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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배트맨 ㅣ 북멘토 가치동화 21
이병승 지음, 장은희 그림 / 북멘토(도서출판) / 2016년 6월
평점 :
로맨틱한 백허그에 몰랑몰랑한 OST.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은 ‘ditto’였다. 담담하게 울리는 남자 주인공의 음성이 너무도 절절하고 간질간질해서 무슨 뜻인지 몰라도 마냥 좋았고, ‘동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나서는 더욱 좋아졌다.
단순하고 유쾌한 동화이겠거니 했다. 시커먼 망토를 휘날리며 배트맨 가면을 쓴 아빠가 땀을 삐질 흘리면서 공간을 날아가는 겉표지는 판타지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내용을 연상시켰다. 유머러스한 요소가 곳곳에 버무려져 동화가 지닌 무게감을 지탱했으나 결코 가볍지 않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오래전 영화에서 본 그 단어가 떠오른다. ditto. 오래 우려 깊은 맛이 배어나오는 ‘디토’의 느낌이 혀끝을 지나 마음 끝에 맴돈다.
6편의 단편 동화 속 주인공들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과 가족과 친구에게 공감한다. 공감을 찾아가는 여정은 서툴지만 독자에게 느린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어른인 나를 돌아보고 나의 삶과 가까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읽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각했다. 강렬하지 않지만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시험에 나오는 것만 공부해야 되냐는 우재의 말에 슬쩍 찔린다. 요즘 아이들의 교실을 떠올린다. 15일부터 시작되는 시험을 대비하느라 더욱 바빠진 수업시간. 높은 긴장감은 교사인 나의 몫이며 공부에 관심 없는 아이들은 여전히 태평하다. “이거 중요해.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내용이지.” 분위기를 쇄신한답시고 종종 내뱉는 말이다. 시험을 위해서만 공부한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한 줄의 문장으로 교과서에 기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치열한 시간이 담기는가. 그런 노력들이 시험문제의 출제 여부에 따라 뇌 속의 입성 대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껄끄럽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시험에 나오지 않아도 오백 권도 넘게 책을 읽는 우재야말로 공부계의 진정한 <하위권의 고수> 아닌가. 흙탕물을 먹는 아프리카인들이 깨끗한 물을 마셨으면 좋겠다며 아프리카에도 눈이 오게 할 거라는 아이의 말에 마음이 정화된다. 이런 마음을 품은 아이를 성적이 하위권이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자발적인 세상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탁 트인다.
남을 때리면 자기 손도 아프다는 <뻥쟁이 그루>의 말은 ‘공감’이 지닌 핵심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친구의 아픔이 내게로 다 빨려 들어왔으면 좋겠다며 소아암 병동에 누워있는 그루의 손을 슬며시 잡는 주인공의 마음은 너무 순수해서 시큰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상처는 깊고 절실하다. ‘나’만을 바라보던 아이가 <마음을 엿보는 안경>을 얻게 되면서 왕따를 당하는 ‘너’를 살피기 시작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지가 언제였더라. 기억이 희미하다. 언제부터 나의 아픔에 함몰되어 주변에 시선을 두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나. 동화 속 아이를 거울인 듯 바라보면서 한참을 서성인다. 나태주의 ‘풀꽃’이 생각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외면해온 시간들을 반성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부 고발자가 되려는 아빠는 아이에게 진짜로 멋진 배트맨이 된다. 뉴스로 보도되던 비슷한 사건들을 몇 가지 떠올린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라던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수많은 배트맨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회에 쏟아지는 크고 작은 불의를 보고도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나의 소심함을 부끄럽게 바라보며.
<꼬마 괴물 푸슝>은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접속사가 되어주는 동생의 이야기이다. 유전적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가족으로 충분할 수 있음을 말하며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따뜻하게 보여준다.
‘일요일에만 자라는 나무는 없단다.(p67)’ <내일을 지우는 마법의 달력>을 얻어 평일을 지워버린 주인공에게 달력을 준 할아버지가 건넨 말이다. 눈가가 찡해진다. 살아오면서 내가 건너왔던 많은 날들이 스친다. 눈물 가득했던 하루, 웃음이 구르던 하루, 행복과 슬픔이 뒤섞여 번갈아 다가왔지. 견디기 힘든 날들도 많았지만 날카로운 시간들이 할퀸 상처가 아무는 과정에서 돋아난 굳은살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외로우면 종종 블로그에 시를 쓴다. 쓰는 것만으로 한결 나아지지만 시에 담긴 마음을 공감해주는 이들로 인해 삶이 덜 시리다. 작가는 <글쓴이의 말>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아마 외로워서일 거라 말한다. 6편의 동화를 통해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공감했던 기억들이 겹쳐진다. ditto. 공명으로 따뜻해진 심장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디토’를 중얼거린다.
* 2018.10. J독후감 공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