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책 - 오염된 세상에 맞서는 독서 생존기
서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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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변화라 생각했다.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기만 하면 물에서 수증기로, 수증기에서 얼음으로 고체, 액체, 기체의 상태 3종 세트를 종횡 무진하는 물처럼 주변 환경만 변하면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는 관계. 남편와의 관계는 어느 순간 이런 의미로 정의되어 왔다.

관계의 물리 변화에는 나태한 마음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주변 환경만 변하면이라……. 전제 조건이 붙는 관계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가. 환경은 그리 쉽게 변하는 요인이 아님을. 우주 만물에 존재하는 각양각색의 에너지가 얽힌 세상에서 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는 생각만큼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경직된 거리감으로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관계라는 생각을 하며 등속운동의 시간-속력 그래프를 떠올렸다. 세상 참, 재미없다. 희망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래는 아득했다.

 

서민의 책에 주로 손이 가는 상황이 있다. 춥다는 느낌이 묵직한 추가 되어 마음에 매달릴 때이다. 그의 글을 따라가며 간간이 피식거리다보면 삶의 중력이 조금이나마 약해진다. 나의 소박한 기대는 매번 충족되었고 집을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집어든 집 나간 책은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가라앉은 마음이 반응의 역치를 높였지만 넘어간 책장이 남아있는 책장보다 두꺼워질 무렵, 마음은 향긋한 빵처럼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그의 글이 내 감성의 주파수와 맞는 걸까. 서민의 글이 좋은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극단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자극적이고 과격한 시선으로 부담을 주지 않고, 지나치게 현학적인 어휘 끝에 따라오는 재수 없음도 없다. 그렇다고 고지식하지도 않다. 단맛이 살짝 가미된 플레인 요거트 맛이다. 기분 좋게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는 종종 글을 통해 내가 우울할 때 마음을 다독여주는 친구가 된다.

 

서평과 세상, 저자의 이야기를 연결하여 3개의 장에 나눠 담았다. 1장은 사회적인 이슈나 현상을, 2장은 일상적인 경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3장은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가는 서평이다. 사회, 일상, 학문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무지와 편견과 오해를 부드러운 예리함으로 묘사한다. BGM처럼 깔리는 유머는 덤이다.

책장이 얼마 넘어가지 않았을 때만 해도 책속에 담긴 세상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었다. 글이 펼치는 그들만의 세상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인간으로서의 양심, 416일의 기록, 강자들을 위한 도구인 법,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아이들 세대, ‘적당히가 우선하는 사회, 사회적 차별에 관한 이야기들이 손끝을 지나가면서 마음의 색채는 조금씩 달라졌다.

전혀 감성적이지 않은 글이 오히려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계속 읽다보면 일렁이는 마음의 파동이 잦아든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마다 이성적인 글을 쓰는 알라딘 서재를 찾게 되는 이유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언급하는 글에 젖어들었다. 바싹 마른 싸리비로 어질러진 내면의 마당을 쓱쓱 청소하는 듯 점점 개운해졌다.

 

책의 3분의 1지점에 이르자 마음이 크게 들썩였다. 정희진처럼 읽기에 있다는 구절 때문이다.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p91~92)’ 같은 문장을 서성이며 몇 번이나 읽었다.

화학 변화였구나. 전혀 다른 물질이 되어버려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관계였어.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부스스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거울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외면하던 상황을 다른 이의 글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오히려 마음은 담담해졌다.

 

덴마크의 과학자 외르스테드는 전류와 관련된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변에 자기장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연은 선물 같은 순간을 떨구고 지나갈 때가 있다. 책 속에 소개된 책에서 얼떨결에 의미 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처럼. 곳곳에 숨겨진 작은 보물을 찾는 기쁨, 책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이다.

인터넷과 책은 이런 점에서 선명한 차이로 갈린다. 적절한 검색어를 입력해 원하는 정보를 얻는 인터넷과 달리 책을 통해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많다. 매일 오가는 출근길 풍경도 자동차의 속도에 따라 생경하게 다가올 때가 있듯 나만의 속도로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엉뚱한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배경지식이 제각기 다른 독자들은 저자가 의도한 주제대로 책을 읽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맥락의 주제는 분명 보이겠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책장을 넘기는 순간의 감정 상태에 따라 좁다랗게 이어진 골목길로 들어갈 수 있다. 책이 지닌 강력한 매력이다.

 

글쓰기와 관련된 몇 가지 팁도 얻는다. ‘한국인은 그 세 단어 -있었다, , -를 문장에서 너무 자주 사용한다.(p182~183,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문장이 리뷰를 쓸 때 자꾸 생각났다. 의식적으로 세 단어를 빼가며 글을 쓰니 문장이 담백해졌다. ‘독자에게 설명하려 하지 말고 직접 보여주어라.(p239, 유혹하는 글쓰기)’,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p239, 마르셀 프루스트)’ 라는 문장은 표현 방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조금씩, 날마다, 꾸준히- 이것이 글쓰기의 세 가지 원칙이다.(p186,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지난겨울, 1월과 2월 두 달 동안 매일 수필을 쓰듯 글을 썼다. 매일 글을 쓰며 하루라는 책꽂이를 정리했다. 이번 여름에도 두 달 동안 시도할 계획이다. 사실 조금씩, 날마다, 꾸준히는 삶의 다양한 분야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운동, 다이어트, 공부에서부터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정희진의 문장을 보며 가장 풀기 어려웠던 관계를 냉철하게 판단하였다. 서민의 글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씩 귀 기울이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였다. 유머가 담긴 서민의 발상에 피식피식 웃다보니 낙천적인 마음이 되어갔다. 그래, 이유가 없다는데 어쩌겠어. 물컹하던 계란은 이미 프라이팬 위에서 단백질 변성이 일어나 프라이로 굳어져 되돌아가지 않을 텐데. 삶은 달걀이나 계란찜을 바랜다는 게 우스운 일이지. 이제 나의 선택지는 계란 프라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적당히 간장을 뿌려 밥과 함께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다. 교육자의 마인드로 조금씩, 날마다, 꾸준한 변화를 도모할 밖에. 풀리지 않던 관계의 해법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하며 두텁게 입고 있던 외로움의 외투를 벗어던졌다.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서툴지만, 글을 쓸 수 있어 다행이다.

 

p58, 밑에서 10째줄 : 신기하기도 신기하게도

p95, 2번째 단락 1째 줄 : 한 장 한장 한 장 한 장

p293, 3째 줄 : 1969716(중략) 아폴로 11호가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한 날이다. 16일은 발사일, 20일이 착륙일

 

관심 가는 책

<정희진처럼 읽기>,<마음을 읽는다는 착각>,<안정효의 글쓰기 만보>,<아주 사적인 독서>,<너라는 우주에 나를 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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