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가 내게 묻다 - 당신의 삶에 명화가 건네는 23가지 물음표
최혜진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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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림을 좋아해서 펼쳐든 책에 대한 예전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몇몇 그림은 좋았지만 결들인 글들이 몰입을 방해해 도록을 사느니만 못했다는 씁쓸함을 안았던 기억이다. 요즘 들어 피곤한 날들이 이어졌다. 특별히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유달리 몰려드는 피로감에 점점 무기력해졌다. 재미가 없어.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단조로운 음으로 만들어진 배경음악이 깔렸다.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며 쩍쩍 갈라진 강처럼 마음은 원인모를 갈증에 시달렸다. 가슴이 뛰지 않아. 사람이든 일이든 두근거리는 대상이 지금 내 앞에 없다는 것. 견디기 어려웠던 건 바로 이것이었다.

기대감이 제로인 상태에서 읽어서였을까. 기차여행을 하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는데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난 듯 신선한 책이었다. 무엇을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 날이 계속 되면 비행기 표를 끊고 먼 나라 미술관으로 여행을 간다는 <프롤로그>에 호기심이 일었다. 시선을 끈 부분은 무엇을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 날이라는 문장이었다. ! 요즘 내 상태와 싱크로율 100%인 표현 아닌가! 미술관을 순례하는 테마 여행이라. 콘서트나 뮤지컬의 현장으로 나를 데려다놓는 방법을 시도하곤 했는데 미술관도 꽤 멋진 공간이라는 생각에 이런 여행도 괜찮겠다 싶었다. ‘자기 발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낯설고 새로운 상황과 처지에 스스로를 던져놓고 그 반응을 살펴보는 것(p70)’이란 말에 공감했다.

 

저자는 피처에디터로 일하며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들이 책을 뚫고 나와 나를 툭툭 건드렸다. , , 관계, 마음의 네 파트로 나누어 관련된 그림과 함께 독자에게 물었다. 살아가면서 흔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스스로 질문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많은 질문이 던져졌다. 인터뷰이가 되어 책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공간에 나만의 대답을 올려놓았다. 때로는 자신 있게, 때로는 고민하며 나만의 답을 떠올렸다. 특히 마음에 남았던 질문은 에 관련된 물음이었다. 옅어지던 일상의 색깔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Part 1, 나라는 물음표>에서는 당신을 설명하는 단어를 최대한 많이 떠올려보세요.(p61)’라는 질문이 마음에 들어왔다. 나를 설명하는 단어라... 나를, 나를. 50, 과학교사, 어깨보다 조금 긴 머리, 딸 둘의 엄마, 엄마의 둘째 딸. 외형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데이터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더라? 글쓰기, , , OST, 로코 드라마, , 콘서트, 베이스 기타소리, 드럼 소리, , 시리우스, 바다, 만화, , 핑거스틱, 케잌 위의 크림, 호박잎, 청국장, 그림, 클림트의 키스, 보라색, , 중저음의 목소리, , 제트스트림 1.0 파란색 볼펜, 엘라스틴 샴푸, 베이비파우더 향, 카리스마, 유머, 하늘, 햇살.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Part 2, 일이라는 물음표>에서는 지금 하는 일은 어때요? 재미있어요?(p88)’, ‘당신은 왜 그 일을 하나요?(p89)’라는 질문에 답을 했다. 지금 하는 일은 재미있는 것 하나, 재미없는 것 하나씩이예요. 직장 일은 재미없고, 퇴근 후에 글 쓰고 책 읽는 일은 재미있어요. 직업은 서글프게도 생계유지를 위해 하나 봐요. 의욕이 급격하게 떨어진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드네요. 글 쓰고 책 읽는 일은 그냥 좋아서 하구요. 그저 좋다는 이유로 하는 일만으로 살아간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Part 4, 마음이라는 물음표>에서는 나는 나를 위해 꽃을 사본 적이 있던가?(p272)’라는 질문에 아니요.’ 라 답한다. 친구의 생일이나 각종 축하를 위해 꽃을 선물한 적은 많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를 위한 꽃은 단 한 송이도 없었다. 조만간 꽃집에 가야겠다.

 

자기만의 방에는 인터넷도, 와이파이도 없어야 한다.(p187)’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 나서 가방 속에 넣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 때문이다.

9월 말부터 지난주까지는 삼행시부터 시조, , 독후감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모전에 글을 응모하였다. 1학기가 지난 후에 올해의 목표를 점검해보니, 글쓰기대회에 한 번 밖에 안 나갔기 때문이다. 온라인상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하여 결과가 발표되면 올릴 작정으로 저장만 해놓고 스탠바이 중이다. 아침에 큰딸에게서 카카오 톡이 왔다. ‘엄마, 등교했어?’ ‘.. 출근이라고 해줘ㅋㅋ’ ‘ㅋㅋㅋㅋㅋㅋㅋ글짓기 지난주 아녔어?’ ‘떨어졌떰ㅠㅠ 2ㅠㅠ’ ‘오구오구, 고생해써.’ ‘이제 7개 기다리는 중.’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 하나는...^^’

뒷부분에 생략된 딸의 말은 뭐 하나는 건지지 않을까?’정도일 거다. ‘아기는 걸음마를 배울 때 평균적으로 2천 번 넘어진다고 해.(p119)’ 지난 주 발표결과로 잠시 좌절했지만, 이 문장을 보고 힘을 얻는다. 과학을 전공한 내가 근본도 없이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아가만큼은 시도해줘야 하지 않겠냐며.

떨어진 글을 공개한다는 것은 다소 뻘쭘한 일이다. 상 받은 것만 기분 좋게 올리고 싶던 것도 사실이다. 실패한 글, 서툰 글도 모조리 올린 것은 모든 경험들이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무모하지만 계속 도전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울리는 온기어린 글을 쓰는 멋진 사람이 되리라 기대한다. ‘하나의 없음을 용기 있게 드러낼 때, 누군가의 없음이 반응하기 때문이다.(p25)’ 이런 글도 라 말할 수 있을까. 알라딘 서재에 시를 업로드 할 때마다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다. 이 문장으로 힘을 얻는다. 누군가는 나의 글을 보고 시를 써볼 용기를 얻을 지도 모르므로.

 

<Part 3, 관계라는 물음표>에서는 대화에 관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대화를 할 때, 내가 상대방에게 듣고 싶은 문장은 (중략) 3인칭 주어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중략) 1인칭 주어로 시작하는 문장들이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와 마주하고 앉은 눈앞의 그대다.(p215~217)’ 이 문장을 읽고 난 다음 날에는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3인칭 주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 보였다. 계속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친구도 떠올랐다. 대화 장면을 떠올려보니 1인칭과 2인칭이 주를 이루었고, 대화의 끝에 나의 생각을 자주 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림에 대한 취향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가. 예전에는 풍경화가 좋았는데 인물화의 매력이 확 다가온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그림은 인물화이다. 저자의 해설을 따라, 혹은 나름대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았다. 고요함과 다이내믹함과 장조와 단조의 느낌이 다채롭게 뿜어져 나왔다. 뒷모습조차 표정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소개된 그림 중에는 걸음마 하는 아기를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First Steps>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요즘은 꿈틀거리는 선과 따스한 색채가 좋아지나 보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 나갈 삶의 방향을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다. 많은 문장들이 비타민제가 되어 기운 없이 비틀거리던 마음에 조금씩 힘을 실어주었다. 그림에 관한 책인데도 인용된 문구가 좋아 읽어볼 만한 책을 소개받는 기분도 들었다.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바버라 애버크롬비의 <작가의 시작>,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를 읽고 싶은 책으로 메모했다. 인문학적인 사유가 담긴 글들이 그림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그림은 다만 거들 뿐이었다.

특별해서 기록하는 게 아니라, 기록해서 특별해졌음을.(p344)’ 많은 문장들이 마음에 남았지만 이 문장이 가장 좋았다. 이 생각 저 생각 일관된 주제 없이 적힌 독후감이지만, 이 글은 기록되면서 나만의 느낌이 담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글로 특별해졌다.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 준 이 책처럼. 시를 쓰는 의미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냥 스쳐 가면 잊힐 새벽 3시가, 날 좋은 일요일 아침이, 서운하거나 상처받은 순간들이 시에 담기는 순간 사진에 담기듯 저장되었지. 글로 붙잡히면서 날카로움은 더 이상 내 심장으로 날아들지 못했고, 따스함은 심장 너머 주변의 공기로 오랜 시간 머물렀다. 가슴이 조금씩 다시 뛰기 시작했다.

 

p327, 돗단배 돛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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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8-10-09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짝 궁금했었던 책인데 덕분에 갈피를 잡았습니다. 이번달 책주문 할 때 같이 주문하기로 했어요. 고마워요 ^^

나비종 2018-10-09 02:09   좋아요 1 | URL
글과 그림의 균형이 잘 맞는 책입니다. 각각의 주제에 들어맞는 그림을 바라보는 재미도 있구요. 저는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