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 외딴 방 >> 에서 보여지는 퇴행적 역사 인식과 오류





​눈을 감으세요 / 모두 눈을 감으세요


ㅡ 징병검사장에서, 윤희상




                                                                                                                                          지니아 울프는 << 자기만의 방 >> 에서 여성 예술가는 독립적 공간을 위한 < 자기만의 방 > 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 500파운드의 돈 > 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 남성 " 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장소로 " 자기만의 방 " 을 선정한 셈이다. < 방 > 이 버지니아 울프를 대표하는 장소성'이라면 < 부엌 > 은 신경숙 문학을 대표하는 장소성'이다. 하지만 신경숙이 집착하는 부엌이라는 장소성은 버지니아 울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만의 방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잰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신경숙의 부엌은 남성들과 결탁하여 스스로 그 욕망에 부역하고자 하는 장소로 퇴행한다.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은 남성(욕망)을 위해 바치는 보시이다.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 외딴방 >> 에서 1인칭 여성 화자인 < 나 > 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이라 믿는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신경숙은 < 나 > 를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를 다니며 집에 와서는 오빠의 저녁밥을 책임지는 부엌데기'로 취급한다. 내가 이 소설이 굉장히 악질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과 구로공단에 위치한 동남전기주식회사의 열악한 노동 현장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정조준한 소설이면서도 애써 탈정치적 노스텔지어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 나 > 가 노조를 배신하면서 말했던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은 소모전이었던 것이다 " , 외딴방 )는 변명은 7,80년대 노동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신경숙의 퇴행적 사회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신경숙이 보기에 7,80년대 노동 운동은 쓸모 없는 소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는 줄기차게 주인공 < 나 > 의 입을 빌려서 노동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이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강경 자본가 우파의 " 정치색 " 을 띤다는 점에서 < 나 > 가 강박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고백하는 언술은 이율 배반에 해당된다.

노동 운동을 단순하게 해도 해도 안 되는 무용한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본가가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언술이라는 점에서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 나는 < 외피는 구로공단 여공 작업복을 둘렀지만 내피는 자본가 / 기득권 / 수구 보수의 남성 실크 넥타이를 맸다는 점에서 속내를 숨긴 캐릭터 > 로 읽힌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가면극인가. 그리고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학살자(대통령)의 얼굴보다 싫은 것이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가난1)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화자의 논리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지지하기 위해 내세웠던 태극기 집회 무리의 산업화 논리와 다를 것 하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탈정치적 존재라고 강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 나 > 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장을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이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조선일보가 남진우를 앞세워서 조선일보 지면에서 대대적인 작품 홍보에 열을 올렸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문학동네가 조선일보의 비호 아래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문학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한국 문학사에서 1970-80년대 문학을 정치색에 함몰된 저질 프로파간다 문학으로 평가절하하면서 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하여 탈정치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신경숙 작가이고 신경숙 문학의 최고봉이 << 외딴 방 >> 이다. 이 소설 또한 1970-80년대 노동 운동을 평가절하하면서 탈정치화를 선언한 구로공단 여공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문학동네와 신경숙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정치적이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하자면 인간을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탈정치화를 선언한 신경숙 소설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한 문학동네 또한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이익집단이다. 비극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신경숙은 외부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눈을 감고 내면의 이야기를 하자고 속삭인다. 눈을 감으세요. 모두 눈을 감으세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두 눈 부릅뜨고 외부를 바라보아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목이 잘리는 노동자가 있고 지금도 철탑 위에서 408일 동안 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은 쓸모 없는 소모가 아니라  숭고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한때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었다. 신경숙 문학에 침을 뱉는다.



 

 

 

                                    


 

1)

, 오빠. 나는 그런 것들보다 그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서나 자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그때 왜 그렇게 추웠는지 말야. 오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전두환)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그냥 좋았어.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 대체 그 꿈은 어디에서 흘러온 것일까. 나는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는 거 아니야?


-​신경숙, 외딴방』,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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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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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 다 리    짝 짝 꿍   :




 



저녁(밥)이 있는 풍경




 


                                                                                                                                                                                                           우리 집 곁방에 세 든 총각 아저씨는 젊은 문학도'였다. 우편함에는 정기적으로 그에게 발송되는 우편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발신처'가 한국문인협회였고 다른 하나는 명문대 동문 회보'였다.

그 우편물로 미루어 볼 때    :    나는 그가 등단은 했으나 책은 아직 출판하지 못한 미생의 작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했지만,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명문대 출신으로 알랑 드롱 뺨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알랑들롱을 알랑가몰랑, 됐고 ! ).  그래서 어머니는 곁방 총각에게 항상 넉넉한 음식을 제공했다.  나는 문단의 최신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음식을 싸 들고 곁방 문을 자주 두드렸고 그는 답례로 언제든지 와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빌려 가라고 권했다.  먹거리와 책거리를 교환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 문학의 최신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집 곁방에 세 든 알랑 드롱은 장정일, 공지영, 신경숙이 문단의 스타로 우뚝 발기하기 전부터 그네 - 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장정일의 청년작과 공지영의 처녀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알랑 드롱 덕분이었다. 신경숙의 << 풍금이 있던 자리 >> 가 수록된 단편 소설집도 알랑 드롱이 추천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내 첫경험은 " 쇼크 " 였다. 그동안 실천 문학이니 참여 문학이니 하며 딱딱한 문장과 서사만 읽다가 ASMR 에 가까운 작게 소곤거리는 예쁜 문장을 접하다 보니 귀르가즘이라는 신천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소녀 감성 충만한 할리퀸의 문학 버전 ?!  하지만 그것은 < 새것 > 이 주는 잠시 즐거운 아우라'였을 뿐  문학적 완성도'에서 오는 웅숭깊은 즐거움은 아니었다.

신경숙의 " 뽀록 " 은 오래가지 못했다.  쉼표( , ) 와 말줄임표 ( ...... ) 를 남발하는 문장을 보면서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신경숙 특유의 < 스타일 > 로 발전하지 못하고 < 웅엥웅 > 으로 몰락한 느낌을 받았다.  음향과 녹음 상태가 형편없어서 자막 없이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80년대 싸구려 국내 방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  웅 ~~~~~ 엥 ~~~~~~~~~~  웅 ~~~~~~~~~~~~~~    신경숙 소설에서 여성이 스스로 말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기저(基底)는  남성 억압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 체제에 쥐새끼처럼 순응한 결과처럼 보여서 신경숙이 창조하시었던 보수적이며 수동적인 여성-들에게 삭힌 홍어로 그네 목구멍을 뻥 뚫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소리 질러 , 시바.

예를 들면 소설 << 외딴 방 >> 에는 전경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친오빠가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1인칭 화자인 < 나 > 는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라고 혼자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조선시대 여인네 같은 말투에 크게 당황했다.  국가 폭력 앞에서 갑자기 앞치마 두른 새색시가 되어 뜬금없이 밥 타령을 말하니 어리둥절했다. 그대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의 저녁상을 차리는 것도 모자라 그 행위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 이 소설은 매우 퇴행적인데 민중을 배부르게 먹여만 준다면 독재 따위는 눈 감아 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 오빠. 나는 그런 것들보다 그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서나 자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그때 왜 그렇게 추웠는지 말야. 오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전두환)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그냥 좋았어.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 대체 그 꿈은 어디에서 흘러온 것일까. 나는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는 거 아니야?


-​신경숙, 외딴방』, 245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국가 독재와 국가 폭력에 대한 증오보다 "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놓은 무우를 꽝꽝 얼어버려자기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ㅡ " 과 "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 ㅡ " 는 것이 더 싫다고 고백하는 이 철딱서니 없는 < 퇴행적 고백 > 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왜 < 포스트모던 > 하다고 평가했던 것일까 ?  퇴행적 증후와 포스트모던은 정반대의 애티튜드가 아닐까 ?  이 탈정치적 선언 고백은 신경숙 문학의 핵심이다. " 정치의 백치(성) " 야말로 신경숙 문학의 정체성이다. 그녀는 80년대 구로공단 노동 현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변화보다는 불변(체제 유지)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아침밥을 차려주는 아내를 현모양처의 제 1 덕목으로 여기는 한국 문단의 어르신들에게 주인공 < 나 > 는 완벽하며 아련하고 가녀린 여성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소망했다면 신경숙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기만의 부엌에 집착한다. 신경숙은 이 소설에서 맛있는 저녁, 꽝꽝 얼어버린 무우, 수돗가 따위의 문장을 통해서 주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쾌적한 장소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 키친아트(부엌소설) 문학 " 이라 부를 만하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소설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말줄임표(......)나 말없음표(ㅡㅡㅡㅡ)에 대해 " 고백적 진술 자체가 매우 힘든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효과적 서술 방식 " 이라며 호, 호호호호들갑을 떨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 완성할 만한 필력이 모자라서 말줄임표와 말없음표로 문장을 매조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량이 부족하다면 불철주야 < 글 짓기 > 에 문장 연습에 정진하여 실력을 키우기에도 시간이 모자를 판인데 사랑하는 < 밥 짓기 > 로 작가 인생을 낭비하게 되었으니 신경숙 표절 사태는 예측 가능한 참사'가 아닐 수 있다 말 할 수 있는 이 뉘 있으리오 ?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다 신경숙 잘못일까 ?  90년대 평론은 문단과 출판이 유착된 시기로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는 주례사 비평(정실 비평)이 책을 파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평론가들이 쥐새끼처럼 알아차리게 된 시기였다. 이때부터 책 뒷부분을 장악한 것은 평론가가 영혼을 팔아 쓴 작품 해설이었다. 읽다 보면 장광설이 하늘을 찔러 이 논조대로라면 한국 문학은 노벨문학상 1000개 정도는 수상했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좋은 사례가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 동정 없는 세상 >> 에 대한 평론가들의 매문이다. 이토록 형편없는 소설에 대해 " 탈근대적 성장소설 " 이라고 하거나 " 신인답지 않은 작가의 탄생 " 이라고 설레발을 치니 그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닥치고 빨아주다 보면 발생하게 되는 참사'다. 화장실 벽 낙서'에나 볼 수 있는 < 졸라 하고 싶어서 불알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3 남학생 이야기 > 를 두고 탈근대적 ?! 차라리 " 남근대적 성장소설 " 이라고 하거나 " 신인답지 않는 작가 " 가 아니라 신인답지 않은 짜가  " 라고 해라.  응응 한번 했더니 어른이 됐다 ?!  그렇다면 응응 천 번을 한 나는 세계 인류 3대 성인 중 한 명이더냐 ?  성경험과 성장통'을 하나로 엮어서 퉁치는 클리쉐는 이제 지겹다.

섹스는 당신을 어른으로 만들지도 않고 성숙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이런 식의 오럴섹스에 가까운 주례사 비평과 신경숙 문학의 대중성이 맞물리면서 신경숙 문학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모'로 우뚝 서게 된다. 신경숙이 한국 문학을 평정하고 있을 때 김정란 시인이 신경숙 문학을 매섭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때 비평가 일군이 발군을 뽐내며 무차별적으로 김정란을 융단폭격했다. 가히, 그 수준이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어서 눈 감고 커트코베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 무리의 수장이 바로 남진우였다. 그렇다, 경숙 씨 남편 남진우.  김정란과 남진우는 2000년에도 대차게 싸운 적 있다. 그는 김정란을 두고 " 가장 타락한 형태의 페미니즘이란 구호 " 라고 비판했다.

김정란은 남진우가 자신을 " 남근 달린 여성 " 이라고 표현하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응수했다.


그(남진우)는 지성과 이론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 어떻게 지성과 이론을 갖추었다고 여성비평가를 남근 달린 여성이라고 야유할 수 있는 걸까 ? 그러면, 별로 지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남진우는 자궁 달린 남성인가 ? 더더욱 놀라운 것은, 여성비평가가 여성작가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라는 야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하일지, 장정일, 이인화, 박일문을 공격했던 남진우를 보고 우리는 남성의 적은 남성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남진우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권 때 젊은 작가 137인이 정권 교체를 바라며 비상시국 선언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작가회의가 지지 성명에 동참했던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한두 명도 아니고 137명...... 요즘 시인이나 작가들의 책 서문을 보면 앞뒤 맥락 없이 노동과 혁명을 이야기해요. 그런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뜬금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 이 고백은 신경숙이 << 외딴방 >> 에서 1인칭 화자의 말을 빌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리는 것이 행복해 " 라고 했던 세련된 키친아트적 고백과 일치한다. 이런 것을 두고 " 아다리가 짝짝꿍 " 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아다리 짝궁인 셈이다.

표절 논란 이후, 신경숙은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어을 때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레 나와주는 따스한 키친아트에서 시원한 무우국을 끓이며 저녁(밥)상을 차리면서 마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삼시세끼 제때제때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하여, 나는 존경 없이 당신-들1)에게 묻는다.  밥은 먹고 다니냐 ?









​                           


1) 아다리 짝짝꿍 맴버들은 신경숙과 남진우를 포함한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이다. 철철 브라더스(권희철과 신형철)의 변명을 듣고 있으면 요실금 환자처럼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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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24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랑 들롱 뺨치게 잘 생긴 명문대 출신의 작가라는 대목을 보니 김경욱 작가님이 번뜩 떠오릅니다.....
스무 살 즈음, 김경욱 작가님의 무슨 단편집이었던가 책 날개를 펼쳤는데 한 3~4가지 장르의 열등감이 동시에 들더라구요 ㅋ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0:25   좋아요 0 | URL
김경욱 작가 님 미남이시죠... ㅎㅎㅎㅎㅎ

akardo 2018-12-24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친오빠라 한다면 부모님 사랑을 둘러싼 경쟁자이자 친구 정도로 생각할 텐데. 친오빠에게 밥 차려주기 싫은 어린 여동생들이 더 많을걸요.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3:59   좋아요 0 | URL
생각을 하면 얼마나 < 나 > 라는 소설 속 여자는 얼마나 남성에 순종적인가요. 여동생의 행복이 친오빠 저녁 차리는 게 행복이라니.. 이러니 한국 문단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듯...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며 퇴행적인 판타지입니까... 어이가 없어씀..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에게 저녁상을 차리는 것을 의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데
한술 더 떠 저녁상을 차리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는 소설 속 화자인 여성은
내가 보기에 남성 욕망을 채우는 판타지의 재현이다.

이 소설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것이야말로 신경숙 문학이 왜 그토록 보수적이며 퇴행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니.. 시바, 도대체 오빠 저녁상 차리는 게 행복이라고 지껄이는 저 아름다운 정체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신경숙이 얼마나 한국 주류 남성 문단에게 잘 보일려고 애를 썼나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이런 소설이 포스트모던하다고??!!!!!

이게 한국 문학의 위대한 결산‘이란 말이냐.
문학을 배워서 평론 짓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퇴행적 증후와 포스트모던한 증후를 헷갈린다는 게
말이 되오 ? 응 ??


이 시밤바들아.. 내참.. 더러워서.. 읽다가 토하는 줄 알았다....



2018-12-24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6:48   좋아요 1 | URL
주인공 나이가 16살입니다.... ㅎㅎㅎㅎㅎㅎ 16살부터 19살까지의 이야기인데... 전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진짜 그지같은 작품이에요. 제가 이 작품과 다른 작가의 작품을 혼동해서 그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신경숙 최고 걸작이라길래 순수한 마음으로 읽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개같은 작품입니다...

수다맨 2018-12-27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젊은 평론가들이야 (이명원이나 조영일 같은 강골이 아니라면) 출판사와 문예지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으니 신경숙 문학에 대해서 ‘속 시원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외딴방˝에 대한 최악의 비평은 백낙청의 ‘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곰곰발님께서도 제 서재에 들러서 이 글(http://blog.aladin.co.kr/719469195/7622927)을 보셨을 터인데 ˝외딴방˝의 성취를 논하고자 한국 문학사의 거성들인 염상섭, 홍명희, 조세희를 호출합니다. 여기서 백낙청은 조세희의 ˝난쏘공˝을 가리켜 문학에 대한 물음의 집요성이나 현실 탐구의 깊이가 ˝외딴방˝에 견주지 못한다고 폄하하고, 염상섭의 ˝삼대˝를 일러서 독자를 편하게 만드는 소설이라고 낮추보며, 홍명희의 ˝임꺽정˝에 대해선 창조적 모색의 긴장이 풀어진다고 비판하지요.
소장 비평가들이야 (신형철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힘도 빽도 없는 경우가 많으니 시장과 출판사와 ‘어느 정도는‘ 타협하는 성향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선 (당연히 비판을 포함한) 심도 깊은 얘기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문학의 원로라는 인물이 보다 진중한 안목과 독법으로 젊은 작가의 작품을 비평하지 못하고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폄훼하면서까지 ˝외딴방˝을 호평하려는 모습은 비판을 넘어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7 18:31   좋아요 0 | URL
읽은 기억은 나나 다시 읽어보았씁니다.
참 낯 뜨거운 매문이군요. 다시 읽어보아도..
이 양반은 남진우보다 한술 더 떴구려.. 참. 기도 안 찹니다.. ㅎㅎ

이거 하루빨리 수다맨 님이 문단을 접수해야 하는데....

나중에 술 한 잔 해요. 안 한 지 오래되었구려..
 
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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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주정뱅이에 가까웠던 내가 일주일에 한 번 술을 마시다 보니 오늘은 귀한 날이다.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사서 술상을 차렸다. 호박을 삶아서 믹서기로 갈은 호박 스무디를 만들어 맥주 500CC 잔에 채우고 호박으로 만든 부침개와 돼지고기 큼직하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와 밥 한 공기를 담았다.

맥주컵에 소주를 담고 그 위에 거품이 나지 않도록 맥주를 부었다. 물론, 이 과정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소맥을 탈 때에는 거품이 생길 때의 공간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소맥을 타기 위해 (소맥을 타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특수한) 소맥 전용 젓가락 한 짝을 컵에 담고 다른 한 짝으로 젓가락 쇠기둥을 내리친다. 이때에도 신중한 계산이 필요하다. 타악의 힘이 젓가락 쇠기둥에 미치는 영향과 맥주 탄산이 이에 반응하는 격랑의 소용돌이를 계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쉽지 않은 일. 거품을 만들어 거품을 맥주 유리컵 꼭대기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은 시시포스가 바위를 끌고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

이 작고 즐거운 수고를 위해 나는 오늘도 캄캄한 밤에, 컴컴한 방에 홀로 정좌를 하고 젓가락 쇠기둥을 내리친다. 참선하는 마음, 이와 같으리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소맥을 24시간 동안 굶어서 허기진 위장에 쏟아 넣는다. 방은 고요하다. 티븨도 없다.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했다. 알싸하게 퍼지는 술기운이 좋다. 안주로 호박 스무디를 마셨다. 놀라운 사실은, 아니 씨발.......  소맥 딱 한 잔' 마셨을 뿐인데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작별인사도 못하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는 사실이다.  한때 " 말술 " 을 먹었으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 " 벼룩(의 간으로 담근)술 " 에도 잠을 자는구나. 일어나 보니 새벽이다. 이 황망함. 뭐랄까 ?  고자가 된 듯한 느낌 ?!  내가...... 고자라니. 아, 내가 고자'라니.  

차라리 계룡산 쌍쌍봉 아랫골의 고라니로 살고 싶다아.  새벽에 일어나 남은 벼룩술을 마셨다.  벼룩의 간이 이런 맛이로구나. 문득, 사랑이라는 것도 소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라는 시금털털한 보리 맥주와 나라는 맑고 독한 소주가 섞이는 과정. 처음에는 서로의 밀도가 달라서 맥주 아래 소주가 가라앉으나 어느 순간 타악의 힘으로 젓가락 쇠기둥을 치는 순간  맥주와 소주가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는 것, 그 하얀 포말.  아, 저 격랑.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듯이, 소맥을 말아먹지 않은 자는 사랑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소맥이 얼마나 맛있다고.

10년 전에 읽었으나 읽은 줄도 모르고 다시 읽은 소설(책 읽어주는 남자)을 생각했다. 이 소설이 오프라 윈프리 쇼의 북클럽 코너에서 소개되었을 때 패널 - 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논란의 핵심은 스물한 살 차이가 나는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과 서른여섯 살 한나의 사랑이 과연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가 _ 라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사랑이 아니라 그루밍'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 질문을 받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화가 나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지적한 후,  유럽의 독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하엘과 한나를 통해 전쟁 이전 세대와 전쟁 이후 세대의 세대 갈등을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 한나 " 를 이해하기로 했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아이가 문자 세계로 진입했는가 못했는가에 따라 상상계와 상징계로 분류했다.  상상계에 머무르는 아이는 당연히 문자 세계에 진입하지 못했기에 입말(구술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한나 슈미츠'가 그런 경우'다.  그녀는 몸은 성숙한 여인이지만 구순기에 고착된 어린아이'이다.  그렇기에 그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나치 부역에 대한, 그에 따른 죄의식이 없다.  그녀는 순수한 의미에서 無知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은 그루밍'이 맞다. 

미하엘보다 한참 어린 이는 한나 슈미츠라는 갓난 여자아이'이다. 한나는 교도소에서 문자를 배운다. 

그녀는 힘을 잔뜩 주어 썼다. 한가운데를 접은 편지지의 아래쪽 면과 위쪽 면에 박힌 글씨 자국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얼핏 보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쓴 글씨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글씨체에서 서툴고 어색하게 보이는 부분이 여기서는 듬뿍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선들을 모아 글자를 만들고, 글자들을 모아 낱말을 만들기 위해 한나가 극복해야 했던 어려움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손은 이리저리 마구 헤매기 때문에 글씨가 나아가는 길의 안쪽에다 손을 붙잡아두어야 한다

-255쪽

그것은 구순기 고착에서 벗어나 성인의 세계로 진입했다는 상징이다. 비로소 한나는 성인이 되어 선악을 구별하게 된다.  결국 한나는 석방 예정일 전날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선택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고 능력에 따라 행간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는 어린이로서 사랑을 시작했고 어른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이 소설을 당신에게 추천한다. 소맥 마시며 소설 읽기 좋은 새벽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좋은, 캄캄한 겨울 새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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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네 


 


1 파나 마나 한 파나마 모자 장수

파나마 모자를 원가로 파는 파나마 모자 장수가 있다. 예를 들면 파나마 모자를 십 원에 사서 십 원에 되파는 것이다. 고로 파나마 모자 장수는 파나 마나 한 파나마 모자를 파는 것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파나 마나 한 파나마 모자를파냐고 !  같은 이유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왜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대부분의 한국 에세이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싸구려 감성으로 둔갑시켜 유통한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 류'의 에세이 말이다. 김난도, 혜민, 이기주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독자들은 이런 책에서 " 위로 " 를 받지만 나는 기분이 " 아래 " 로 곤두박질친다.  깊이가 있는 글감은 깊이 팔수록 맑고 영롱한 샘물이 샘솟지만 감성 이기주의 에세이(미안해요, 이기주 씨이이 ~)는 파나 마나 우물이 아니라 똥물이다. 몇 번 선택 실수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책 표지만 봐도 대충 돌아가는 꼴을 알 수 있다. 주먹 불끈 쥐고 외치게 된다. 내가 다시는 이따구 책에서 우물 파나 마라...                                결론은 이렇다 : 파나 마나 한 모자는 안 파는 게 상책이고 파나 마나 한 우물은 애초부터 삽질 안 하는 게 상책이다.






2 차마 웃을 뻔하였다

김영민의 << 차마, 깨칠 뻔하였다 >> 는 선문답 같은 글이 많아서 문장 읽기가 녹록치 않다.  그래서 바짝 긴장하며 읽다가 싱겁게 끝나는 글이 있어서 종종 차마 웃을 뻔하였다.  뭐야, 싱겁기는. 독특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 김영민 선생 !  그런가 하면 산문이라 하기에는 리듬을 타는 운문에 가까운 글도 있다. 예를 들면,



누가 더 많이 아픈지 경쟁한다. 인간이다. 누가 더 억울한지 다툰다. 인간이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경쟁이 되지만 내 '생각' 속에서 이미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다. 너와 내가 맞물린 자리를 알아챌 때에야 비로소 화해이지만 그 자리는 늘 한 발 늦다. 인간이다. 상대의 마음이 깨어졌기에 나도 내 깨어진 마음을 붙안고 찾아올 수 있었을 뿐이다. 인간이다. '그리고(and)', 는, 이미 늦은 것이다. 인간이다


- 이미 늦은 것, 인간이다 205쪽


야금야금 읽기에 좋은 에세이'다.








3 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네

옛날에 군대에서 참호를 파느라 삽질을 하다가 점심 먹고 풀밭에 누워 까무룩 잠을 잔 적이 있다. 이리저리 뒹굴다 보니 풀밭에 얼굴을 파묻고 잔 모양이었다.  코끝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한 마리의 지네가 더듬이로 내 코끝을 더듬거리며 지나는 것이 아닌가 !  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네였다.  아, 놀라워라. 무서워서 오줌을 쌀 뻔했다.  몸은 경직되고 호흡이 빨라졌다. 내가 움직이면 지네가 덜컥 물 것 같아서 옴짝달싹도 못한 채 지네가 지나가기를 숨죽여 지켜보아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긴 하나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혐오가 아니라 경외'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때 내 감정은 팜 파탈의 첫 등장을 지켜보는 느와르 영화 속 탐정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탐정처럼 말이다. 대체로 독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 지네가 더듬이로 나를 건들고 지나갔을 때, 그러니까 내 얼굴을 건방지게 더듬이로 희롱하고 농락했을 때, 내 몸은 지네의 에로티시즘으로 인하여 발기되어 온몸이 마비가 되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점은 본질적으로 마비이자 맹목이다. 콩깍지가 씌이고, 호흡이 가빠지며, 넋 놓고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독(毒)을 읽는다. 상대에게 끌린다는 것은 그 대상이 독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  숲길을 걷다가 독을 품은 뱀을 만나게 될 때의 신체 반응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의 신체 반응과 동일하다. 어찌 할 줄 몰라 넋 놓고 바라보며, 때론 멀리 도망치고 싶지만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아름다운 대상에게 매혹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게도 그런 여자가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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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깨칠 뻔하였다
김영민 지음 / 늘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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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는 주어의 복심(腹心)이다 :





박근혜와 건달-들


 

 

 

 

김영민이라는 철학자를 알게 된 계기는 << 집중과 영혼 >> 이라는 철학 에세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쉽지 않은 문체였으나 만연체와 문어체 사이에서 종종 눈에 띄는 시적 언어'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국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서양 철학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김영민은 소중한 철학자이다.

나는 오랫동안 오고가는입말에서 중심부에 해당되는, 부사(구)로 강조한 " 술어의 세계 " 를 믿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동사와 형용사는 주어의 욕망처럼 보이지만, 진실은 항상 번역이 필요한 영역이다. 진실은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다(진실을 폭로하는 이는 천사가 아니라 주로 악마다). 오히려 진실은 중심부가 아닌 눈에 잘 띄지 않는 주변부에 놓여 있다. 김영민은 이렇게 말한다. " 부사는 주어의 복심이라는 게 내 오랜 지론이다. 포이어바흐나 니시다 키타로라면 술어는 주어의 진실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진실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엉뚱한 자리에 숨어 있기도 한다(92쪽, 부사는 주어의 복심이다 中) ". 그 사람의 욕망을 읽으려면 부사의 쓰임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부사는 주어의 니드 the need(s)이자 이드 the id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근혜'이다. 인간이랍시고 내뱉은 말투를 듣다 보면 이 짐승은 부사를 지나치게 남발하며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박근혜 왈, " 그러니까 그게 너무 많은 음모가 좌파 진영에서 저를 이렇게 매우 막 공격하는 게 과연 이게 옳은가, 그리고 ...." ).  분열된 부사구, 바로 그것이 박근혜의 정신세계인 것이다. 부사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술어가 빈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무들이 자신의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내듯이, 박근혜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술부가 사실은 황폐한 내부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넓은 부사(구)를 남발한 것이다.

서평의 고수이신 파란여우 님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김영민은 " 자본주의와 창의적으로 불화하기 위해서 채택한 생활양식으로 1일1식을 실천하고 있다 " 고 한다. 파란여우 님의 글을 인용하면   :  1일 1식은 생산과 소비까지 자본주의 체계가 점령한 현실에서 개인이 실천 가능한 저항 양식이다.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한 생활”이라는 언급으로 보아 폭주하는 산업 성장을 비롯해 노동착취를 가리킨 느낌이 든다. 1일 1식을 “정치적 행위”라고 규정한 이 인터뷰에는 《보행》에 나온 “ 여자의 말을 배우기 ”와 《차마, 깨칠 뻔하였다》에 나온 “여자라는 장소”, “남자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와 겹친다(파란여우, 욕심 없는 의욕- 글쓰기와 칼쓰기에서 발췌).

"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한 생활 " 이란 언급은 내가 " 삼시 세 끼라는 신화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허구 " 라는 대목과 일맥상통한다. 현대인에게 세 끼는 치명적인 < 독 > 이다.  하물며 좋은 아내의 기준을 아침밥을 차려주는 여자'로 규정하는 한국 남자 거개가 건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남자는 거개가 건달이다. 표정도 건달이고 눈매도 건달이고 매무새도 건달이다. 앉아 있어도 건달이고, 서서 걸어도 건달이다. 밥을 먹을 때도 건달이고, 악수를 할 때도 건달이고, 모르는 여자를 대할 때도 건달이고, 심지어 발제를 하거나 강의를 할 때도 건달이다. 핸드폰을 놀리거나 담배를 피울 때는 더더욱 건달이니, 술을 먹을 때에는 살펴 말할 건덕지조차 없다(한국남자들, 혹은 건달들 112쪽)



김영민은 한국 남자에 대해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 건달 " 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내 식대로 말하자면 " 밤꽃 향기 작렬하는 불알후드 새끼 " 인 셈이다. 깡패를 순화한 건달이 내뱉는 입말의 특징 중 하나는 과장된 부사(구)의 남발이다. 이들에게 과거는 왕년(往年)이 아니라 왕년(王年)이다. 그들은 " 허벌나게 " 허세가 심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염불을 외운다. 주여, 밤꽃 향기 작렬하는 저 불알후드 새끼들의 허벌나게 찬란했던 허세를 제발 잠재우게 하소서 !





+

한국 남자 거개가 건달이 된 이유는 대한민국이 근대성을 거치지 않고 전근대에서 곧바로 현대로 직행했다는 데 있다. 근대성의 핵심은 에티켓 교육에 있다. 이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한국 남성은 manner를 모른다. 건달의 탄생이다. 이처럼 건달이 창궐하다 보니 지랄이 흉년이었던 적은 이승만 정권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랄은 항상 풍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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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30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30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8-11-30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글 보고 마음이 들썩들썩 했는데, 곰발님이 쐐기를 박으셨네요. 장바구니.....

곰곰생각하는발 2018-12-03 14:50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씁니다. 쉬운 책은 아니에요. 선문답집 같기도 하고 종종 유머도 있고... 종합적입니다. 함 읽어보세요..ㅎㅎ

수다맨 2018-12-02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김훈은 인터뷰에서 문학으로 분류되는 글(소설, 시 등)보다는 기록문(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등)을 더 좋아한다고 밝힌 적이 있었지요. 제가 보기에는 그의 문체는 명확한 사실만을 전달해야 하는 기자 경력과, 부사/형용사를 가능한 배제하고 단순한 주술 구조로 문장을 쓰려는 과거 무신/사관들의 작법에 빚진 바가 큽니다.
저는 이문구 같은 (판소리체와 타령조를 염두에 두고 문장을 쓰는) 예외적인 작가를 제외하면,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일수록 인식의 빈곤을 장식적인 언어로 감추려 든다는 혐의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03 14: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기록문이죠. 특유의 만연체가 맛이 나기란 쉽지 않죠. 그런 점에서 이문구의 문체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