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은유 지음 / 유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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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 모나리자! 초등학교 때 유행하던 말장난이다. 단지 네 글자 발음하는 데에도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지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 책에 담긴 104편의 짤막한 글들이 그랬다. ‘글쓰기라는 일관된 과녁을 향했지만 조금씩 다른 에피소드를 담고 전개되는 글들은 매번 달랐다. 1쪽 안에 새겨진 디테일과 완결성이란! 은유의 글을 보며 TV 프로그램에 나왔던 기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쌀 알 하나에 다보탑을 새긴다는 사람을. 고급 일식집에서 새우튀김 한 개를 맛본 기분이었다. 한 입 베어 문 순간 절로 깨달아졌다. 그녀는 훌륭한 요리사였다. 내가 계란 프라이만 할 줄 아는 원 푸드 초보 주부라면 그녀는 달걀 한 개를 놓고도 계란찜, 계란말이, 스크럼블 에그, 계란탕을 구현했다. 계란 프라이만 하라고 해도 채친 당근과 쪽파 등으로 색다른 데커레이션을 구현할 것 같았다.

 

글을 요약하는 게 힘들어요. 대학에 다니던 제자는 말했다. 20~30장 리포트를 쓰는 건 일도 아닌데 그걸 A4 한 장으로 제출하라는 과제가 너무 어렵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줄줄이 꿰어지는 이야기는 방앗간 가래떡처럼 언제 끊길지 몰랐다. 중간에 칼을 댈라치면 어정쩡한 거지 컷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시 쓰기에 도전한 이유 중 하나다. 시에 담으면서 흰 색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마법을 경험하였다. 입금 전후 배우의 모습처럼 최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침표가 찍히는 장소가 생경했다. 짐작할 수 없는 내 글의 마지막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단어를 잘라내고 이리저리 배치를 바꾸다가도 누에고치처럼 구구절절 뽑아내던 문장을 송두리째 버렸다.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깜지가 될 즈음 알라딘 서재에 업로드 했다. 찜찜한 마음을 꼬리표처럼 매단 채였다.

 

아름다운 표현에 자주 현혹되었다. 햇살, 바람, 나무를 이용하여 글에 색칠을 했다. 하늘하늘한 수채화이기를 바라며 붓을 들었다. ,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표현이야.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를 썼다. 그렇게 몇 십번을 반복하니 입에 물렸다. 뻔한 표현, 남들도 다 하는 비유라는 생각이 점점 진해졌다. 제대로 된 화장법도 모르고 입술만 시뻘겋게 두드러진 갸루상이었다. 나의 글이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전력질주 하던 커서는 점점 발걸음이 둔해졌다. 짧은 구간을 왕복달리기만 하던 날들이 지나갔다. 우측 깜빡이만 넣고 출발도 못하는 초보 운전자가 되었다. 감성은 종종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햇살과 바람과 나무가 예민하게 살갗을 건드리는 건 사실이었다. 재료는 같았지만 질감과 양과 투명도는 달랐을. 감성은 발끝을 보이는데 허리를 숙여도 닿지 않은 손끝으로 초라한 글이 매달렸다. 미묘한 채도의 차이를 글로 그려내는 데 한계를 느꼈다.

 

새벽 세 시에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느낌표로 남은 문장들이 수시로 볼펜 끝에서 복기되었다. 수많은 느낌표를 나무인 양 마음에 심었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리뷰 안으로 어떤 문장도 불러내기 어려웠다. 느낌표가 빽빽한 숲을 이룰 무렵 물음표 하나가 꽃으로 피었다. ?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작가의 책은 이 한 글자를 남긴 채 어젯밤과 오늘 새벽을 주섬주섬 챙겨가지고 달아났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표현의 한계가 아니었다. 그건 둘째 문제였다.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은 나의 글의 존재 이유였다. 왜 나는 글을 쓰는 걸까?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대의 따위는 없었다. 내 글의 시작은 나의 눈물을 닦아내는 손수건이었다. 글자로 이루어진 알라딘 램프의 지니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시린 공기가 폐 속을 들락거리는 날이면 따뜻한 숨결을 후 불어넣어 주는, ‘나 너무 외로워라 쓰면, 내게도 나 너무 외로워라 말해주는. 내 마음이 담긴 글자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손난로를 쥐게 된 양 온기가 저릿했다. 글을 쓰는 건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자주 외로웠다. 그것이 존재의 원초적인 고독에서 기원한 것인지 관계의 삐걱거림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은 마음으로 스며드는 냉기였다. 냉랭해진 관계의 원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변인들이 시간과 공간을 품고 이미 지나가버린 상황에서는 더구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이것 때문이었을까, 저것 때문이었을까. 모든 것이 원인이었고 그 무엇도 원인이 아닐 수 있는 아이러니였다.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들어낸 드넓은 공간에서 선명한 좌표를 찾아 점을 찍으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견딜만할 때에는 책을 읽었다. 한겨울 노숙자가 된 기분으로 드라마를 신문지처럼 덮고 잤다. 그마저 견딜 수 없을 때 하게 된 것이 글쓰기였다. 시집이든 소설이든 동화든 다큐 형식의 글이든 책을 읽을 때마다 알라딘 서재에 리뷰를 올렸다. 때때로 일렁이는 마음을 시로 옮겼다. 되도 않는 글을 무작정 끄적거렸다. 글은 자꾸만 초라해지려는 나를 어루만졌다. 내게 있어 글은 온기를 향해 허우적거리는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아프다며 질척한 넋두리를 하는 글들이 많았다. 음울한 흑백 사진 같다 여겼다. 어떤 이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뿐인데 내 글을 읽고 울었다는 이가 생겼다. 내게서 나온 글이 누군가에게는 거울이 되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는 이들이 간혹 고맙다는 댓글을 남겼다. 신기하면서도 신이 났다. 즐거운 근육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글도 그림처럼 해석의 차이가 강하게 작용하는 예술이었다.

좋은 글은 자기 몸을 뚫고 나오고 남의 몸에 스민다.(p219)’라는 말처럼 내 글에 조금이나마 좋은 글의 꽃가루가 묻게 된 것일까. 물음표의 포장을 뜯고 보니 화살표가 들어있었다.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 왠지 알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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