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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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적절한 비유를 어찌 생각해냈을까. 음하하! 신이 나에게는 글 잘 쓰는 능력을 주신 게야! 요리보고 조리 봐도 별로라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들이 더 많긴 했지만, ~ 내가 봐도 썩 괜찮은 글이 나올 때 나는 글 쓰는 능력을 타고난 줄 알았다.

커피숍에서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책에 집중이 되지 않으면 이어폰으로 익숙한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다. 오늘은 이어폰도 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도 뜨지 않고 책을 읽었다. 남들 말소리에 개의치 않고 펼쳐들 수 있는 책을 쓰는 몇 안 되는 작가이다. 몰입도가 웬만한 순정만화 버금간다.

시간 날 때 와서 네가 썼던 일기 가져가렴. 한곳에 모아놓았다.” 몇 달 전, 친정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결혼하면서 예전에 썼던 일기장까지는 챙겨오지 못했는데 집안 정리를 하면서 가져가라고 하신 거다. 2mm 두께의 누런 빈티지 공책부터 검지 굵기의 스프링 노트까지 묵직한 분량이 꽤 되었다. 한 뼘도 넘는 뭉텅이를 받아서 안방 책장에 꽂아놓기만 하다가 이 책을 읽고 와서 오늘에야 휘리릭 훑어보았다. 어릴 적 일기들을 뒤적여본 후에야 내게서 기특하게 뿜어져 나오던 경이로운 표현력의 근원을 확실히 알게 된다. 일기의 힘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 두 가지를 발견한다.

첫째, 일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7839일에 시작해서 발령받고 1년 반이 지난 19939월로 끝나고 있었다. 대략 17년 간 꾸준히 일기를 써온 것이다. 날마다는 아니었지만 정직하고 큼직한 연필부터 선명한 펜에 이르기까지 필체의 변천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일기노트 디자인의 역사, 나라는 인간이 지나왔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일기검사가 있던 시기에는 사건날조의 냄새가 강했지만 비교적 사실적으로 써내려간 기록에는 신선한 재미가 있었다. 절실한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고민하던 기록과 함께 지금의 기억이 살짝 왜곡되어있었구나 느낀 부분까지. 새삼스러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이런 인간들이 내 삶속에 존재했었구나.

둘째, 일기노트들과 함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원고지에 썼던 모든 글짓기들이 한 뭉텅이로 묶여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건 초등학교 2학년 때 원고지에 글을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글들을 단 한 편도 버리지 않고 모아주신 친정어머니의 정성이다. 교과서 문장으로 보이는, 원고지쓰기 연습으로 추정되는 글들까지 있는 걸 보면 내가 쓴 글이 단 한 편도 버려지지 않았을 거라 짐작된다. 초등학교 때 덮던 내 얼굴보다 큰 꽃무늬가 그려진 빨간 담요, 족히 40년은 넘었을 그것을 지금도 덮고 주무시는 걸 생각하면 새삼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덕분에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와 산문을 어떻게 썼는지 알 수 있었다.

 

개학 전날, 초인적인 능력 짜내기로 한 달 치 일기를 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6학년 여름방학 때 쓴 일기이다. 방학이 끝나면 방학과제 중 잘된 것을 모아 상을 주곤 했는데, 그 때의 일기로 특선을 받은 것이다. ‘특선이라 적힌 노란 종이가 일기노트 앞면에 포스트잇처럼 붙어있는 걸 보면 당시 꽤 자랑스러웠나보다. 동급 최고 학년이다 보니 머리가 제법 굵어져서 일일이 날씨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리란 걸 깨우쳤던 6학년은 다양한 날씨를 제 맘대로 시전하며 변화무쌍한 글짓기 30여 편을 하루 만에 기록한다. 중간 중간에 다른 시인의 시도 적고, 자작시를 지은 날들은 쓸 거리가 어지간히도 없었던 날이었음은 지금도 기억나는 사실이다. 중학교 때부터는 비교적 현실과 가까운 일기를 썼다. 더 이상 검사받지 않아도 되었던 시기에 쓴 일기를 보니 당시의 감정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웹 소설 몇 편 보고 연예 뉴스, 사회 뉴스 한 바퀴 돌다보면 한 두 시간이 후딱 간다. ‘스마트폰에 쓸 하루 두 시간 중 30분만 글쓰기를 위해 투자(p29)’ 하기로 한다.

 

이 책에 나오는 글쓰기 노트와 뮤즈에 대한 내용에 크게 공감한다. 늘 가지고 다니는 에코백 안에 항상 들어있는 물건은 지갑, 스마트폰, 필통, 이면지 반쪽 묶음, , 화장지, 안경, 이어폰, 보조배터리, 껌이다. 어느 순간 뮤즈가 찾아오면 길을 걷다가도 재빨리 펜을 꺼내 나만의 글쓰기 노트에 메모를 한다. 주로 시적인 영감을 주는 문장들이다. A4 이면지를 반으로 잘라 집게 클립으로 묶어서 가지고 다니는데 꽤 쓸 만하다. 기록한 것을 다듬고 마무리하여 알라딘 블로그에 올리면 책 걸이 하듯 썼던 종이를 빼내 반으로 찢어 버린다. 이게 은근히 쾌감이 있다.

글을 써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없다.(p196)’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 시를 쓰거나 리뷰를 쓸 때마다 느낀다. 특히 시의 경우, 글쓰기 노트에 쓴 초안과 결과물이 판이하다. 첨삭과정에서 흐름이 바뀌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시를 써야겠다고 자리를 잡고 앉아 시작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대게는 어떤 문장이나 감정이 어느 순간 심장을 툭 치고 지나간다. 그러면 글쓰기 노트에 옮겨 적은 다음 살을 조금 붙이고 뺄 뿐이다. ‘뮤즈란 아마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나는 내 자기소개서를 써본 적이 없다.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회사도 아니고 교직에 들어오기 위해서 임용고사 과정에서 논술이나 면접을 보기는 했지만, 자신을 글로 소개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남의 자기소개서라면 지긋지긋하게 많이 보았다. 제자들부터 딸아이의 것에 이르기까지 하도 많이 다듬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에게 부탁을 하니 해주면서도 답답하고 미안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반복되는 문구 삭제나 좀 더 적절한 단어 교체, 매끄러운 문맥, 500자 또는 1000자 이내의 글자 수 맞추기뿐인데 말이다.

드라마 <남자친구>를 보고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어느 정도 감이 오는 듯하다. 드라마에서는 박보검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호텔에 입사하기 위해 자기를 소개하는 부분이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데 본인만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포부를 당당하게 밝힌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자기소개서뿐 아니라 모든 글에 적용되는 내용이리라.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

 

숫자에 민감한 사람은 이 독후감의 앞부분에 일기쓰기의 시작과 끝을 제시한 연도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다. 1993년에서 1978년을 빼면 15년이 아니냐며.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을 읽고 크게 후회한 점 한 가지를 말하려 한다.

199397, 남편을 처음 본 날이다. 1년 반 정도를 사귀다 1995년 봄에 결혼을 했다. 이러저러한 일로 결혼하기 얼마 전 이별의 위기가 닥쳐온다. 이 때, 나는 크게 후회할 일을 저지른다. 남편을 만난 후로 그 때까지 날마다 구구절절한 일기를 썼다. 몇 권의 일기노트를 주섬주섬 챙긴 나는 야심한 밤에 화장실 앞으로 간다. 당시 살던 집의 화장실은 재래식이었고 화장실 앞에는 화장대 앞 간이의자 크기의 페인트 통이 있었다. 거기에 화장실용으로 사용한 종이를 담아 주기적으로 태우곤 했다. 모조리 잊으리라 결심한 나는 당신과의 추억이 적힌 기록들을 전부 태워버린다.

으헝! 조금만 참을 걸. 그랬더라면 당신을 향한 마음이 그토록 활활 타오르던 시기도 있었노라 며 지금보다는 더 나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안보이게 그냥 처박아둘 것이지 뭔 불온서적이라고 분서갱유를 했더란 말인가! 지나고 보면 너무 좋은 추억거리일 텐데.

 

저는 세상에서 남편이 가장 어려워요.”

저런! 오늘부터 조금씩이라도 시도해보세요. 크리스마스에 영화라도 같이 보자고 해보세요.”

도수 치료를 받으면서 선생님과 대화중에 했던 말이다. 대답이 없자 다시 말씀하신다.

그럼 오늘 저녁에 소고기 사달라고 해보세요. 조금 조금씩 시도해보세요. 어깨도 조금 조금씩 운동하면서 나아지고 있잖아요. 파이팅하세요!”

한참 기억을 더듬어본 내가 다시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최악은 아니네요. 얼마 전에는 병원에 다녀왔냐고 먼저 말을 걸어주었어요.”

봐 봐요. 조금씩 시도해보세요.”

오늘 아침에는 청포도를 씻다가 어제 도수치료실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 반만 한 청포도의 껍질을 한 땀 한 땀 과도로 벗겨내고 있었다. 포도씨도 꿀꺽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껍질이 목이 걸려 방울토마토도 손톱으로 벗겨먹어야 하는 민감한 식도의 소유자다. 청포도 한 알 까는데 대략 여덟 번의 섬세한 과도 질이 필요하다. 본죽 통 절반만한 크기에 그득하게 채웠다. 그 어려운 걸 해낸 나는 포크와 함께 거실에서 TV를 보던 남편에게 내 노력의 결과물을 말없이 쓰윽 내밀었다. 딸아이에게 같은 작업을 해줬다면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했을 텐데. “삐까! 쌀알에 다보탑 새기는 디테일로 열심히 벗겨 보았떰. 엄마 따랑의 결실을 맛있게 먹어줭.” 이게 왜 남편 앞에서는 잘 안될까. 그는 말없이 통을 받았다. 얼마 뒤 집안 일로 왔다 갔다 하다 흘끔 보니 빈 통이 포크와 함께 설거지통에 말없이 놓여있었다.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그땐 제가 좀 잘 할게요!(p259)’ 커피숍에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울컥 하면서 말없던 설거지통과 함께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굳어있던 근육이 서서히 나아가는 것처럼 당신과 나의 관계가 어쩌면 서서히 말랑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내가 디테일한 변화를 놓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일기쓰기를. 그 안에는 내게 가장 어려운 문제, 당신의 이야기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리라. 그래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오늘부터 다시 새로운 1일이 되기로.

 

 

*p38, 3번째 단락 : 자기 객관화로 걸려진 ~ 걸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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