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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결혼했다 -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
마리나 레비츠카 지음, 노진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책 값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아빠가 결혼했다』를 읽고 뒤편의 가격을 보니, 10,000원. 내친 김에 최근에 읽은 소설들을 살펴보니, 하드커버에 큼직한 글씨에 여백의 미가 살아 있는 193쪽 짜리 소설도 10,000원. 비슷한 판형의 280쪽 짜리 소설도 10,000원. 최근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는 주목받는 작가의 신간은 496쪽에 14500원. 사용된 종이의 양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책 값이 어떻게 정해지는 건지 갑자기 궁금했다.
솔직히 어떤 책은 너무 쉽고 너무 빨리 읽혀 본전 생각이 날 때가 있다. 특히 소설이 그런데,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중고서점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소설가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내 영혼을 조금쯤 팔 수도 있지 않을까 할 만큼 난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내 스스로 한 줄의 이야기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한 삼 십년 넘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다보면, 나름대로 눈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서두가 길었다. 결론은 『아빠가 결혼했다』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10,000원은 너무 싼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었다. 제목이 좀 워랄까 시선을 끌려고는 했지만 비슷한 다른 제목의 책들 때문에 식상하다는 느낌을 준다.(책을 다 읽고, 이 책의 원제는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만약 그대로 번역을 했다면 내가 읽게 되었을까 의문이 들긴 했다.) 하지만 막상 읽어가면서 내가 어떻게 아무 정보도 없이 도서관의 그 많은 책들 가운데 이렇게 좋은 책을 골랐을까 스스로 대견해 했다.
나데즈다는 어느 날 여든 네 살 된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서른 여섯 살 난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것.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기간. 나데즈다 자신보다도 더 어린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아버지의 전화 한통으로 다데즈다 집안의 온갖 묵은 귀신들이 폭탄을 맞고 파편처럼 터져 나온다.
아버지의 상대는 우크라이나에서 관광비자로 영국에 들어온 발렌티나. 아버지도 발렌티나가 결혼하려는 이유가 여권, 비자, 취업허가증, 그리고 돈 때문일 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는 흡사 로켓발사대와 같이 큰 가슴을 지닌 발렌티나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푸핫, 로켓발사대라니...)
겉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뭐 그렇고 그렇다. 나데즈다와 언니 베라의 반대에도 아버지는 결혼을 감행하고, 돈을 요구하는 발렌티나 때문에 아버지는 궁지에 몰리고, 두 딸은 아버지를 위해 뭉친다. 결국 발렌티나는 첫번째 남편, 아들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콩가루 집안의 정신 나간 여든 네 살 아버지의 결혼으로 러시아의 내전과 2차 세계대전 중의 우크라이나인들의 슬픈 역사가 생생히 살아나고, 나데즈다는 늘 정신 나간 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아버지, 죽은 어머니, 그리고 속물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언니를 이해하게 된다. 라데즈다는 자신이 이런 가족들의 보호 속에서 현재의 삶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라데즈다는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아버지를 못살게 굴고, 욕을 퍼붓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던 발렌티나의 뻔뻔함과 절박함조차도 이해하게 된다.
물론 이 책의 미덕은 그 이해의 깊이 뿐만은 아니다. 시종일관 웃긴다. 라데즈다의 아버지는 어쩌면 천재일지도 모르는 엔지니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 대해 의뭉스럽게 말을 돌려버리고, 침묵으로 일관하는가하면, 끊임없이 항공술과 비행기엔진, 트렉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고, 엉뚱한 고집을 부린다. 또 끊임없이 벨렌티나의 가슴에 집착하고, 발렌티나에게 키스와 심지어는 섹스마저도 요구한다. 아버지는 발렌티나가 누군지 모를 남자와 낳은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그 상황에 대처하는 가족들의 행동과 말이 정말 웃긴다.
그런데 라데즈다와 언니 베라는 아버지가 미친 게 틀림없다고 함께 욕하면서도, 오랜 불화와 미움을 잊지 않았으면서도, 그들이 한 가족임을 잊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가족을 이루기는 참 쉬운데, 진짜 가족이 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인 듯하다. 어쩔 때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곁에 있는 가족을 이해하는 게 힘든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말아야지.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더 이상은 가족이 아니니까 말이다.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 너무 쉽게 읽히는 소설 때문에 본전 생각을 했던 속물들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