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판 멘토는 없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멘토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았다 ...(중략).... 어떻게 하면 자기들도 ‘멘토’를 구해서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었다. 조금은 시시했다.


- 멘토는 없다, 주진형 칼럼 中

 







                                                                                                     안철수는 한때 " 국민 멘토 " 였다. 그는 진보는 물론이요, 보수층도 두루두루 ' 아우 ' 를 만큼 시대의 ' 형님 ' 이자 스승이자 어르신이었다. 그는 초능력자들이 즐겨 입는 망토 입은 멘토'였다.

그가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룸살롱이 뭐예요, 마카롱이에요 ? _ 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순진한 남자의 순정을 믿어 의심치 아니했다. 대구의 모 국회의원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찬란한 밤 문화를 마카롱化시키는 작태에 새빨갛게 발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꼰대에게 있어서 벤츠 몰고 룸빵 가서 여자 끼고 양주 원샷 때리는 것이 그 인간에게는 성공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자칭 / 타칭,  자신을 " 진보라 " 믿었던 이들은 안철수에게서 컬러풀한 아우라'를 보았다. 진보라보다는 연보라색을 좋아했던 나는 안철수를 멘토라고 숭배하는 대중의 꼴도 우스웠고, 스스로를 멘토라고 생각하는 안철수의 꼬락서니는 더더욱 우스웠다. Oops !!!   

          

 인생은 " 독고다이 " 라고 믿는 나에게 멘토는 공갈빵'이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것이 인간인데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인가 !  성공한 사람 옆에 붙어서 기생하고 싶은 멘티와 그것을 이용해서 나와바리를 확장하고 싶은 멘토가 있을 뿐이다. 내 허락 없이 이 골목 전봇대에 오줌 싸지 마라잉.  안철수는 멘토의 낯짝을 제대로 보여준 인간'이었다. 형광등 3만 개를 켜놓은 듯했던 아우라는 사라진 지 오래. 후광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초등학생 한 명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내가 안철수입니까, 갑철수입니까. 네에. 아, 아아.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아이 실망입니다.  

찬란한 어록을 남기고 사라진 그를 볼 때마다 멘토는 꼰대의 순화된 버전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국 문단의 슈퍼스타 김경주 시인이 대필을 시인했다. 김경주 시인이 작성한 < 미디어 아티스트 흑표범의 전시 도록 해설 > 은 알고 보니 차현지 소설가가 대필한 것으로 밝혀졌다. 두 사람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당시 김경주는 문단의 불야성 같은 존재였으니 차현지 작가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멘토였으리라. 김경주는 언론 인터뷰에서“ 2016년 미디어 아티스트 흑표범의 전시 도록에 해설 원고 청탁을 받았으나 마감이 지나도록 쓰지 못하던 차에

후배이자 제자 격인 차현지 소설가가 자기 이름으로 나가지 않아도 좋으니 자신이 써 보겠다고 했고, 합의 하에 차 작가가 원고를 썼다”고 밝혔다.  김 시인은 “ 몇 년 지난 뒤 흑표범 작가에게 말해서 필자 이름을 바꿔 주기로 차 작가와 합의했고, 얼마 전 흑표범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 이런 사실을 알렸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들 사이에 험한 소리가 오갔던 모양이다. 김경주 시인은 " 차 작가와는 시나리오 메인 작가와 서브 작가, 인터넷 문학방송 피디와 구성작가, 미술전시 공동 프로젝트 등 많은 작업을 같이 했고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였는데, 최근 소원해져서 나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주변에 하고 다닌다고 들었다"

라고 말한 반면에 차현지의 말은 김경주의 말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한국일보와 전화통화에서 “ 김 시인이 먼저 대필 제안을 해왔다 ” 며 “ 당시 저는 작가적 자의식이 없는 신인이었던 데다 글을 쓸 기회가 너무나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 라고 말했다. 또 “ 대필을 제안하고 수락하는 관계는 결코 수평적인 관계일 수 없다 " 라며 “ 다른 신인 작가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대필 사실을 밝히게 됐다 " 라고 말했다. 누구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서로 드잡이하며 싸우는 꼴이 매우 뷰티풀해서 원더풀하다. 

인간이란 궁지에 몰리면 서로 물어뜯는 존재여서 드잡이의 풍경을 역겹게 볼 필요는 없다. 빈정 상하면 드잡이 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여튼....... 멘토와 멘티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멘토는 없다. 상처에는 마데카솔 연고가 좋다고 하지만 빈정으로 인해 발생한 심리적 상처에는 좋아라마이싱이 최고의 명약이다.  팔팔년도 쌈마이 동네 3류 극장 광고 버전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 (에코 빵빵 넣은 음향 버전) 오고가는 말풍선에 싹트는 우정. 어느덧 뾰족한 말풍선에 갈라선 빈정. 상처에는 마데카솔 / 빈정에는 좋아라마이싱. 동원극장 사거리 맞은편 광동 약국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 ! 
 




+  덧대기

 

김경주 시인이 차현지 작가'에게 보낸 메일.  메일 속 문장을 보면 그 유명한 굴다리 싱하형 문체가 생각난다.  싱하형 문체란 대략 이런 것이다.  " 형, 조낸 화났다. 지금 당장 굴다리 밑으로 쳐와라. 10초 준다. 8초, 9초 이런 건 소용 없다. 정확히 10초다. 지금부터 지켜보겠다  " 김경주의 문체를 싱하형 문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형, 조낸 화났다.  마지막 경고다.  글 지우고 한강 굴다리 밑으로 와라.  10초 준다.  9초, 8초 이런 건 소용 없다.  1초 늦을 때마다 내 주먹감자가 네 면상을 강타할 것이다.  그 파급력은 너의 주변인과는 다를 것임을 문학적으루다가 약속할 수 있다. 찌질이 새퀴, 긴장해라. 형을 몰라보는 새퀴는 조낸 죽을 때까지 패버린다. 내 나와바리에 오줌 싼 놈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단 나와라. 한강 굴다리에서 조낸 맞고 시작하자. ① 일 말의 용서도 없다. ② 두 말 하면 입 아프니까. ③ 세 말 하지 않으련다. ④ 네 말 명심해라.  자비는 없다. 형, 조낸 화났다. 쳐와라. 기한은 그때까지 딱 10초 준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드로사랑해 2019-05-30 1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소원해져서 나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주변에 하고 다닌다고 들었다˝고.
지가 잘못해놓고 자기 뒷담화하고 다닌다고 징징대는 것도 꼴볼견이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30 16:3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부분이 참...... 품격을 훼손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글구 보면 문인들은 말을 참 우아하게 하세요.
그냥 뒤따마‘라고 하면 될 것을 나에 관해 부정적인 말‘로 표현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죠.

잠자냥 2019-05-30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경주가 차현지에게 보낸 (협박) 메일 보면 문장도... 참.......
시는 대체 어떻게 썼을지 궁금해지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30 16:36   좋아요 0 | URL
협박 메일도 있나요 ? 아. 찾아보니 뭐, 법적 대응 운운했었나 보죠 ? 허어..

잠자냥 2019-05-30 16:57   좋아요 0 | URL
넵 문제의 메일은 이 기사 끄트머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034

곰곰생각하는발 2019-05-30 17:07   좋아요 0 | URL
오, 방금 읽었습니다. 이야... 이거이거이거참............ 경주 씨, 이런 메일 보낼 때는 문장이 너무 아름답네요...ㅎㅎㅎㅎ

수다맨 2019-06-0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집에는 시집들이 거의 없는데 마침 김경주의 첫 시집인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쇄본이 있더군요. 바로 버렸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4 16:45   좋아요 0 | URL
저는 시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서
김경주가 왜 이름값을 하는지 잘 이해는 안 가더군요.

수다맨 2019-06-05 13:29   좋아요 1 | URL
김경주가 이름값을 얻게 된 배경에는 (본인의 역량도 있겠지만)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권혁웅의 전폭적인 지지도 한몫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혁웅은 2000년경에 문단의 주류적 경향이었던 서정시들을 크게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황병승, 김경주의 시들을 내세웠지요. 뭐 단지 이러한 이유 때문에에 김경주가 이만큼 뜬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당대의 신진 비평가들(권혁웅, 신형철 등등)이 김경주에게 보냈던 기대와 지지와 후원이 컸다는 것만큼은 기억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5 13:40   좋아요 0 | URL
생각나네요. 권혁웅이 주도해서 이들을 이끈 측면이 큰데..
전 개인적으로 권혁웅을 매우 싫어합니다.
 


 

 

 

 

 

 

 

 

 

 

 

 

 

                                      

 

병  아  리  와    옥  수  수  :

 

 

 

 

 



대한민국 치킨뎐

















영화 << 집으로 >> 에서 시골 외딴집에 사는 외할머니는 도시에서 온 손자가 밥을 안 먹는 바람에 속앓이를 한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손자는 손짓, 몸짓, 말짓을 모두 동원하여 켄터키가 고향인 닭에 대해 말한다.

이마 위에 한손을 올리고는 닭벼슬 흉내도 내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바짝 붙인 후 파닥파닥 날갯짓도 흉내를 낸다. 할머니, 꼬꼬댁. 파닥파닥, 알지 ?          그날 할머니가 손자 앞에 내놓은 것은 " 물에 빠진 닭 " 이었다. 노란 치킨을 원했던 손자는 하얀 백숙을 보자 밥상을 뒤엎는다. 짭쪼름한 천하장사 소세지를 달라고 했더니 닝닝하고 쓴 맛이 강한 도라지를 내놓은 꼴이다. 손자는 " 도라지처럼 토라져 " 입이 댓 발 나온다. 손자 입장에서 보면 닭과 치킨'은 둘리처럼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전혀 다른 음식'인 것이다. 저개발의 시대를 관통했던 할머니에게 닭 요리는 곧 백숙을 의미했다.

그 시대에는 거의 모든 고기를 물에 익혀 먹었던 시대였다. 가족 구성이 대가족 형태이다 보니 귀한 고기'로 많은 사람이 고기 맛을 맛보기 위해서는 국물로 요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60년대와 그 이전이 " 물에빠진 백숙 " 의 전성시대였다면, 70년대는 " 전기구이 통닭 " 의 전성시대'였다. 옷을 입히지 않고 홀딱 벗기기는 했으나 끓는 물에 익혀 먹는 방식이 아니라 구워 먹는 전기구이 방식의 통닭은 백숙에서 치킨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중간 단계를 차지한다(당시에는 고기의 기름 맛'을 매우 귀하게 여긴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워서 기름을 빼는 요리법은 사치에 가까웠다). 그것은 백숙도 아니고 튀김도 아닌,  마치 물속에서 사는 어류와 땅위에서 사는 파충류의 중간 단계인 양서류와 같은 포지션이었다.

" 통닭 " 이 " 치킨 "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점은  식용유가 업소용으로 값싼 가격에 대량 유통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부터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튀김옷과 옥수수 기름이 만나 후라이드(fride)한 닭고기 튀김'이 탄생한다.  와우, 판타스틱 치킨 베이베, 오예 ~                         치킨을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딱 한 입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전설의 치느님이 탄생하게 되는 원년'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혓바닥이 남성의 귀두요, 여성의 클리토리스라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식욕이 성욕이었던 것이다. 뜯으면서 느끼는 것이다. 오, 예 ~ 우, 판타스틱 베이비 ~

재미있는 사실은 치킨용 닭은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닭에게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튀김옷을 입혀서 옥수수 기름으로 튀김 요리를 내놓은 것이 바로 치킨이라는 점이다. 지금 당신이 혀끝에서 느끼는 오르가슴은 옥수수 맛이다. 그 인기가 영원불멸하여 결코 시들지 않을 것 같았던 프라이드 치킨도 90년대 들어서면서 양념 치킨에게 그 영광을 양보한다. 양념은 주재료가 고추장, 물엿, 간장인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물엿'이다. 치킨 양념에서 물엿이 차지하는 비율은 팔 할'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지점은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물엿이다.

설탕이 사탕수수로 만든 당이라면 물엿은 옥수수로 만든 액상과당이다.  액상과당이 설탕보다 나쁘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옥수수 거의 대부분이 GMO(유전자조작농산물) 식품이라는 점에서 물엿으로 맛을 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설탕으로 맛을 내는 것이 그나마 낫지만 액상과당(포도당과 과당의 액상 혼합물)이 설탕에 비해 값은 싸고 단맛은 강해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음식이 액상과당으로 단맛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 ①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닭을 ②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튀김옷을 입혀서

③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기름에 튀기고 나서  ④ 유전자 조작 농산물인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물엿을 다시 입힌 것이 바로 ⑤ 대한민국 양념 치킨'인 것이다. 그렇다면 양념치킨이야말로 유전자 조작 농산물로 생산한 정크푸트의 끝판 대마왕이 아닐까 ?  지금 당신이 찬양하는 치느님은 닭의 외피를 두른 GMO 옥수수'다. 그런 점에서 양념치킨은 박근혜의 반대말이다. 박근혜는 인간의 외피를 두른 닭이었으니깐 말이다. 오, 판타스틱 어덜트 베이비. 내가 대한민국 치킨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닭 요리법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비만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한국인 체형이 미학적으로 가장 훌륭했을 때'는 1970년대이다. 1970년대는 비만 인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었으며 대부분은 날씬한 체형을 유지했다.  암 유병률도 매우 낮았다. 그리고 비만과 당뇨는 " 부자병 " 이라 해서 일부 특권층의 사치병이라 불렸을 정도'다. 전기구이 통닭 시대가 한국인에게 가장 뛰어난 식단을 제공한 셈이다. (전기구이)통닭과 백숙 요리법의 핵심은 주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요리를 한다는 점이다. 반면, 체형에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한 80년대에는 탄수화물을 지방(기름)으로 튀기는 요리법이 인기를 끌었다.

탄수화물 + 지방이 만나는 순간, 한국인의 체형은 서서히 살이 붙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름을 쏟아부은 요리법이 바로 단짠 양념의 과다 사용'이다. 90년대 이후, 비만과 당뇨가 치솟기 시작한 것은 원인 중 하나가 과도한 단짠 양념에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닭 요리법의 진화는 결국 소울푸드였던 것이 정크 푸드로 변하는 과정과 일치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퇴행'이다. 그렇기에 양념 치킨(고탄고지+ 액상과당 과다)보다는 후라이드 치킨(고탄고지), 후라이드 치킨보다는 튀김옷을 입히지 않은 전기구이 통닭(고단), 전기구이 통닭보다는 백숙'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맛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소비 사회에서 적게 먹는다는 것은 매우 큰 미덕이며 똥을 너무 많이 싸는 것은 꽤나 은밀한 악덕'이다.










+ 덧대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험사회 (반양장)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 새물결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    닝    썬          사     태       :

 

 

 

 

 

 

 

 


 

                                                정준영, 승리하다 !


 

 

 

 

 


                                                                                             < 나비효과 > 를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욥,8 :8) _ 로 요약할 수 있다. 약쟁이라면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마약하리라 _ 일 터이고, 풍각쟁이라면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솔솔, 라라라, 시시, 도도하리라 정도 ?!  버닝썬 사태'가 그렇다.

나이트클럽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시비와 다툼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력을 과시하는 불알후드가 이익 집단과 결탁하게 되면 불미스러운 사건은 대부분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시시하게 끝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스토리텔링이었기 때문이다. " 오고가는 주먹질 속에 싹 트는 쌍방 과실 " 로 끝나야 할 서사'가 태풍의 눈으로 둔갑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일이 어느새 이삼사오육칠팔구로 확장되었다. 이제 불타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승리'였다.  승리 했기에 실패한 이상한 서사로 둔갑한 것이 버닝썬 사태'다.

 

훗날, 이 사태에 대하여 사람들은 나비효과'를 " 승리하다 " 라는 신조어로 부를 만하다. 정준영 사태는 전형적인 " 승리하다 " 이다. 옛날에는 정준영이 " 죄송한 척이라도 할 수 있었 " 는데  지금은 " 죄송한 척도 할 수 없을 " 만큼 일이 커졌다. 불미스럽다(不美-) _ 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역겨운 성범죄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정준영의 도덕불감증을 비판하는 것은 다 된 밥에 밥숟가락 드는 꼴이니 굳이 내가 잣 까면서 수박 씨 발라먹는 소리로 시일야방성대곡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이의 글을 참조하시라. 굳이 한마디 거들자면 우리는 추악한 한국 남성 문화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 중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지적처럼 과학기술 발전은 현대인에게 물질적 풍요를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을 선사했다. 몰카가 대표적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상대방을 속인 채 성행위 동영상을 찍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섹스 동영상의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여성에게 위험요소로 작동한다. 반면에 몰카 가해자인 남성에게도 과학기술 발전은 위험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가해자인 남성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온갖 자료를 삭제한다 해도 삭제된 증거를 다시 복원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이 발전했으니 이 또한 위험요소이다.

울리히 벡은 이 점에 주목한다. < 위험 > 은 성공적 근대가 초래한 딜레마이며, 산업사회에서 경제가 발전할수록 위험요소도 증가하고, 후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과학기술과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에서 나타나며, 무엇보다 예외적 위험이 아니라 일상적 위험이라는 것이다. 이 위험 요소를 줄이는 방법은 원시적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삶으로부터의 독립이다. 당신이 SNS에 남기는 모든 흔적은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명탐정 홈즈 시리즈'가 독자에게 남기는 교훈은 매우 단순하다. 범인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나서 생각 없이 내 블로그 댓글 창에 남긴 댓글'이 나중에 증거로 활용될 수도 있다. 당신에게 울리히 벡의 사회학 명저 << 위험사회 >> 를 추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3-14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3-15 16:42   좋아요 0 | URL
ㅎㅎ 정말 딴나라 세계인 것 같습니다..
 
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현 가능한 환각의 출현 :

 

 

 

 

 

 

 

 

 

​악어 이야기

 

                                             

                                                                                                                   훌륭한 이야기에는 항상 " 악어 " 가 등장한다. 만약에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책에서 악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다. 그런 책은 재미없어 !

악어가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유명한 재담'이다)  :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불평하는 여성 환자가 있다.  여자는 악어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 그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침대 밑에는 악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와, 악어 있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이대 나온 여자라고요 ~   하지만 의사는 도시에서 악어 출현은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무시한다.  두 번째 상담에서도 그 환자는 여전히 똑같은 불평을 하지만 남자는 지난번 진단과 같은 처방을 내린다. 와, 악어 없다니까요 ~    왜, 내 말을 안 믿냐고요 ~     나, 정신과 의사라고요 ~               

세 번째 상담이 있던 날,  약속했던 환자가 나타나지 않자 의사는 환자의 망상이 사라졌다며 기뻐한다.  만약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다면 이 이야기는 매우 지루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뒤, 의사는 환자 친구인 k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환자의 안부를 묻는다. k가 말한다.  그 악어한테 잡아먹힌 그 사람 말하는 겁니까 ?  침대 밑에서 악어가 살았다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에서 < 악어 > 는 현실 공동체 질서 안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환각'에 불과했지만,  현실 속에서 " 실현된 환각 " 으로 나타나면서 서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악어는 스토리텔링1)에서 매우 중요한 오브제이다.

이명박 스토리와 박근혜 스토리가 매우 흥미진진했던 까닭도 인간의 눈에서 악어의 눈물이 흐른다는 데 있다. 아, 아아아아아악어의 눈물이라니. 그것은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맥주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꼴이다. 쇼킹하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며 흘린 박근혜의 눈물을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당황했었다. 어, 어어어어어어...... 닭이 아니라 악어였어 ???!!!!  이처럼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항상 악어 한 마리 정도는 비장의 카드로 숨겨놓아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어느 하드보일드 작가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권총을 등장시키면 된다고 충고했다.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글을 쓰다가 막힌다 싶으면 악어 한 마리를 등장시키라구.

그런데 악어가 한 마리가 아니라 악어가 떼로 등장하는 만화가 있다.   바로 << 악어 프로젝트 >> 라는 프랑스 만화'이다.  이 책에서 남자는 모두 초록색 악어로 등장한다.   악어 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사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그리고 있는데 양성 평등 국가로 알려진 프랑스에서도 이 문제만큼은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초록색 악어들은 호시탐탐 여자들을 잡아먹을 궁리만 한다.  " 남자는 모두 다 늑대(악어) " 라는 말은 세계 어디를 가나 만국공통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남성 입장에서 보면 모든 남성을 포식자인 초록색 악어로 묘사해서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느낌이 드니까.


작가 토마 마티외는 " 악어라는 이미지를 통해 남성 우월주의,  성차별주의,  성적 고정관념,  남성의 성적 욕망,  그리고 실제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거리에서 마주친 남성에게 느끼는 두려움 같은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 고 한다.  남성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초록색 악어는 " 실현되지 않은 NON·REAL(IZE) " 환영에 불과하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초록색 악어는 " 실현된 환각 NON·ILLUSION(ED)" 으로써 라캉의 실재 the Real  2)에 가깝다. < 초록색 악어 > 는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여자에게는 존재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리얼리티 없는 리얼이다.  이처럼 the Real(실재계)은  the reality와는 다른 개념으로 실제(實際)도 아니고 실재(實在)도 아니요, 실체(實體)도 아니다. 

그것은 the Nothing에 접근한 공허(空虛, the void)에 가깝고,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히치코크의 얼룩이자 오점에 해당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남성인 당신은 지난날에 대하여 반성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고,  읽는 내내 불쾌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면 당신은 a son of a bitch crocodile'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말머리에서 소개한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는 여자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익살스러운 재담에서 환자를 여성으로, 그리고 의사를 남성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신과 의사는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는 여자의 말을 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진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   세상의 절반이 악어인데 말이다.  혹시...... 그도 또 다른 악어 한 마리는 아니었을까 ■


​                             


1)      최근에 개봉한 영화 << 도어락 >> 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말하는 히스테릭한 여자 이야기의 변주'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원룸 안에 누군가 있다고 말하는 경민(공효진 분)은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말하는 여자와 동일인이다. 그리고 경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이 형사(김성오 분)는 정신과 의사'이다. 또한,  혼자 사는 여성만을 노리는 범인은 악어'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 - 들'은 예외 없이 모두 경민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대하여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이라고 말하지만 < 실현 불가능한 환각 > 은 < 실현 가능한 환각 > 이 되어 관객 앞에 출현한다.


2)   " 라캉의 실재(the Real)는 현실(the reality)이 아니다. 라캉의 실재는 상징계의 밖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실 밖에 있는, 현실이 아닌,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이다. 라캉의 실재는 경험적 실재와 구별되고, 초감각적 세계의 추상적 실재와도 구별되는 개념이다. 경험적 실재란 우리 주변의 모든 구체적 물건들을 뜻하고, 추상적 실재란 ‘자유’, ‘정의’ 같은 추상 명사들을 뜻한다. 그러나 라캉의 실재는 이것들 중 그 어떤 것과도 상관이 없다.상징계가 언어적 세계라면 실재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밖의 세계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된 세계인데, 실재는 언어로 매개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고, 언어 외부에, 또는 주체 외부에 있는 성(性)과 죽음의 차원이다. 결국 실재계는 불안의 대상이다. 그 세계 앞에 서면 모든 단어들이 얼어붙고 모든 범주들이 추락하는, 그런 불안의 대상이다.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즉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실재계는 표상이 불가능하다. 상상할 수 없고, 상징계 안에 통합시킬 수도 없어서, 우리는 도저히 그 곳에 도달할 수가 없다. 현실 속에서는 결코 제시될 수 없지만 우리가 현실과 밀착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현실 끝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 너머로 속이 텅 비어 있는 심연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재다. 실재는 우리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끔찍한 한계, 즉 그것을 건드리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한계이며, 동시에 그 너머의 공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생각해 보자. 연인 유리디체를 지하세계에서 구출해 나오는 오르페우스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가 내려졌다. 돌아서서 뒤에 따라오는 연인을 바라보는 순간 연인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중간에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았고, 연인 유리디체는 죽었다. 실재의 은유로 이것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실재에 가까이 가는 것은 치명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현실과 실재를 가르는 한계는 근본적 불가능성의 표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넘을 수 없고, 거기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죽는다. 그리고 그 너머는 금지되어 있다. 실재는 그러니까 실체도 없고, 물질성도 없다. 일체의 상징화를 거부하므로 그 어떤 말로도 표상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공허(空虛, the void)이다. 실재는 텅 비어 있는 빈 공간이다 "

ㅡ 박정자 칼럼에서 부분 인용 발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더 더 씨 호밀밭 소설선 3
강동수 지음 / 호밀밭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엉 덩 이 와   히 아 신 스   :




 

 



문학적 영감에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김춘추



 


 


          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A 제자를 꽃에 비유하며 A에게 카카오 메시지 500건과 문자 45건을 보냈다가 학교로부터 교원 품위 훼손에 따른 징계로 정직 3개월 결정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교수가 지속적으로 보낸 문자가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해당 교수는 극렬히 반발하며 문학적 영감(시 창작 수업)일 뿐이라고 행정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근엄한 목소리로 영감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_ 라는 지청구를 날렸다.

이 늙은 영감은 A에게 가장 좋아하는 꽃( : 그녀는 히아신스라고 답했다)이 무엇이냐고 물은 후에 < 히아신스 > 라는 제목의 시를 보낸다. " 엉덩이 속에 다 녹아들어가 있다 / 그녀는 엉덩이가 전부다 / 엉덩이로 생각하고 엉덩이로 꿈을 꾼다 / 엉덩이로 말을 하고 / 엉덩이로 사랑할 줄 아는 히아신스 "  히아신스를 보며 여자의 엉덩이가 떠올라 몸이 달아오른, 이 문학적 영감 머릿속에는 온통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오오오오오 !  엉덩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에게 엉덩이는 뮤즈인 셈이다. 이 얼마나 아스트랄한 문학의 변증법적 상상력인가 ! 웃지 않을 수 없어서 웃는다. 그런가 하면 평창올림픽 때 전문 인력-들이 여성 자원봉사자에게 " 꽃은 물을 줘야 한다 " 며 성희롱을 일삼아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이처럼 꽃은 꼰대들의 문학적 영감'이다. 하지만 꼰대들에게 있어서 꽃보다 더 자극적인 성적 오브제는 과일이다. 속된 말로 남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 여자를 따먹다 " 에서 여자는 과일로 환유된다. 강동수 작가의 단편소설집 << 언더 더 씨 >>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단편 < 언더 더 씨 > 는 세월호 희생자(女)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소설이다. 문제가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앱 " 누가 봐도 이 문장에 사용된 단어들은 성적 암시에 중요하게 쓰이는 단골 낱말들이다.

< 단단하다 > 는 형용사는 발기를, < 탱탱하다 > 는 젊은 피부를, < 과육 > 은 성욕의 식욕화를 환유하는 방식으로, < 앞니를 박아 넣었다 > 는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은유이다. 그리고 " 박아 넣은 ㅡ " 결과 "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 ㅡ" 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화장실 벽낙서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전형이다. 이 문장을 읽은 많은 이들이 세월호 희생자를 성적 대상화했다며 반발하자 작가는 일부분만 발췌해서 전체 맥락을 훼손한다며 화를 냈지만 전체 문맥을 살펴도 달라질 것은 없다.


“ 지금쯤 땅위에선 자두가 한창일 텐데. 엄마와 함께 갔던 대형마트 과일 코너의 커다란 소쿠리에 수북이 담겨있던 검붉은 자두를 떠올리자 갑자기 입속에서 침이 괸다. 신과일을 유난히 좋아하는 내 성화에 엄마는 눈을 흘기면서도 박스째로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오곤 했는데......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큼한 즙액.”

 

나는 작가가 음흉한 생각으로 이 문장을 썼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고착된 여성성(성적 대상화)이 은연 중에 드러난 결과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이 논란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변명하기에 앞서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남성 욕망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했다. 남성 작가라면 남성 화자'가 1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심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더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여성 화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17살 여성 < 나 > 와 남성 작가인 늙은 나를 접선(빙의)시켜야 하는 난이도 높은 기술인데 말이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작가는 1인칭 < 나 > 로 빙의하는데 실패한다.  여자라면 어느 누구도 자두를 먹으면서 내 젖가슴이 탱탱한 자두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앞니를 박아 넣지는 않는다.  같은 이유로 남자라면 어느 누구도 바나나 껍질을 벗기면서 포경인 자신의 성기를 상상하며 맛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만약에 미성년인 여자가 크기가 작은 자두를 자신의 젖과 동일시하면서 성욕을 식욕으로 변주하거나 미성년인 남자가 바나나를 자신의 좆과 동일시하면서 성욕을 식욕으로 변주했다면 그 심리적 기저에는 동성애적 성적 취향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자두에 대한 묘사는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 신체에 대한 상상력일 뿐이다.  

여성을 꽃이나 과일에 비유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여성은 여성 스스로 자신을 꽃이나 과일에 비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의 1인칭 < 나 > 는 외피는 소녀이지만 내피는 문학적 영감의 늙은 목소리일 뿐이다. 이 소설은 소녀 목소리를 흉내 내는 늙은 남자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진혼 굿을 차용한 애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핍진성이 제거된 불가능한 성대 모사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완벽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실패한 소설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다맨 2019-01-16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오십대 후반의 작가가 (고도의 관찰력과 감응력 없이) 십대 소녀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는 데서 이 소설의 문학적/윤리적인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작가 본인과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서 솔직함과 진실성을 갖출 줄 알았다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1-16 16:21   좋아요 0 | URL
남성이 여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저 오만함이 이런 비극을 낳았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