽으면서 감동적인 문학작품 같았다고 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나는 그에 대한 독후감에서 감동적인 문학작품의 향기를 맡는다. 중심 못지않게 주변 내용이 매력적이다. 서정적인 에세이집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의미 있는 문장들이 많다. 심플한 만화처럼 그려진 배경그림 역시 내용과 잘 어우러져 조화롭다. 글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다.

튼실한 내용에 익살이라는 튀김옷을 입혀 바삭 요리한 책. 술술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점이 좋았다. 특히, 간간이 끼워진 속지처럼 등장하는 시들이 마음에 들었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p160~161)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읽어도 고개가 수그러지면서 나를 돌아보게 했다. 이옥자 할머니의 나도 쓸 수 있어(p162~163)는 전문 시인 못지않게 치명적인 깨달음을 주었다. 글과 삶이 일치하는 글에서 나오는 투박한 진솔함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집 앞에 꽃이 가득 피었네. 놀러 안 오나?

지난 금요일 퇴근 후, 친구에게 다녀왔다. 맛있는 것도 먹고, 벚꽃도 실컷 보고, 손 붙잡고 산책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다리 아플 정도로 걷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사진 속에서 내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내 주변엔 맛있는 게 없더니 거기 다 있었네.

-예쁜 꽃, 오징어 먹물 리조또, 호숫가 산책길. 다 좋은 사람이 없으면 좋지가 않아. 멀리 와서 놀아줘서 고마워.

 

인생 사진 건졌다더니 카카오 톡 프로필 사진을 바꿔놓은 친구. 표정이 꽃보다 화사하다. 벚꽃이라는 시를 지어서 친구에게 보냈다.

-따뜻하고 예쁜 시네. 난 요새 마음이 시린데.

-나도 그렇다네, 친구.

-왜 마음이 시려?

-..이 좋은 봄날에..외로워서 그러지 뭐

-그러게. 사람은 외로움이 문제네. 좋은 시 고마워. 시인 친구 있어서 좋다.

시인이라 불려도 부끄럽지 않은 사이, 외롭다 말해도 불쌍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줄 수 있는 사이, 갑자기 뜨끈한 박하사탕 하나 삼킨 것 같다.

-자주 연락할게..너무 외로워하지마, 친구..

 

책을 읽으며 나무에 새겨진 진갈색 인두 자국처럼 마음에 새겨졌던,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가 떠오른다. 두고두고 음미하고 싶어서 코팅하듯 전문을 싣는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가 기대는 데가 많은데/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p133~135)

울컥한다. 불완전한 존재끼리, 부족한 친구끼리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장면을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져서. 우리,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생각하니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어서.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괜찮은지 살펴보고, 이야기 들어주고, 관심을 기울여주고, 어떻게 하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챙겨봐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 나에게도 반드시 그런 사람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p295)’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문장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헌법에 들어있는 그 많은 내용들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우린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일거다. 헌법이란, 소중한 존재들이 서로 기대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들이 버섯 주름들처럼 촘촘히 적인 따스한 위안일 거다.

친구에게 <비스듬히>를 보내주어야겠다. 이렇게 비스듬히 서로 기대며 살아가자고. 언젠가는 나도 이런 시를 써서 너에게 보내주겠다고. 다시 시를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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