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



 



 

                                                                                                                                                                                           개인의 모든 경험칙'은 " 일반화의 오류 " 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 개인 - 부분 > 은 < 집단 - 전체 > 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작은 편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세계-내-개인 " 은 모두 개구리다, 우물 안 개구리다.

최근에 서지현 검사가 안태현 성추행 사건을 고발하고 임은정 검사가 이에 동조하며 검찰 내부의 사악한 욕망과 은폐를 폭로했던 행위도 일반화의 오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총량은 전체 DB 중에서 매우 작은 편린에 불과하다. 그래서 조직을 사수해야 하는 홍위병들이 내부 고발자가 폭로한 사실과 경험을 공격하는 프레임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이 " 일반화의 오류 " 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서지현 검사는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해서 검찰 조직 전체가 마치 성범죄가 만연한 집단인양 그따구로 매도하지 마시져 ~                            

왜 아니 그러겠는가. 맞는 소리이다. 성추행을 일삼는 검사의 쪽수보다는 정직하게 자기 일을 수행하는 검사의 쪽수가 더 많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  누가 그 개구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최영미 시인의 시 < 괴물 > 에서 불붙기 시작한 논란에 대해서 이승철 시인이 페이스북을 통해 " 우리 EN 시인 " 을 옹호하며 최영미를 공격하는 태도도 홍위병의 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전문은 아래 부록으로 옮겨 놓는다).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 중에서 내 눈에 단연 띄었던 것은 " 성처녀 " 라는 표현이었다.

봄처녀도 아니고 성처녀 ????!!  이 이야기는 일단 잠시 미루기로 하자.  그는 "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 " 라고 말한 후 그녀가 "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한다 " 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글에서 그녀가 쏟아낸 말의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1994년으로 되돌아가서 그녀의 행실머리를 나열한다. 조금 유식하게 말하자면   :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을 때에는 메신저를 공격하라 _ 라는 고전적 정치 전술을 활용한 것이다. 즉, 때린 놈도 잘못이지만 맞은 년도 뭔가 맞을 짓을 했겠지 - 전술인 것이다.

읽다 보면 시인 이승철이 작성한 문장이라기보다는 가수 이승철이 작성한 문장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문장과 논리가 조악하다. 그래도 참고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 문장에서 유레카를 외쳤다. " 그녀는 실천문학사에서 < 돼지들에게 >란 시집을 펴낸 적이 있었다. 그 시집을 보면 시적 소재로 등장한 수많은 문화계, 문학계 인사들이 나온다. 시의 요점은 모두들 그녀에게 했다는 성적 추행의 이력이다. 어찌 보면 지독한 남성 혐오에 가까운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왜 그녀는 그 시집에 등장한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을 만들어야 했는가. 어찌 보면 난 그게 의문스러웠다. "

이 긴 문장은 술부이다. 그렇다면 주부는 ?  성처녀이다. 주부와 술부가 호응하니 메시지는 분명하게 읽힌다. 그러니까 성처녀 행세를 하는 최영미는 알고 보니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들이나 만들어내는 경험 많은 여자'라는 의미가 담긴 것처럼 읽힌다. 성범죄 사건에서 사건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게 덧씌우는 전형적인 공격과 유사하다. 비열하다, 졸라 !  이 논란의 핵심은 EN이지 최영미가 아니다. 이 논란에서 최영미라는 캐릭터는 별개의 문제이다. 핵심은 어르신의 성추행이니까. 끝으로 이승철 씨에게 한마디 : 이봐요, 명색이 시인인데 한글 맞춤법은 좀 지킵시다아.






에필로그



올해 새로 뽑힌 시인 협회 회장은 감태준이다. 그는 과거 성추문 논란으로 학교에서 해임된 전력이 있는 시인이다.








부 록






이승철 시인의 페이스북 글 전문


최영미 시인이 갑자기 떴다. 미투라고 했다. JTBC 손석희ㅡ최영미 인터뷰를 보면서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문단에 만연한 성추행이라니, 최영미는 참으로 도발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잣대로 마치 성처녀처럼 쏟아냈고, 천하의 손석희는 한국문단이 "아 이럴수가 있나" 하며, 통탄하고 있었다. 메이저 출판사와 무소불위의 평론가들의 묵계를 강조하면서 그녀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했다.

최영미의 그런 발언에 대해 절실성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내가 그녀의 가해자가 된듯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최영미 인터뷰는 한국문단이 마치 성추행집단으로 인식되도록 발언했기에 난 까무라치듯 불편했다. 왜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 지난번 호텔 집필실 사건이 터졌을 때 썩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그녀를 옹호했었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욕망에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하긴 그녀는 손석희와 인터뷰 때 추악한 문단을 떠난지 오래였다고 했다. 허나 그 오랜 기억이 문단의 현재적 풍토인양 뉴스화됐다.

내가 1993년에 김남주 시인을 상임이사로 모시고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할 때 황석영 선생 귀국 문제가 조직의 현안으로 대두된 적이 있었다. YS 정권 초창기였다. 그해 4월에 황석영 작가가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하여 안기부(국정원)에 체포되었기에 <국제 엠네스티> 등이 긴급행동요구를 발동해 황석영 석방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최영미 시인이 작가회의 사무실에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때마침 영국 엠네스티 본부에서 황석영 문제로 전화가 와서 (서)울대 출신인 그녀에게 바꿔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매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기에 난 그녀에게 작가회의 사무국 간사로 일할 수 있냐고 요청했고, 그녀가 흔쾌히 수락했기에 이후 한동안 사무실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최영미 시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시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어찌보면 창비와 언론이 만들어낸 <최영미 현상>이 불러온 결과였기에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즈음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었다. 1) 그녀의 시 구절 ㅡ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는 말만이 오랫동안 술좌석에 회자되었을 뿐, 그때 우리는 그녀가 야기한 환멸의 미학에 얼마나 통탄스러워했던가.

1994년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서울 마포 아현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 합평회>가 열렸다. 그날 창비에서 출간된 그녀의 첫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잔치는 끝났다"는 표현은 서정주 시의 표절이었다) 2)에 대해 수십명의 시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저자인 그녀는 물론 민영 시인 등 원로 문인들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몇몇 시인들이 그녀 시에 대해 사소한 비판을 했는데, 그때 그녀는 좌중이 놀랄 정도로 난리 부르스를 쳤다. 숫제 안하무인이었다고 할까. 그 싸가지없던 악다구니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합평회란 시의 문제점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이 오가는 게 상례건만 합리적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로 그녀는 피해의식으로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그무렵 그녀를 둘러싼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다. 그녀 시집에 등장한 첫남편(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에 근무했었다)에 대한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얘기를 들었다. 남녀간 사랑이란 순탄치 않게 파국을 맞으면 둘 사이의 과거는 시쓰는 시인에게 증오로 표출될 수도 있다. 철학자 니체가 루 살로메의 가혹한 채찍을 언급한 것처럼 최영미는 그 남자의 혁띠를 들먹거렸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파탄은 통상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만을 뇌리 깊숙이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즈음 그녀와 사귀고 있던 어느 소설가(유명 출판사 사장이었다)가 내게 무심결에 한 말을 듣고 난 깜짝 놀란 바 있었다. "야, 이승철 네가 최영미한테 무슨 잘못을 한 거야. 혹시 너, 달라고 추근거린 거 아니야. 최영미가 네 이야기가 나오면 그딴 인간과 왜 자주 만나냐고 난리치더라. 너와 다시는 만나지 말라는데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ㅡ 아, 잘못이라뇨? 형님! 내가 그 잘난 여자한테 무슨 잘못을ᆢ 다만 황석영 석방대책 건으로 사무국 간사로 선임했는데, 모 선배시인이 그 (미친) 여자를 왜 작가회의서 일하게 하냐고 해서, 할수없이 본의 아니게 한 달도 못되어, 그만두라고 한 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쨌든 내가 미안하다는 사과편지를 건네주었고, 그 후로 사적으로 만난 적 이 없는데, 이런 제기럴 영미ᆢ.

그 선배작가는 최 시인이 날 우습게 여기더라는 말을 이후로도 안주삼아 몇번이나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난 이런 씨부럴 하며 울화를 달래야 했다. 십여년 전인가? 그녀는 실천문학사에서 <돼지들에게>란 시집을 펴낸 적이 있었다. 그 시집을 보면 시적 소재로 등장한 수많은 문화계, 문학계 인사들이 나온다. 시의 요점은 모두들 그녀에게 했다는 성적 추행의 이력이다. 어찌보면 지독한 남성혐오에 가까운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왜 그녀는 그 시집에 등장한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을 만들어야 했는가. 어찌보면 난 그게 의문스러웠다.그 시집을 읽고 이걸 팩트로 믿어야 하나, 물론 시적 장치이지만, 여러 의구심이 들었다. 최영미 발언이 용기 있다고 한다. 어허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상징, 우리 En시인은 어찌할꼬나. 물론 En 시인의 기행에 대해서 숱한 얘기를 들은적 있지만 먼먼 소싯적 얘기를 현재 진행형하여 매도하는 건 조금 납득할 수 없다.남자의 성적 욕망이란게 얼마나 무서운가.그리고 그 욕망의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또 얼마나 지속적이고 치유 불가능한가.그걸 최영미 발언을 통해서 확인해본다.

1994년이던가? 소설가 이문열이 <시인>이란 소설로 En를 매도하다가 자신의 소설을 폐기처분한 바 있는데, 이제 최영미가 다시 등장했다.
난 미투가 두렵진 않다. 나도 한때는 여자사람을 좋아했는데 누가 나를 이십년, 삽십년 전 일로 미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옛날을 되돌아 본다. 타인의 불행이 더이상 나의 행복은 아니다.허나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                                              



1) " 최영미 시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시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어찌보면 창비와 언론이 만들어낸 <최영미 현상>이 불러온 결과였기에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즈음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었다. "


이 문장에서 최영미를 신경숙으로 바꾸면 오히려 더 선명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신경숙은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고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으며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녀는 자기 소설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어찌보면 창비와 언론이 만들어낸 < 신경숙 현상 > 이 불러온 결과였기에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었다 " 라고 분석한 대목은 어이가 없다. 이승철은 최영미의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가 이 땅의 민족 문학을 작살낼 만큼 파괴력이 높았다고 분석했는데(나는 그녀의 이 시집이 매우 후졌다고 평가하는 쪽이다만), 그것은 최영미 때문이 아니라 장정일, 하일지, 유하처럼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세 때문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명색인 문인인데 문단을 이해하는 이해력이 굉장히 둔한 편이다.



2) 이승철은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라는 제목이 서정주를 우라까이했다고 비판했는데, 아...... 진심으로 배꼽을 잡고 크게 웃었다. 잔치는 끝났다는 표현은 일상에서 관용구처럼 쓰이는 표현일 뿐이다. 서정주 이전에도 널리 쓰였던 표현이다. 서정주가 새롭게 직조한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표절 운운하는 것은 구차하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립간 2018-02-08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 제가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할 때, 상대로부터 반격의 의미로 자주 받는 질문이 ‘마립간의 경험을 일반화 할 수 있습니까?‘라는 것인데, 그 때, 곰곰발 님의 위 문장을 사용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8 11:11   좋아요 1 | URL
입도 뻥긋할 자격은 주어야지요.. ㅎㅎ

저는 정말 답답한 것이 막힌다 싶으면 무작정 그건 일반화의 오류예요.. 이런 말 하는 부류입니다.
정말 짜증남..니다..

마립간 2018-02-0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N 시인이 누구입니까? 인터넷에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한던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8 11:10   좋아요 0 | URL
고은입니다.. 유승민이 대놓고 교과서에서 빼자고 한 기사가 전송된 걸 보니 이젠 아예 이름 까고 말하는군요.

cyrus 2018-02-0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연말에 ‘고X’을 언급하는 기레기들이 없을 것 같군요. 그래도 한 번 기레기는 영원한 기레기라서 연말에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기레기가 있을 것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5   좋아요 0 | URL
아마, 이 기사를 황석영이 가장 좋아할 겁니다.
황석영이 은근 고은을 싫어했거든요... 솔직히 고은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때 큰 측면이 있기에
황석영이 열받아서 이명박 정권에 붙었다는 소리도 있었죠. 항간에는..

잠자냥 2018-02-0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람 페이스북 가보니 소속이 ‘한국문학평화포럼‘이라고 나오던데 거기 바로 옆에 명예회장 ‘고은‘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참나.... 가지가지합니다. 말도 안되는 문장과 논리로 홍위병 노릇이나 하고 있고 정말 부끄럽지도 않은가 봅니다.

좀전에 어떤 기사 보니 고은이 마스크에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쓰고 수원 자택에서 바깥 동정 살피는 모습이 포착되었더군요. 그토록 구질구질할 수가.....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3   좋아요 1 | URL
저도 그 페이스북 찾아서 봤습니다. 프필에 고은이란 글자가 박혀 있더라고요.. 아하, 했습니다..

저도 그 기사 사진 봤는데.... ㅎㅎㅎㅎ 아이고야. 이거 한국 문학의 위대한 거성이던 분이 어느새 경찰 포토 라인 앞에 설 떄 입는 패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셔서 놀랐습니다. 아니, 떳떳하시다면 왜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그러죠 이해 불가입니다..

수다맨 2018-02-0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최영미의 성추행 경험과 폭로‘와 ‘최영미의 평소 성격(타인에 대한 뒷담화? 자기 작품에 대한 타인의 합리적인 비판 거부?)과 협애한 문학성‘은 당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얘기이지요.
전자가 A(성추행 경험과 폭로)이고 후자가 B(최 시인의 성격과 문학성)라면, B라는 원인 때문에 오늘날 A라는 사건이 발생해서 전체가 매도 당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그릇된 것이라고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1   좋아요 0 | URL
이런 것을 두고 전문용어로 물타기라고 하는 겁니다..

samadhi(眞我) 2018-02-09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토할 것 같아요. 조금만 지나면 곧 이불킥하게 될 글을 이렇게 대놓고 쓰는지. 근데 글을 보니 이불킥 따위 할 사람도 아닌 듯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12 10:2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조금 쫄았을 듯합니다... 억지 논리를 펼치다 보니 논리가 억지일 수밖에요..
 

 



 



EN의 연애담


 


 

                                                                                                    어느 날, 릴케는 두이노 성 주변을 산책하다가 환청을 듣는다. "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 이 환청에 영감을 받은 젊은 시인은 10편으로 구성된 << 두이노의 비가 >> 를 완성한다.

2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인데 이 시를 완성하는데 걸린 세월이 10년이었다.  37세 때 쓰기 시작한 " 비가 1 " 은 47세 때 " 비가 10 " 으로 끝났다. 이 장고의 세월 동안 시인은 얼마나 많은 퇴고에, 퇴고에,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을까. 말머리를 오랜 장고 끝에 완성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 두이노의 비가 >> 로 시작한 이유는 최영미 시인이 < 괴물 > 1) 이라는 풍자시에서 언급한 시인 EN과 비교 평가하기 위해서다. 이 시를 읽고 나서도 EN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시집 100권을 낼 정도의 역량을 가진 시인'이 누가 있을까.

아니, 전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살아생전에 시집 백 권을 출간하며 이 시대의 어른으로 숭앙 받는 시인은 그가 전무후무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그가 낸 책은 시집 외 잡다한 목록까지 포함하면 150권이 넘는다.  물론 다작을 한 작가라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조르주 심농은 400편의 추리소설을 내놓았고,  스티븐 킹은 500편의 작품을 내놓았다(무엇보다도 스티븐 킹이 놀라운 점은  원고지 분량만 놓고 보자면 원고지로 쌓아올린 종이 바벨탑에 도전할 작가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EN의 다작이 문제인 이유는 시라는 장르가 속필이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데 있다.

EN의 시는 깊이도 없고 넓이도 없고 높이도 없다. 시가 반드시 " 묵은지 " 일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 겉절이 " 를 내놓고는 슬로푸드'라고 자랑하는 것은 면이 서지 않는 짓이 아닐까 ? EN의 시가 詩답지 않아서 시답지 않은 시시한 시'인데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발표할 계절이 오면 기자들이 그가 사는 수원 집 앞에서 배수진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내 정치에 능한 그와 그의 이너서클이 만들어낸 아우라가 아니었을까 ? 신경숙 신화가 문단 내 사내 정치가 만들어낸 허수이듯이 EN 신화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 사내 정치 > 이중적이며 중첩적 의미로 사용했는데 사내는 사내(男兒)이면서 사내(社內)이다. 

신경숙이 사내 정치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철저하게 명예 남성 역할을 자행하며 남성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                                    

 

1) 괴물, 최영미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 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 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벨상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ㅡ최영미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amadhi(眞我) 2018-02-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한창 난리가 났던 박진성 시인은 저도 뭣 모르고 막 욕했는데 무고한 것으로 드러났지요.
은태할배는 범신할배는 으~웩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4:24   좋아요 0 | URL
몸사릴 할베들 많죠. 방석집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ㅎㅎ

samadhi(眞我) 2018-02-09 13:39   좋아요 0 | URL
참 은태 할배는 고은 시인 본명인 거 아시죠? 고은태.

수다맨 2018-02-07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굉장히 화가 났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최영미 시인이 (이런 폭로시를 쓴 의지와 열정은 지극히 존중할 만하지만) 아주 예전부터 소영웅주의와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죠. 저는 예전부터 소외와 오해만 받는 용감한 (그래서 아주아주 불쌍하기 그지없는) 나 VS 악랄하고 몰가치하고 파렴치한 전체 집단의 구도를 그의 시에서 여러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최영미의 작품 세계는 80년대 참여문학의 나이브한 연장이자, 공지영의 시인 버전 같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저는 최영미 시인의 이번 폭로와 고발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이에 연루된 해당인은 그만한 책임과 대가를 당연히 짊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나는 문단의 왕따‘이다, ‘나는 죽은 목숨이다‘라는 식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약간은 오버이자 난센스 같다는 인상도 듭니다. 저는 만일 최영미의 시 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가부장적이고 여혐적인 문단 체제‘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시작 역량이 (그녀가 진단한 것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데서도 찾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시인이 이러한 것들(체제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자신의 문학적 공력)을 모두 돌아볼 줄 아는 균형적인 안목도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EN 시인을 문학적으로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인격적으로 싫어할 이유까지 생겼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15:56   좋아요 1 | URL
제가 두 곳에 같은 글을 올리는데 네이버에 단 저의 댓글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영미의 미투를 지지하지만, 솔까말 최영미는 시를 못 쓰는 시인이다. 그것도 사실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전 남성 권력의 폭압과 함께 그녀 스스로의 시인으로서의
역량 미달도 지금의 쇠락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8-02-07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7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  :



 

 

 

 

 


 

이재용을 향한 편애와 편견



 


                                                                                                         책은 사서 읽지만, 읽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은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자주 들춰 보는 책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대부분은 필요에 의한 발췌독이다(니체 전집, 프로이트 전집, 아케이드 프로젝트, 사랑의 단상, 두이노의 비가 따위).

 

가성비와 효용성만 놓고 보자면  :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읽지 않을 책은 사는 것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이 합리적 소비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읽지 않은 책은 책장에서 비울 생각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  그 자리를 각종 사전과 도감으로 채우고 싶다. 도감 중에서도 가장 가지고 싶은 도감은 보리 출판사에서 기획한 <<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도감 >> 시리즈'다. 도감은 세부 목록(동물보감, 식물보감, 동물흔적보감, 양서파충류도감, 갯벌도감, 민물고기도감, 나비도감, 나무도감, 곤충도감, 풀도감, 새도감, 버섯도감, 바닷물고기도감)을 설정한 후 

그림이나 사진을 모아서 실물 대신 보면서 읽을 수 있도록 엮은 책'인데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가 가미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무엇보다도 도감은 사진보다는 그림(세밀화)으로 구성된 책이 월등히 훌륭하다. 사진이 실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초정밀 광학적 세계의 끝판왕이기는 하나 독자가 그림을 이해하는 가독성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 손으로 그려진 세밀화는 사진보다 가독성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동식물 도감은 세밀화로 구성된 책으로 읽어야 한다. 그 차이는 분명하다. 사진은 광학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이고 그림은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이다.

그러니까 세밀화는 독자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인간이 한 편의 그림 같은 사람(혹은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진을 찍을 때, 클로즈업과 부분 초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진 렌즈에 의해 포착된 상은 편견이 배제된 상이다. 반면에 사진 렌즈가 아닌 사람의 홍채에 의해서 재현된 상은 편견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사람은 전체를 본다기보다는 관심이 가는 영역을 중심으로 이미지 전체를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항상 색안경을 쓰고 사물과 현상을 들여다보는 종이다. < 편견 > 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인 셈이다.

하여,   나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편애(편견)라고 생각한다.  편애하는 사람에게도 품격은 있따. " 편애 " 가 강자에게만 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에게만 쏠리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俗이고 후자는 聖이다. 예수는 후자에 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자에 대한 편애와 강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수가 안철수처럼 극중주의와 화신 백화점이었다면, 나는 그에게 침을 뱉고 따귀를 때렸을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대부분 편견과 편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엄청난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재판은 판사의 그릇된 편견과 편애 때문이 아니라 거악에 대한 " 편견 없음 " 과 정의에 대한 " 편애 없음 " 이 낳은 결과이다.

어렵게 말했으나 저잣거리 입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 저 판사 새끼, 시발 진짜 좆같은 새끼네 ! "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2-06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0:20   좋아요 2 | URL
퇴임 후 법무팀에서 모셔가겠죠. 연봉 20억 때려서 5년 근무하는 방식이겠죠. 그러면 100억.. 합법적 뇌물이잖아요. 법무팀에서ㅓ 하는 일은 없을 테고... 뭐, 판사 입장에서는 욕 졸라 한번 처먹고 퇴임 후 목돈 마련해서 자식새끼 좋은 데 유학 보내자.. 이런 마인드이겠죠. 삼성 불매 운동해야 합니다..

마립간 2018-02-06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로운 사람은 대부분 편견과 편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이 문장을 보니, ≪도덕경≫의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문구가 떠오릅니다. 자연의 정의와 사람의 정의가 다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1:25   좋아요 0 | URL
흠... 마립간 님 한자 해석 좀 -_- ;

마립간 2018-02-06 12:08   좋아요 1 | URL
^^, 곰곰발 님의 글을, 제 독후감에 인용하였습니다.

앞부분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 천지,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즉 편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도덕경≫의 의견입니다.

cyrus 2018-02-06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판사 이름이 정형식. 예전에 삼성 라이온스에서 뛴 정형식이라는 타자가 있었죠. 타격 센스가 박해민 급이었어요. 그런데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서 임의 탈퇴 처리되었죠. 다행히 정형식이 나간 이후로 박해민이 등장할 수 있어요. 아무튼 정형식이라는 이름,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6 11:41   좋아요 1 | URL
저 인간은 성을 바꿔야 합니다. 정씨가 아니라 화씨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희대의 변명일 겁니다.

수다맨 2018-02-06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고종석 작가가 우스갯소리로 이 나라에서 이명박근혜가 왕(또는 상왕)이라면 이건희/재용은 황제라고 한 적이 있었지요. 어제 재판 결과가 고종석의 말에 정확히 들어맞았던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09:51   좋아요 0 | URL
삼성이 황제라는 사실을 고종석이 아니어도 다 아는 사실이죠. 법위의 존재예요. 박근혜도 깜빵 가는 세상에 이제는 이재용은 안 가는 세상이 되었군요.

기억못함 2018-02-0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자는 자연의 섭리를 편애했어요.
천지불인은요. 큰것을 위하지 않아요.
그래서 작은 것들이 큰 놈에게 강제당하지 않게 되어요.
그러면 천지불인이 작은 놈을 위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작은 놈이란 거는 천지불인과는 상관없는거여요.
걍 천지불인은 큰 것을 위하지 않는다는 놈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요.
이러는 것이 천지간이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얘기하는 거라고 봐요.
그래서 위하지 않음을 위한다고 하는 건데요.
이걸 아무거나 다 에브리띵 다 위하지 않는 거라고 퉁치는 얘기로 읽으면 노자를 한참 잘 못 읽는거라고 봐요.
여기 곰곰발님 말씀처럼 사람은 편애 편견덩어리여요.
무엇을 위하여야만 사는 놈이라는 거죠.
그런데 위하면 작은 놈도 그게 큰 놈이 금새 되어버려요.
그래서 위하지 않음은 큰놈이 생기지 않게 해요.
그래서 작은 놈을 위하게 된다는 식으로 넘어가면 안되구요
위하지 않음을 위한다는 말은 오직 큰 놈을 잡기 위해 있는 말입니다요.
위하지 않음을 위하는 편견 편애는 그것이 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큰 놈이 절대 안되요.
다른 위함은 모두 큰 놈이 되요.
오직 위하지 않음을 위하는 편애 편견만이 큰 놈을 만들지 않아요.
그게 노자의 천지불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믿을 수 있씁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8-02-07 09:50   좋아요 0 | URL
허어. 그렇군요. 노자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노자의 천지불인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겠군요. 혹시 추천해주시고 싶은 책이 있으신지요.
읽고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억못함 2018-02-07 10:0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도덕경 해설서 독해서 추천드릴만한게 없습니다.
곰곰발님이 독자적으로 해석해보시는 건 어떤가요?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개정판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 수오서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義 와   利 를   혼 동 할   때  :

 

 

 






혜민과 홍준표 



                                                                                                        머리가 똑똑해 옳은 소리 하면서 비판을 자주하는 사람보다 가슴이 따뜻해 무언가를 나누어주려고 궁리하는 사람, 친구의 허물도 품어줄 줄 아는 사람, 타인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되세요 ㅡ 혜민이 그의 위대한 명저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에서 쓴 문장이다.

짝 ! 짝 ! 짝 !  나는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브라보, 아따. 씨부랄. 와우~  혜민, 가는 길에 똥 밟고 뒤로 자빠지시라.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문학적 수사도 없이, 본질을 꿰뚫는 통찰도 없이, 끓어오르는 열정도 신념도 없는 글을 좋아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비판하는 유형인 " 머리가 똑똑해 옳은 소리나 하면서 비판을 자주 하는 사람 " 이라는 문장에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난 인물은 놀랍게도 부처였다. 부처야말로 머리가 똑똑한 인물이어서 옳은 소리를 자주 하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며 利보다는 理에 밝은 성인이 아니었던가.

죽비 소리가 상징하듯이 불교적 언어는 치유와 위로의 언어보다는 정곡을 찌르거나 폐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언어에 가깝다(기독교 서사가 정서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다면 불교 서사는 냉혹할 정도로 논리에 호소한다).  위 문장은 대중 불교가 속세의 사리에 밝으면 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혜민은 < 머리가 똑똑해 옳은 소리나 하면서 비판을 자주하는 사람(의 말,태도,자세) > 을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취하는데, 그는 그것을 義로 보지 않고 利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다. 옳지 않은 소리를 하면서 비판을 자주하는 것은 利에 해당되지만 옳은 소리로 비판을 하는 것은 義에 가깝다.

그는 理와 利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 논어 >> 에서 " 군자는 義에 깨닫고, 소인은 利에 깨닫는다 " 고 지적했다. 혜민은 의를 이로 인식했으니..... 그는 소인이 분명하다. 이런 사람이 큰스님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혜민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구구절절 깨닫게 되는 것은 " 전지적 작가 시점 " 이다. 그는 항상 통달한 마음과 꿰뚫고 주시하는 마음으로 중생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그는 마치 청기백기 오락기 나레이터 같다. 그는 중생인 우리에게 명령한다. 청기 내려 백기 올려 아니아니 청기 내리지 말고 백기 올렸다가 내렸다가 다시 올리지는 말고 내려 차렷 열중 쉬엇 어섯 !

내가 아는 부처는 정서에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치에 호소하는 성인이다. 이치란 논리적 세계의 한 축이다. 그렇기에 나는 논리보다는 정서에 호소하는 혜민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 머리가 똑똑해 옳은 소리나 하면서 비판만 자주하는 사람의 말 " 을 저잣거리 입말로 쉽게 말하자면 " 배부른 소리 " 이거나 " 싸가지 없게 말하기 " 이다. 그러니까 허어, 맞는 소리이기는 한데 세상 물정 모르고 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가 젊은이를 위로할 때마다 논란이 발생하는 것은 늙은 욕망으로 젊은이의 요구를 해석하거나 훈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늙고 낡은 욕망으로 젊은 니즈를 충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 언론사에서 빅데이터를 분석한 기사를 작성했다. 홍준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특정 인물의 글에 " 좋아요 " 를 누른 데이터 목록을 확인하니 혜민이 상위권에 링크가 걸렸다는 기사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서 홍준표 지지자들은 혜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그들은 머리가 똑똑해 옳은 소리나 하면서 비판을 일삼는 사람들의 말을 배부른 소리로 취급하거나 맞는 말이긴 한데 싸가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이니 말이다. 후속 보도 부탁한다. 혜민과 홍준표의 차 간담회, 멋진 기획 아닌가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윗듀 2018-01-30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웃고갑니다 ㅋㅋ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01-31 10:27   좋아요 0 | URL
별 셋 하나... 윤동주의 패경옥 생각이 나네요.. ㅎㅎ

가넷 2018-01-2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있다보면 수행자가 맞나 싶더군요. 얼마전에 냉부에도 나오던데 도대체 뭐지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1-31 10:27   좋아요 0 | URL
수행자라기보다는 약 파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님이 왜 냉부에 나오죠 ? 이상한 사람입니다..

라로 2018-01-31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가? 처음엔 좋아서 카스 팔로 했는데 자꾸 읽다보니 짜증이 나더군요. ㅎㅎㅎㅎ 그래서 삭제했어요~~~~예전에. ㅎ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8-01-31 10:28   좋아요 0 | URL
쉽게 질리는 친절이라고나 할까요.. 마음에도 없는 위로와 친절은 처음에는 듣기 좋지만 이게 자주 듣게 되면 짜증나기 마련입니다.. 전형적인 인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러 나  누 가  '알고'  있 었 다 는  게  왜  중 요 했 을 까 ? 

 



            

                                      달걀은 幻이다1)



 



달걀이 손가락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나 ?
없소 !  하지만 기분은 좋소. 이게 내 본래의 모습이오(但我覺得痛快 這個才是我自己).  안 다쳐야 했겠지만, 검(劍)이 옛날처럼 빠르지 못했소. 옛날에 검이 빨랐던 것은 옳다고 믿고 했기 때문이오. 대가를 바란 적이 없었소. 난 평생 안 변할 줄 알았는데……


〈동사서독〉(왕자웨이, 1994)




                                                                                      << 아비정전, 1991 >> 을 40번 넘게 보았다. 만우절이 되면 변두리 극장 어디선가 왕자웨이 영화제가 상영되고 있었고 << 아비정전 >> 은 단골 상영작이었다. 길거리 극장이 아니더라도 이날이 되면 티븨 변두리 채널 어디선가 아비정전은 상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상영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왕자웨이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왕자웨이 영화 중 최걸 : 최고 걸작)은 << 화양연화, 2000 >> 이다.  완벽한 영화이다.  한뼘의 간격이 주는 미학을 이토록 집요하게 다룬 영화가 있었던가. 하지만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다,  최걸 영화를 선정하는 것과 최애 영화를 선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니까.   내가 " 최애 " 하는 왕자웨이 영화는 << 동사서독,1994 >> 이다. 그렇다면 왕자웨이 영화 중 실패한 영화는 무엇일까 ?   그것 또한 << 동사서독 >> 이다.  서사의 불균질성, 점프 컷의 지랄같은 오용, 필터의 남용, 통일성의 결여, 기타 등등......

하지만 이 얼룩들, 이 오류들, 이 헛점투성이로 오염된 << 동사서독 >> 은 오히려 영화의 주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유물론자이다. 그렇기에 유심론자와 대립하게 된다.  유심론자(관념론자)는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아니요, 그대의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유물론자는 그대의 마음은 움직이는 깃발이요, 바람이라고 말한다. 이 차이에 대해 나는 대립하지만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사소한 문제여서 우리는 서로 다른 오솔길을 걷고 있는 산책자일뿐이다. 하지만 나를 " 빡 " 치게 만드는 것은 혜민 같은 사이비 유심론자'이다. 삼라만상, 모든 번뇌가 다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허허허허허허허허 _ 라고 산신령 놀음을 할 때마다 엿죽방망이로 빰따구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혜민의 유심론은 독일 관념론(유심론)에 대한 모독이며 쌍팔년도 흥남부두 격정 신파의 신흥 종교 사업 버전에 불과하다.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중 하나가 마음일 수는 있으나 전부일 수는 없듯이)팔 할이 마음이 아니라 구조'이다.영화 << 동사서독 >> 에서 홍칠공은 유물론자 캐릭터'다. 그는 물질을 사람의 마음 표현으로 이해한다. 다음은 네이버 영화에 소개된 줄거리다.



① 장국영(구양봉) : 백타산의 원주민인 구양봉(장국영 분)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이 그를 키웠다. 구양봉의 꿈은 유명한 검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술 연마를 위해 고향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장만옥 분)과 고향에 남을 것인가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 대신 무사로서의 길을 택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형과 결혼한다. 10년 후, 냉소적이고 돈만 알게 된 구양봉은 사막으로 가서 그곳에 여관을 개업한다.


② 양가휘(황약사) : 구양봉은 황약사(양가휘 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사랑에 관한 슬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도화림을 떠나게 된다. 매년 복사꽃이 피는 시절이면 구양봉에게 찾아와 같이 술을 마시고는 백타산으로 구양봉이 사랑했던 여인을 방문하러 떠난다. 10살난 아들을 가진 그녀는 아직도 구양봉을 사랑하고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일 전 황약사는 고소성 밖에서 자칭 모룡연(임청하 분)이라는 남자와 친구가 된다. 그의 여동생과 결혼할 것을 언약한다. 그녀와 만날 약속을 했지만 황은 떠나가 버린다. 모룡연은 황약사가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하며 구양봉을 찾아와 동생을 대신해 복수를 하고 싶다며 황약사를 죽여달라고 한다. 그가 떠난 뒤 그의 여동생인 모룡연이 나타나 그녀의 오빠를 죽여주면 오빠가 제시한 돈의 2배를 주겠다고 한다. 구양봉은 모룡연이 여동생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지만 대화를 지속하는 동안 모룡연과 모룡언이 내면에 두개의 인격체를 지닌 동일인임을 확인하게 된다.


 장학우(홍칠공) : 어떤 젊은 처녀(양채니 분)가 구양봉을 찾아와 그의 동생의 복수를 간청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것은 달걀 한 바구니와 당나귀 한 마리뿐이었다. 구양봉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만 그녀는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한다.   가진 것 없는 검객 홍찰(장학우 분)은 구양봉의 눈에 띄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이제는 유능한 청부 검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구양봉의 뜻을 어기고 돈도 없는 어린 소녀의 복수를 대신해준다. 그가 받은 대가는 오직 달걀 한 개뿐이었다. 마적단과의 싸움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은 그는 그를 찾아온 아내와 함께 떠난다.



양조위(맹무살수) : 도화림에서 온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영락한 검객(맹무살수, 양조위)이 어느 날 구양봉을 찾아와 살인청부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그는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복사꽃이 피는 것을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돈이 필요했다. 그는 아내(유가령 분)가 절친한 친구와 부정을 저지르자 집을 떠나는데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황약사였다. 이렇게 가슴에 나름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세월은 흘러가고 마침내 구양봉은 형수(옛 애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여관에 불을 지르고 떠나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눈에 보이는 현상(現像) 으로 드러내는 것은 물성(物性)이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잔을 건네는 것, 그러니까 목이 마른 사람이 받은 잔(盞)은 물을 건네준 사람의 마음이다. 선의가 물잔이라는 물성으로 교환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물성을 띤 현상으로 나타난다. 주고받는 것이 인지상정이어서 인간 관계란 결국 물성을 띤 물적 관계의 교환인 셈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장학우(홍칠)가 자기 손가락 한 개를 기꺼이 양채니의 달걀 한 개와 교환한 심리 기제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잘린 손가락과 달걀 한 개)은 타자와 타자에 대한 서로의 선의가 물성을 띤 물질성으로 변한 상태인 것2)이다.


반면에 홍칠공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심론자들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마음으로 얽혀 있으며 정념의 교환, 혹은 마음 교환의 실패로 맺어진 관계들이고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장국영(구양봉)을 사랑한 장만옥(자애인)과 그녀를 사랑한 양조휘(황약사)가 나누는 대사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 날 사랑한다는 말을 안 했어요(자애인)

-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도 있소(황약사)

- 난 그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는 말해주지 않았아요(자애인)


철학자 김영민은 << 집중과 영혼 >> 에서 이 에피소드를 거론하며 " 그러나 누가 '알고' 있었다는 게 왜 중요했을까 ? " 라고 묻는다. 중요하다, 중요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그들은 마음을 물성을 띤 물질성의 교환 형태로 뜻을 전하는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원시적인 정념의 교환 형태로서만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정인들이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없으니 메신져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음과 마음의 교환 거래로 맺어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황약사는, 구양봉은, 맹무살수, 자애인은 마음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유심론자들이다.


달걀은 환(幻 : 헛보이다, 미혹하다, 변(화)하다, 바뀌다)이다. 선의를 드러내기 위한 성의는 중요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성의 표시의 가치가 아니라 선의의 가치'다. 홍칠은 기꺼기 그 작은 선의를 받아들인 사람이다.



                                

 

1)      집중과 영혼, 32 달걀은 환이다

2)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최민식은 군만두를 통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이우진)의 마음을 읽는다  군만두는 이우진(유지태)의 악의를 띤 마음으로 물성으로 환幻 한 것이다  김영민 스타일로 표현하자면 " 군만두는 幻이다 " 군만두는 메신저의 메시지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맥(漂麥) 2018-01-19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양연화와 동사서독은 여러번 봤습니다. 화양연화는 화양연화대로(이 영화 보고나서 앙코르왓으로 날라갔다 왔습니다), 동사서독은 또 그 자체로 느낌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선가 또 방영한다면 아마도 또 보고 있을 그런 영화입니다. 저에겐...^^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9 15:27   좋아요 1 | URL
후후....

저에게 아비정전은 가장 많이 본 영화이고
저에게 화양연화는 가장 좋은 영화이고
저에게 동사서독은 가장 애정하는 영화입니다..ㅎㅎ


저도 아마 어디선가 방영하면 채널 돌리지 않고 볼 영화들입니다..

2018-01-21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1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