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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바닷가 ㅣ 어스시 전집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7월
평점 :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과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 중 『머나먼 바닷가』를 읽고
다시 뭔가 써보려고 한다. 뭔가를 열심히 쓰면 나는 달라질까? 알 수 없다. 그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매일 매일 뭔가 써보려고 한다. (이런 결심을 어디 한두 번 했겠는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내년 2월까지 약 아홉 달 동안이다.)
최근 아들에게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를 읽어주게 되었다. 아들은 내게 영어책의 한 장을 읽어주고, 나는 그 대가로 아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 주기로 털컥 약속했다. 아들이 집어온 책이 어스시 시리즈였다.(헉!)
예전에도 어스시 시리즈를 읽으면서 작가가 동양 사상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최근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을 읽고 『머나먼 바닷가』를 다시 보니, 어술러 르 귄이 『반야심경』을 소설로 풀어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책이 같은 이야기로 읽혔다.
어스시 시리즈의 주인공 게드는 1권, 2권의 위업을 통해 로크 마법학교의 대현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위대한 마법사이자 왕이었던 모레드의 후손이며, 인라드의 왕자인 아렌이 대현자를 찾아 온다. 아렌의 말에 따르면 최근 인라드 근방 북원해 섬들에서 마법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했다. 마법사들은 더 이상 주문을 외우지 못했고, 마법의 말이 잊혀졌다고 했다.
대현자는 아렌의 말을 심각한 일로 받아들이고 그 이유를 찾고자 아렌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난다. 아렌과 대현자는 여러 곳의 섬에서 마법이 힘을 잃어버리고, 마법사들이 사라져버렸음을 확인하게 된다. 마법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장인과 기술자들은 자신의 힘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무기력해져 있으며, 질서는 사라져 버렸다. 대현자와 아렌이 이런 불길한 징조의 원인을 찾아 헤매는 동안 더없이 강력한 마법을 지닌 로크의 대마법사들도 혼란에 빠진다. 로크의 선생들이 주문을 외우지 못하고, 학생들은 마법을 불신한다.
이 모든 불길한 징조의 근원에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마법사 ‘거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열어 스스로 영원히 죽지 않는 자가 되어 산자와 죽은 자의 왕으로 자처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대가로 내어주고, 스스로 죽지 않는 삶을 열망하도록 충동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려움에 굴복하는 순간, 마법사는 마법을 잃게 되고, 사람들은 삶의 생기와 즐거움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어리고 미숙했던 아렌은 ‘거미’를 찾아 다니는 중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대현자에게 묻는다.
“삶을 사랑한다면, 그 삶이 끝나는 건 싫지 않을까요? 어째서 불멸을 욕망해선 안 되나요?”
이 질문은 아렌만의 질문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이다. 우리는 삶을 사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삶이 끝나는 것이 두렵다.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을 멈출 수는 없는가? 혹은 죽음을 늦출 수는 없는가?
게드는 말한다.
“둘이 하나를 이룬다. 세계와 명계, 빛과 어둠, 바로 ‘균형’의 두 기둥이지. 삶은 죽음으로부터 솟아오르고, 죽음은 삶에서 솟아난다. 서로 상극이면서 서로 열망하고, 상생하며 영원히 환생한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모든 것이 환생하지, 사과나무에 핀 꽃이며 별들의 빛이…….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다시 태어남이 있다. 그러면 죽음이 없는 삶이란 무엇이겠느냐? 변화 없는 삶, 영영 지속되는, 끝없는 삶이란? 그게 죽음이 아니고 뭐겠느냐? 영원한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삶을 사랑하고 열망하는자, 죽음도 사랑하고 열망하라!
『반야심경』은 말한다.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라.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또한 이와 같느니라. 모든 법이 공(空)으로 표시되니 그들은 생겨나거나 파괴되니 않느니라. 불결하거나 성스럽지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틱닛한 스님은 말한다.
“하늘을 유유히 거닐던 구름은 마침내 비가 되어, 떨어져 내리면서 노래하고, 미시시피 강의 일부가 되거나 아마존 강의 일부가 되며, 채소 위로 내리거나 우리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험이 그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또한 구름은 자신이 비가 되어 대지 위로 떨어져 내리면 바닷물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두려워할 뿐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그래서 결국 “고통이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고, 고통의 멸함이 없고, 멸하는 길도 없고, 이해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소설 속 주인공 위대한 현자 게드는 『반야심경』의 진리를 이미 깨닫고 있다.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순응하고,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게드의 힘은 ‘거미’의 힘을 넘어선다. 게드는 ‘거미’를 죽음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이 가진 모든 마법의 힘을 쏟아 부어 삶과 죽음 사이에 벌어진 구멍을 닫은 후 기진하여 쓰러진다. 게드의 곁을 지키던 아렌의 충직함이 게드과 아렌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낸다.
세상은 다시 균형을 찾았다. 모든 힘을 다 쓰고 마법을 잃은 게드는 위대한 용 ‘칼리신’을 타고 고향 마을 곤트로 돌아간다.
대현자의 위대한 마법도 삶과 죽음을 바꿀 수 없다. 남의 죽음은 물론 제 스스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어스시의 세상에서 마법은 한 존재를 온전하게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존재의 진짜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존재를 온전히 보고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럴 때에야 그 존재에게 마법은 행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름을 부르고 말을 하지만, 온전히 그 존재의 참모습을 보고, 그에 딱 맞는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때에만 우리의 말은 존재에게 힘을 발휘한다.
틱닛한 스님은 말한다.
“통찰은 그저 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참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단지 서서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느끼는 대로 느끼고 고통도 함께 겪고 기쁨도 함께 즐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마법이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대상을 통찰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나의 말은 그 대상에게로 가서 꽃이 되어 피어난다. 이것이 마법이 아니고 무엇일까? 죽음을 두려워 말라,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