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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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은 몇 걸음을 걷다 이내 덮어지곤 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첫 페이지는 아마 대여섯 번도 넘게 읽었으리라. 스스로 묻고 싶었다. 왜 나는 이 책을 번번이 사양하는가. 지루해서도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명쾌하고 가독성이 좋으리라는 예상은 두 세 페이지면 충분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p57)’ 울화는 아니더라도 내 주춤거림의 원인은 불안이었다. 1969년생. 그와 나는 동갑이었으므로. 읽고 나서 다가올 느낌에 지레 겁이 났던 걸까. 너무 좋을까봐. 같은 세월동안 살아온 나는 뭐했나 생각이 들까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도대체 불안이라는 명제로 어떤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361페이지의 지면에 담겨있을 내용에 대한 호기심이 결국 불안을 앞질렀던 모양이다.

 

과학적인 탐구활동을 한다면 저자는 A+ 를 받았을 거다. 철학이나 문학, 역사를 담아 문장을 표현하는 방식이 분석적이고 체계적이다. 원인을 분석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해법을 제안한다. 역사적인 근거를 곳곳에 제시하여 주장에 무게감을 싣는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체가 마음에 든다.

불안의 원인은 결국 지위에 있다. 사회에서든 가정에서의 지위이든 불안정적인 위치는 불안을 끌어내고 이는 곧 다양한 욕구로 이어진다. 저자가 제시하는 불안의 원인은 5가지이다.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속물의 독특한 특징에 대한 서술이 마음에 남는다.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p29)’ 나에게도 속물근성이 있다는 생각에 반성을 한다. 전업 작가가 아닌 저자의 이력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직업에 따라 속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서이다. 똑같은 책이라도 카이스트 교수나 의사가 썼다고 하면 호감도가 급상승한다던지 하는 선입견 말이다.

해법 역시 5가지로 제시된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불안이라는 명제와 별개로 해법에 제시된 문장들이 마음에 차곡차곡 스며든다.

예술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한다.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략) 그 이유를 보여준다.(p171)’ 시각적인 예술, 특히 미술은 한 작품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역할을 다한다. 여러 음이 복합적으로 중첩된 하모니 같기도, 여러 빛이 합성되어 보이는 백색 같기도 하다. 이를 바탕으로 나만의 멜로디나 내안에서 꺼낸 그림을 얹는다.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예술 작품이 각기 다른 의미를 안겨주는 이유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p199)’ 미술 작품에 특히 잘 들어맞는 정의이다. 사진은 빛과 함께 작업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영역이 되지만, 내 마음은 그림에 조금 더 치우친다. 간혹 화가의 붓끝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상상을 한다.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 붕 뜨는 기분이 좋다.

언젠가는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으려한다. 우리는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그는 말한다. 곳곳에 언급된 사상이 꽤나 매력적이다. 이에 관련해 저자는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p247)’는 통찰적인 견해를 보인다. 마르크스의 사상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p256)’라는. 내가 감당하기에 벅찬 감이 있지만 간혹 다른 책에서도 언급되는 문장을 보면 공감하게 되는 생각이 의외로 많다.

홍세화 선생님은 <생각의 좌표>에서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생각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p271)’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생각에 의해 움직이는 아바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남궁인의 <만약은 없다>를 읽고부터였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줄어든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중략)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p276)’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매순간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며 살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보헤미아 기질이 있는 가보다. 다섯 번째 해법으로 언급된 보헤미아부분을 순식간에 몰입하며 지난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던 책 <월든>이 등장한다.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p337)’ 소로우의 삶은 상상만으로 머릿속이 온통 초록색으로 물드는 느낌이다.

저자는 불안 극복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의 팁도 제시한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의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실제로 또는 예술작품을 통하여- 것일 수도 있다.(p297)’ 가슴이 탁 트인다. 책장을 넘기자 두 페이지에 걸쳐 <나이아가라 폭포>가 펼쳐진다. 산다는 게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확 다가온다. 1차원 평면의 느낌으로도 사이다를 마신 듯 후련한데 입체로 보면 어떨까. 가장 좋은 카메라, 인간의 눈으로 웅대한 자연을 담는 순간은 얼마나 경이로운 벅참으로 가슴을 채울까.

 

바빠질 것 같다. 거대한 공간도 여행하고, 예술작품도 감상하고, 읽고 싶은 책도 주문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순간순간 생각하며 살다보면 불안할 틈이 없겠다.

넘어가는 책장이 많아질수록 쓸데없이 불안해했음을 깨달았다. 나이만 같았다. 그의 지적인 성취는 아주 먼 곳에 있어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p148)’ 철학적인 해법에 나온 문장이다. 나노 수준으로 집요하게 대조해본다면 내가 그보다 나은 점이 한 가지쯤은 있지 않을까. 나는 다른 종류의 보석일 테니. 이렇게 생각하니까 불안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p157)’ 친구로 불리는 줄도 모를 알랭이는 먼 나라 동갑친구에게 숙제 하나를 던져주었다. 내가 독특한 보석이듯 너도 어떤 빛깔을 내는 보석인지 스스로 바라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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