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논문을 대중서로 - 친절한 글쓰기를 위한 꿀팁 18가지
손영옥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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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래서 박논은 언제 책으로 내시나요??”

 

좋아하는 선생님들을 뵐 때마다 이렇게 여쭙곤 한다. 훌륭한 연구들을 빨리 책으로 읽어보고 싶어서다. 물론 박논을 인쇄해 스프링제본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소위 읽는 맛이 살지 않는다. 그렇게 뽑아만 놓고 사물함에 쌓아둔 박논이 한 트럭이다. 게다가 박논은 역사책 달리기에 써먹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거칠고 딱딱한 논문이 아닌, 전문적인 편집을 거친 유려한 책을 원한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 제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요...” 박사까지 따셨는데 공부가 부족하다면 대체 얼마나 더 공부해야 책을 낼 수 있는 것일까? 5? 10? 일단 책을 내셔야 연재에 써먹는데, 나는 10년 뒤에도 역사책 달리기를 연재할 수 있을까? 아니, 다 떠나서 과연 10년 뒤에 책이란 게 남아있을까? 연구자가 아닌 독자인지라 이런 속도 모르는 얘기를 꺼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결국 세상에 널리 읽히고 도움이 되라고 하는 연구일진대, 쉽게내주시면 안 될까?


손영옥의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다. 지은이는 문화전문기자이자 미술평론가로, 박사논문인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 연구(2015, 서울대)를 다듬어 미술시장의 탄생(2020, 푸른역사)을 퍼냈다. 기사와 논문, 평론은 물론 한 폭의 한국사(2012, 창비)처럼 청소년을 위한 교양서까지 쓴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책이 나온 푸른역사는 대중학술서란 말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를 교양 독자에게 선보이며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역사출판계의 명가. 지은이의 패기와 출판사의 안목이 다시없을 책을 만들었다.

 

지은이는 미술시장의 탄생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려는 마음이 책을 쓴 동기가 되었노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 책은 지은이가 박사논문을 대중학술서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뼈대로 삼고 있는 만큼, 읽다보면 감질나서라도 미술시장의 탄생을 한 권 사보고 싶어진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내 논문을 대중서로가 단순히 미술시장의 탄생의 홍보책자나 미끼상품만은 아니다. 전방위 글쟁이 손영옥이 아니라면 결코 들을 수 없었을, 유용하고 구체적인 꿀팁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시대다. 이들 예비 작가를 위한 글쓰기 교본은 이미 쌔고 쌨다. 비단 글 잘 쓰는 법이 아니라 서평, 동화,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형식과 내용에 맞는 교본을 골라잡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시장은 포화 상태다. 그렇기에 이런 유의 책은 소위 예제풀이과정이 얼마나 상세한가에 성패가 판가름된다. 잘 팔리는 수학문제집도 다들 개념설명보다는 풍부한 문제와 자세한 해답을 기대하며 사보는 게 아니겠는가.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이 점에서 아주 독보적이다. 솔직히 손영옥이 제시하는 꿀팁은 그렇게까지 새롭지는 않다. 쉽게 쓰고, 스토리텔링으로 흥미를 돋우고, 편집자를 믿으면 된다. 대신 지은이는 풍부한 예제와 풀이를 통해 이 뻔한 과정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냈다. 앞서 이야기했듯 지은이가 박사논문을 대중학술서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이 이 책의 뼈대지만, 당연하게도 지은이는 자신의 책과 논문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최효찬의 일상의 공간과 미디어(연세대학교출판부, 2007)나 이성낙의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눌와, 2018), 송은영의 서울 탄생기(푸른역사, 2018)처럼 박사논문을 토대로 만든 다른 교양서도 적극 참고했다.

 

단순히 이런 책도 있다며 슬쩍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다. 지은이는 자신의 책을 비롯해 참고자료로 사용한 모든 책들을 꼼꼼하게 해부한다. 목차를 비교하고, ‘꿀팁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일일이 찾아 대조하는 등 박사논문과 교양서를 부지런히 오간다. 얼핏 봐도 품이 꽤 많이 들었을 것 같은 작업이다. 여기에 더해 문화전문기자로 일하며 겪거나 들은 수많은 에피소드가 군데군데 감초처럼 들어가 있다. 심지어 마지막엔 (이 역시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겠지만) 한겨레이유진 기자와 이데일리오현주 기자의 『미술시장의 탄생서평까지 실었다. 논문, 학술서, 교양서, 기획서, 서평을 넘나드는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이러한 충실함은 책을 지은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방향으로도 읽게 해준다. ‘논문을 대중서로바꾸려는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서를 논문으로바꾸려는 기자나 칼럼니스트에게도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단 한 번도 논문을 써본 적이 없는 내가 책을 읽으며 마음에 새긴 대목도 (지은이가 그런 얘기를 쓰진 않았지만) 칼럼이나 서평 쓰듯 논문을 쓰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흠모하는 고태우나 정일영처럼 유려하고 문학적인 논문을 쓰는 연구자도 있으나, 최소한 학술적인 글에 걸맞은 문장과 구성, 전개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꼭 글을 쓰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단언컨대 읽기에 대한 가장 쉽고 훌륭한 교양서라 할 수 있는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김성우와 엄기호는 탑 쌓기가 아닌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를 이야기한다. 다양한 매체의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고 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잘 읽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주로 영상과 활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다양한 활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이라고 다 같은 글이 아니다. 어떤 내용을,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구성과 전개는 물론, 문체와 예시까지 달라진다.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글이 가진 그러한 결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서다. 마치 빛을 분산시켜 여러 색으로 펼쳐내는 프리즘처럼,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가 장르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친절하고 자세하게 보여준다. 장르에 따른 글의 특성을 파악하고, 여기에 맞춤한 읽기를 연마해간다면 논문을 대중서로대중서를 논문으로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잘 쓰는 법에서 시작해 결국 잘 읽는 법으로 되돌아오며, 다시 잘 오가는 법으로 나아간다. 연구자와 작가, 독자와 편집자에 이르기까지, 글의 바다를 여행하는 모든 히치하이커를 위한 발랄한 가이드북이 지금 막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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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 지양으로서의 조선, 지향으로서의 동양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6
정준영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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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矛盾)이란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를 함께 팔 수 없듯이, 동시에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추상적인 논리학이 아닌 현실의 영역에선 창과 방패가 서로를 완전히 뚫거나 막지 못하고 어정쩡히 엉겨버린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그런 관계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가 아닌 내지의 연장이라 공언했으면서도, 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조선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동화되어야 하지만 영원히 자신과는 같아질 수 없는 타자, 일본에게 조선은 그런 존재였다. 그 점에서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는 모순이라기보다 아포리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정준영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는 제국 일본이 조선이라는 아포리아를 어떻게 돌파해내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야심찬 도전이 어떻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파고드는 역작이다. 역사사회학과 지식사회학을 연구하는 지은이의 관심사는 경성제대의 니혼징들이 착수한 조선 연구. 조선의 혼과 얼을 짓밟은, 소위 식민사학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꽤나 엄밀하고 실증적으로 조선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나름의 선의 역시 갖고 있었다고 선뜻 인정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이들의 조선 연구는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식민의 복잡한 뒤엉킴, 그 속에서 조선학이 맞닥뜨린 난관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통사 쓰기

 

1915,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통사를 쓰겠다는 목표아래 의욕적으로 조선반도사편찬사업에 착수한다. 이들이 보기에 조선의 문제는 역사의 결여가 아니라 과잉에 있었다. 기록이랄 게 거의 없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와 달리 조선은 독서와 문장이 문명인에 뒤지지 않으며 고래의 사서와 신서도 많지만 그 중 태반이 망설이요, 낭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과잉의 민족인 조선을 다스리기 위해선 진짜와 가짜를 엄밀히 따져가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통사를 쓸 필요가 있다는 게 총독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야심차게 출발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으니, 무엇보다 통사라는 형식이 갖는 불온함때문이었다. 통사란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도도하게 이어져온 주체(그것이 민족이든 국가든)를 상정한 내러티브다. 식민지의 역사를 잘게 조각냄으로써 언제까지고 타자의 자리에 묶어두려는 제국의 기획과는 근본적으로 상충한다. 지은이가 지적하듯 식민지 독자들이 억압받고 저항하는 민족의 이야기로 통사를 오독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통사 편찬을 포기하자니, 조선인에게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넘겨버리는 꼴이었다.

 

이처럼 오도가도 못하던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의 구원투수로 나선 게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였다. 오다는 1908년 대한제국 학부 서기관을 시작으로 1924년 경성제대 교수에 임명되기 전까진 조선총독부에서 쭉 편집과장을 맡아왔던, 교과서 편찬에 잔뼈가 굵은 테크노크라트이자 학자와 관료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오다가 1910년대 후반부터 겸직의 형태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을 담당하게 되며,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통사라는 계륵을 포기하는 대신 사료 색인집 편찬이나 훈련받은 인재 양성, 학술지 창간 등 제도화를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1922년 오다의 주도로 결성한 조선사학회와 학회가 발행한 조선사강좌는 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통사 편찬에서 제도화로의 방향전환, 그러나 한계가 뚜렷한 것이었다. 일단 조선사학회에 실린 글들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데다, 그마저도 집필을 맡을 강사를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독점한다는 원대한 목표와는 달리, 학회가 발행한 글들은 보통문관시험을 준비하는 본토의 일본인들이 수험용으로 많이 찾았다. 애당초 본토 학계의 정비가 이미 완료되어 식민지 학계를 이끌어준 게 아니라, 본토 학계와 식민지 학계가 함께 제도화되는 과정에 있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식민지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동시에, 통사 얘기가 쏙 들어갈 정도로 획기적인 조선사 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매개로서의 조선

 

1926, 저명한 동양학자인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 1867~1939)가 경성제국대학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실제로 재임한 기간보다도 내정자로 있었던 기간이 더 길었던 그가 조선총독부와의 갈등마저 불사하며 지켜내고자 했던 기치는 식민지 최초의 제국대학이 동양 문화의 권위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동양학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10년대 고등교육기관이 활발하게 설립되는 가운데서도 동양학 관련 학과는 설치되지 않아 졸업생들이 마땅히 생계를 이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1920년대 초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기점으로 일본 학계의 서구 쏠림이 가속화돼 동양학과의 인기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관심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자료가 좀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동양학의 침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설립되는 새로운 제국대학은 일본 동양학계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갈 곳 없는 수많은 고학력 백수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조선을 자료의 보고로 이용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손가락만 빨고 있는 후배와 제자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핫토리로서는 경성제대의 성공에 남은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핫토리는 신생 제국대학을 철저히 식민통치의 싱크탱크로만 여기던 조선총독부, 그리고 재정 축소의 압박과 싸워가며 경성제대를 본토의 여느 제국대학 못지않게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비록 1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핫토리는 총장으로 재임하며 강좌 수를 확보하고 똘똘한 후배와 제자들을 교수로 데려오는 등 자신의 의도를 거의 관철해냈다.

 

핫토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불러 모은 경성제대 교수진의 면면은 실로 화려했다. 일본 대외관계사 전공자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나 수·당대 불교사 전공의 오타니 가쓰마(大谷勝眞, 1885~1941), 발해사와 금사 전공자인 도리야마 기이치(島山喜一, 1887~1959) 등 일국사가 아닌 전 동양을 아우르는 관계사나 분야사 연구자들이 각 강좌에 포진했다.

 

백미는 핫토리의 본령인 지나(중국)철학 강좌였다. 지나철학 강좌의 초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논어연구에서 시작해 청대 고증학의 일본 수용에 관심을 둔 인물로,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한중 지식인의 문예교류에 주목했다. 자신의 연구대상이자 선배이기도 한 청과 조선의 고증학자들을 연상케 하는 고된 작업을 거쳐, 그는 일본 본토 동양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홍대용에서 시작해 박제가를 거쳐 김정희에서 정점을 찍는 한중 문예교류의 계보는, 후지쓰카에게 자부심과 부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특히 김정희는 그가 발굴해낸 자랑스런 연구 성과이자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선배이기도 했다. 청조 고증학의 중심에 우뚝 선 조선인을 재조명한 일본인 연구자. 조선을 매개로 중국과 일본이 이어지는, 실로 모범적인 동양학 연구였다.

 

후지쓰카의 뒤를 이어 1941년 지나철학 강좌를 계승한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1905~1978)도 전임자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일본의 정주학자 야마자키 안사이의 뿌리로서 조선의 퇴계 이황에 주목했다. 퇴계로부터 시작된 도학의 흐름을 야마자키 안사이가 계승했고, 이는 막말기 요코이 쇼난과 모토다 나가자네를 거쳐 마침내 천황이 발포한 교육칙어로 완결되었다는 것이다. 주자-퇴계-안사이-황도철학으로 뻗어나가는 계보를 설정함으로써 아베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했고, 그 가운데 조선을 위치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후지쓰카와 아베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다. 조선이라는 매개는 자주 흔들렸고, ‘국사동양사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붕 떠있을 때가 많았다. 실제로 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사편수회-청구학회-경성제대사학회를 꼭짓점 삼는 식민사학의 트라이앵글이 안착하며 조선학 연구가 만개했지만, 제국 전체를 놓고 보면 조선학의 비중은 결코 높지 않았다. 조선사가 국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동양사로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것도 원치 않았던 일본 본토 학계가 조선사를 방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본토의 냉대에 경성제대의 조선사 연구자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30년대 중반 경성제대 제4대 총장 야마다 사부로(山田三郎, 1869~1965)는 조선총독부에 역사교과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했다. 경성제대의 조선사 연구 성과를 조선, 나아가 일본 본토의 교과서에도 반영하고자 했던 야심만만한 시도였다. 일부 국사학자와 조선사학자들은 조선사를 제국 일본의 지방사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기이자 타자인 조선의 애매모호함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가보려고도 했다. 물론 본토 학계는 식민지로부터의 목소리에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그 점에서 1930년대 이후 조선 연구에서 식민지가 본토를 압도하게 된 것은, 오히려 조선사가 철저히 식민지용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줄 따름이었다.

 

조선을 지우거나, 자신을 지우거나

 

비록 실패했지만, 후지쓰카나 아베는 그래도 조선에 매개라는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선 나름의 의의가 있었다. 조선을 아예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조선사학 제1강좌의 초대 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가 그랬다. 앞서 살펴본 조선사학 제2강좌의 오다 쇼고가 학자-관료의 길을 걸어온 테크노크라트였다면, 이마니시는 평생 아카데미즘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았던 천생 학자였다. 또한 그는 경성제대에 부임한 이후에야 조선사로 눈을 돌린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일찍이 이를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일본 관학 아카데미즘 최초의 조선사가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마니시야말로 오다가 제도화한 조선사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줄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런 이마니시가 평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가 바로 조선 고대사였다. 특히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평양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참여하며 본래 신라사에 머물러있던 그의 관심사는 한사군과 고구려, 부여 등 고대사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방대한 한대(漢代) 유물들은 양과 질에서 중국 본토보다 오히려 앞서 있었는데, 이는 일본 역사학계로 하여금 국사와 동양사, 조선사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길을 열어주었다. 중국보다도 중국 문화를 잘 보전한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일본은 낙랑군을 통해 조선이라는 매개자를 거치지 않고 선진문물을 직수입해올 수 있다. 나아가 현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므로 조선 속 지나인 낙랑군을 연결고리삼아 중국사를 넓은 의미의 국사로 간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일본과 중국이 직통되며 동양사를 국사의 확장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서술에서 조선사는 자연히 조선인이라는 민족의 역사가 아닌, 조선반도라는 공간의 역사로 전락했다. 실제로 이마니시는 조선인이 전체 반도에 걸쳐 홀로 존재한 것겨우 500년 남짓 되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는 오늘날 조선 민족의 본간을 이루는 한종족(韓種族)뿐 아니라 예맥족, 일본족, 그리고 중국 민족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마니시는 예맥족을 한종족과 구분함으로써 부여와 고구려를 조선사로부터 구출해냈다. 시대를 앞서간(?) 조선사의 트랜스내셔널한 재구성이었다.

 

나아가 이마니시는 중국과 고구려라는 양대 제국의 패권주의에 신음하던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일본의 도움 덕분이었다며 자신이 구축한 트랜스내셔널 고대사로부터 호혜와 연대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특히 백제가 무너질 당시 일본이 명백한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원군을 파견했던 사건은 패도(霸道)’가 만연한 20세기엔 찾아볼 수 없는 왕도(王道)’의 실현이었다. 식민사학자라는 오명과 달리, 이마니시는 자신의 조국이 과거를 등불삼아 정의로운 제국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선의에서 우러나왔을지언정 왕도의 체현자는 일본이요, 조선은 이를 투사하는 무대에 불과했다. 일본이 바란 건 어디까지나 조선인들 없는 조선이었다는 윤치호의 이죽거림처럼, 이마니시도 조선사에서 조선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마니시가 염원했던, ‘왕도의 체현자로서 제국 일본이 불가능한 기획이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 식민정책학자 이즈미 아키라(泉哲, 1873~1943). 그는 이 책에서 소개한 조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여러모로 튀는인물이었다. 국제법이라는 독특한 전공도 그렇거니와, 도쿄제대 경성출장소나 다름없던 경성제대에서 삿포로농학교 출신에 미국 유학파인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을 모델로 설립된 삿포로농학교는 리버럴한 학풍과 기독교적 분위기로 유명한, 관립이지만 반쯤은 사립 취급받던 학교였다. 그나마도 이즈미는 삿포로농학교에서 배움을 마치지 못한 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즈미가 유학하던 당시 미국에선 폴 라인쉬(Paul Reinsch, 1869~1923)가 주창한, ‘국민제국주의(national imperialism)’가 국제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영토 확장보다는 경제적 팽창을, 주권절대론과 무력충돌보다는 다자주의와 국제협조를 중시한 라인쉬의 주장은 일본에서도 거의 즉각적으로 소개되었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얻게 된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삼국간섭으로 빼앗긴 아픈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협조의 쓴맛을 본 일본으로선 자국의 제국질서와 세계적 추세인 국제질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질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이가 이즈미였다.

 

이즈미는 빈 땅에 사람을 심어국내의 일부로 편입하는, 문자 그대로의 식민(植民)만을 인정하던 삿포로농학교 1세대 선배들과 달리 주권을 보유한 외국을 식민지로 삼는 주권식민지에 주목했다. 식민정책학의 지평을 농정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지평 위에서 이즈미는 일본의 식민통치방침인 동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식민통치란 통치의 대상으로서 이질적인 타자를 전제하는 만큼 언제나 비동화주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비동화주의에 입각한 식민통치의 끝은 영연방처럼 의회를 통해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는 자치식민지가 될 터였다. 동화주의와 비동화주의의 이항대립을 넘어 식민통치의 필연적 귀결을 전망했다는 점에서, 그는 비동화주의자라기보다는 포스트 동화주의자에 가까웠다.

 

영연방을 모델로 한 자치식민지야말로 문명화, 민주주의, 민족자결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고 여겼던 이즈미의 주장은 당시로선 매우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3.1운동의 원인이 4000년 이상 특수한 문화를 일궈온 인구 1,500만의 민족을 단숨에 동화시키려던 일본의 무모함에 있다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는 그의 주장이 매우 이상적이었던 만큼 일반론이나 당위론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정작 현실권력은 이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컸다는 점이었다.

 

충돌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부임한지 1년이 지난 1928, 이즈미는 조선인 본위의 자치식민지 건설이 필요하다는 글을 외교시보에 두 차례에 걸쳐 실었다. 알맹이 없는 원론적인 글이었지만, 조선총독부의 대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했다. 이즈미의 글을 실은 외교시보의 발행 금지 처분을 내리고, 그의 사상이 불온하다며 경성제대 측에 교수 해임을 강하게 요구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당시 경성제대 총장 마쓰우라 시게지로(松浦鎮次郎, 1872~1945)의 비호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이후 이즈미는 철저한 침묵의 길을 택했다. 이마니시가 조선을 지웠다면, 이즈미는 자신을 지워버린 것이다.

 

다시, 조선/한국학을 묻다

 

이즈미의 침묵은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앞날을 예고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20년대 잠시나마 열렸던 자율의 공간은, 1930년대로 접어들며 급속히 닫혀갔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은 지나와 분리된 대륙’, 만몽(滿蒙)’ 진출의 교두보로 새로이 각광받았고, 그런 만큼 중국과 일본을 이어 동양을 만드는 매개로서의 역할은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역시 동양 문화의 권위보다는 만몽 개발을 위한 국책연구기관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만몽문화연구회와 대륙문화연구회 등 초학제적 산학협력단은 만몽 문화, 대륙 문화를 개발하는 도구로 조선 연구를 규정하고 동원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식민지란 공간에서 국책과 학리(學理), 군기(軍旗)와 과학의 깃발은 구별되지 않았다.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비극적인 말로를 보노라면, 역시 식민사학은 나쁜 것이라는 안전한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지은이가 근대와 식민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암시를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정준영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노장 학자들만 다뤘다는 점을 이 책의 한계라 자인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다분히 의도된 선택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식민사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순수한형태의 조선 연구를 통해 근대와 식민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867년생인 핫토리 우노키치, 1871년생인 오다 쇼고, 1873년생인 이즈미 아키라, 1875년생인 이마니시 류와 1879년생인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경성제대란 연구인생의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도달점이나 전환점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오히려 아랫세대 연구자들보다 권력의 눈치를 덜 보고 원숙기에 접어든 자신의 학문세계를 자유로이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랬던 이들조차 조선 연구라는 아포리아를 돌파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식민사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대 역사학, 구체적으로 조선/한국학이라는 범주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던진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사의 연구동향에 밝은 독자라면 이들의 연구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마니시 류의 트랜스내셔널고대사는 민족주의로부터 한국 고대사를 구출하려는 최근의 여러 시도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론 중국과의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관계를 가지고 여러 방면에서 폭넓게 조선을 연구해서 동양 문화의 권위가 되는 것이 본학(本學)의 사명이라역설하던 핫토리 우노치키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한국을 두고 보면, 중일 간의 비교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깨닫는 일이 종종 있다고 이야기하는 미야지마 히로시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다.(미야지마 히로시, 한중일 비교 통사, 너머북스, 2020, p.6.) 민족주의를 극복한다더니, 결국 돌고 돌아 식민사학인 것일까.

 

이런 섣부른 결론은 아마도 미야지마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박훈의 말마따나 그는 사실과 논리를 넘는 어떤 정념(情念)이 선행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국에 비판적인 역사가이니 말이다. (박훈, 진짜 동아시아사가 나왔다,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부 서울리뷰오북스 5, 서울리뷰오북스, 2022, p.124.) 그보다는 핫토리 역시 미야지마만큼이나 선의를 갖고, 조선을 매개로 동양이라는 보편을 창출하고자 노력했다고 보는 쪽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핫토리의 실패는 단순히 식민사학의 실패가 아닌, 동양/동아시아를 통해 민족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조선/한국을 새로이 긍정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의미한다.

 

가령 한국 전통사회의 특질을 중국과 일본의 중간형으로 정의한 미야지마에 대해 일본적 특질과 중국적 특질을 아무런 논리적 매개도 없이 편의적인 설명으로 절충하였을 뿐이라고(이영훈,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질, 이영훈 편,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375.) 일갈한 이영훈의 비판은 한국에게 부여된 매개라는 지위가 지극히 사후적임을 드러낸다. 한국이 있어 중국과 일본이 연결되는 게 아니라, 먼저 중국과 일본을 양 끝에 놓은 뒤에 한국을 그 가운데에 놓음으로써 매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사후적으로 부여된 매개라는 지위는 지극히 불안하기까지 한데, 18세기 고증학의 유행이나(후마 스스무, 연행사와 통신사, 신서원, 2008.) 16세기 은의 유통에서(조영헌, 「『동아시아사교과서의 은 유통과 교역망, 동북아역사논총39, 2013.) 조선만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적시각이 오히려 조선/한국의 낙후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조선/한국과 동양/동아시아는 서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조선/한국학은 결국 20세기의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일까? 확실히 민족주의 역사학은 힘이 세다. 비단 고대와 근세뿐 아니라 고려시대를 몽골제국사로, 근대를 일본제국사로, 현대를 냉전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바라보려는 게 최근 한국사학계의 최신 트렌드라 할 수 있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아직까진 민족주의 역사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돌아가기엔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점에서 국사와 동양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경성제대의 조선학 연구자들은 오늘날의 한국학 연구자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국사만 일본사에서 한국사로 교체했을 뿐, 조선/한국학이라는 아포리아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준영이 겨냥하는 지점이 정확히 이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성제대의 조선학 연구자들과 오늘날의 한국학 연구자들 모두 학문적 사명감과 순수한 열정, 엄정한 실증적 태도로 작업에 임했음에도 어째서 조선/한국학이라는 아포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근대 역사학 일반의 문제인가, 아니면 조선/한국학만의 문제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조선/한국학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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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제1405호, 제1406호 : 2022.03.28~04.04 - 21 WRITERS ②, 합본호
한겨레21 편집부 지음 / 한겨레신문사(잡지) / 2022년 3월
평점 :
품절


김혜리

"내가 이 영화를 보고 판단한 미적 판단을 씁니다. 다만 저널리스트가 일반 관객과 다른 점이라면 소통 가능한 언어를 써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보편성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미적 판단이란 의미는 아니에요. 그래도 나만의 것으로 남아서는 곤란합니다."


 


신형철

"제가 비평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은데 제일 멋없는 답은 이런 거예요. 제 삶에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타인의 삶에서 그걸 찾아낼 만큼 관심의 에너지도 없고요. 그러니 이와는 다른 자극이 주어져야만 하고 그게 작품이겠죠."


 


이라영

"산발적으로 적어둔 메모 속에서 어떤 흐름을 찾을 때가 있어요. 그럼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것을 막 찾고 열심히 구글링도 해요. 그러다보면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던 메모들 사이에서 써야 할 글의 구조가 나오기 시작해요. 그다음부터는 충실하게 쓰면 되는데, 거기까지 가는 게 힘들죠."


 


정여울

"제가 사랑하는 에세이의 잡스러움이 그 일에 적격이라고 생각해요. 소재가 무엇이든 특별한 문학적 장치 없이도 곧바로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바로 에세이의 잡스러움, 하이브리드적 에너지거든요."


 


김원영

"나라는 사람을 가운데 놓고 내가 연결된 전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맵(지도)을 그려보는 거예요. 아주 작은 나로부터 시작해 지구 전체로 확대해보는 거죠. 그 과정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은유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해요. 판단이 강할 수록 사람과 사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못 보잖아요. 전달자로 온전한 역할을 하려면 판단하지 말고 의심해야 해요. 소설가가 자기가 구축한 세계에서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논픽션 작가는 가장 아래서 세상을 보고 기록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정은정

"저는 단행본보다 오히려 집요하게 논문을 봐요. 유통, 산업 관련 보고서 등도. 한 주제를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웬만한 단행본보다 글쓰기에 훨씬 도움이 돼요. 그리고 인터뷰할 때도, 작가로서는 좌충우돌하며 부딪혀도 원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끌어내려 하잖아요? 사회학과 대학원에서는 멈춰야 할 땐 멈춰야 한다고 가르쳐요. 연구 윤리의 문제죠. 저는 작가로서의 자존심보다, 인터뷰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신 분들께 예의를 다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요."


 


최현숙

"저는 누군가가 각별한 인생, 상처, 장애가 있다고 관심을 갖지는 않아요. 아무나 붙잡고라도 그의 생애 이야기를 통해 계층과 성별과 문화와 심리를 드러낼 수 있어요. 그렇게 이 사람을 사회 속에 위치하도록 끌어내는 게 제 구술 작업의 핵심이거든요. 그가 사회의 어느 위치에 있었고, 누구와 같은 처지에 있었고, 누구에게 차별받았고, 이런 사회적 존재로서 한 사람을 끌어내는 거죠."


 


희정

"전 기록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세계가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시선이 가닿는 데까지가 자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세계를 어떻게 넓혀갈 수 있는지가 기록자 또는 비문학 작가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해요."


 


강원국

"예를 들어 <강원국의 글쓰기>는 네이버 블로그에 2년 반 동안 쌓아놓은 1700개의 메모로 쓴 거예요. 필리핀 세부에 강의하러 갈 일이 있었어요. 그때 강의 외에 이 메모를 다 출력해 가져가서 분류 작업을 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웠어요. 그래서 1700개 메모를 50개 덩어리로 분류했아요. 이 50개 덩어리를 가지고 책을 한 권 쓴 거죠."


 


김진해

"이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수 있다는 강한 간절함으로 써야 합니다. 쓰고자 하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하고요.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나 고민된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타인을 가늠해보면 됩니다. 이걸 드러내면 타인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생각하는 거죠."


 


김하나

"읽고 쓰기가 듣고 말하기보다 먼저 오는 것은 읽고 쓰기의 호흡이 느리기 때문이에요. 천천히 받아들이고, 느리게 사유하고, 꼼꼼히 정리하고 나서 듣고 말하기에 나서죠. 듣고 말하기는 아무리 천천히 해도 즉시적이어서 실수하거나 무례를 범하기 쉬우니까요."


 


김혼비

"왜 일상을 살아가다가 아주 짧게나마 자신을 멈칫하게 하는 순간을 딱 붙잡고 왜 멈칫했지, 뭐가 나를 멈칫하게 했지를 계속 고민하는 게 영감을 길어 올리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인 것 같아요. 떠돌던 영감을 이렇게 붙여보고 저렇게 연결해보고 순서도 바꿔보고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게 진짜 중요해요."


 


이슬아

“이제까지랑 다른 인터뷰를 제가 같이 만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연재 중이고 새로운 시리즈를 뜨겁게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겹치지 않는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편하게 하세요, 기자님.”


 


채사장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는 게 유일한 재미였는데 항상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를 만나도 계속 겉도는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가 최소한 공통의 뭔가를 공유한가면 그것을 기반으로 다음 얘기를 해나갈 텐데, 누구나 최소한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강명관

"그러니까 과거의 맥락에서 과거를 파악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탐구하고 싶다는 거죠. 문제는 이때까지 과거의 문학과 역사를 항상 근대와 민족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니까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연구 주제, 리얼리티를 다 숨겨버리고 마는 거죠. 은폐한 거죠. 과거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김상욱

"어쩌면 제가 물리학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과학자는 빈틈없이 완벽하게 설명하려는 태도에 익숙한데, 일반인에게는 정확한 설명보다 적절한 비유가 더 좋아요."


 


박주영

"좋든 싫든 써야 하고 글로써 밥벌이한다는 점에서 판사도 일종의 전업작가라 할 수 있겠네요. 선고도 일종의 마감이다보니 가능한 한 마감에 쫓기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최대한 틀리지 않으니까요."


 


박찬일

"글쟁이는 최소한 설득은 못하더라도, 동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글쟁이의 본능이랄까. 설득하려고 적절한 윤색도 하고 초도 치고 가미하고 미원도 치는 건데, 진짜로 눈물나는 건 사실이다."


 


유현준

"건축은 제약이 많다. 여러 사람과 흥정해야 하고, 예산 제한이 있고, 건축주의 취향이 있다. 그래서 원래 의도의 반이나 실현하면 다행이다. 그러나 글안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컨트롤한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자유를 느낀다. 스트레스도 해소된다. 건축은 하나를 현실화하기도 어렵지만, 글로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최재천

"문학적 글쓰기와 과학적 글쓰기는 각자 특성이 분명하기에, 상호 전환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글은 양쪽의 특성이 모두 묻어난다고 해요. 즉,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중요시하는 문학적 글쓰기와 결론-이유-근거로 구성되는 테크니컬 라이팅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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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이승렬 지음 / 그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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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국부 논쟁은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공화국은 본래 고아여야 할 터이지만, 다들 상상의 아버지를 찾아 자신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가치를 투사하려 든다. 인사청문회에서 대한민국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닌 김구 주석이 되었어야 했다고 이야기한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대표적이다. 비단 김구뿐 아니라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등 해방정국의 여러 지도자 중 누가 나라를 이끌었어야 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프로듀스 국부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승렬의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이하 형성)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살짝 비켜서있다. 지은이는 한국 의회주의의 오래된 미래로 인촌 김성수를 내세우지만, 결코 그를 국부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아도 이승렬은 영웅의 결단과 지도력으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역사관에 부정적이다. 그런 만큼 김성수는 좌든 우든 비범한 개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한국인의 심성을 거스르는 안티테제에 가깝다. 국부에 맞서는 국부, 국부 아닌 국부인 셈이다.

 

형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승렬의 전작 제국과 상인(이하 상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상인에서 이승렬은 조선왕조부터 시작해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시대까지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장기지속이 어떻게 한국 부르주아지만의 역사적 특수성을 형성했는가를 촘촘하게 재구성한다. 책에 따르면, 한국 부르주아지를 특징짓는 성격은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대한 강한 의존이다. 조선시대 주요 상업도시는 연안의 항구가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내륙의 사행로를 따라 형성되었다. 개성의 송상과 한성의 경강상인 등 유력한 상인집단은 서구와 달리 (물론 이런 고전적인설명도 문제가 있지만)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부는 조세운반이나 사행비 마련처럼 어디까지나 관의 업무를 대행하는 에이전트/거간꾼으로 불린 것이었다.

 

한국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 의존성은 대한제국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899년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이다. 한성과 개성, 인천 상인들의 자본금과 정부 국고금으로 설립한 일종의 반관반민 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은 당시 경기도 인근에서만 쓰이던 백동화의 유통범위 확대에 노력하는 등, 철저히 대한제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주 고객이 황실이었던 만큼 대한천일은행의 흥망은 대한제국의 흥망과 직결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며 은행 역시 1년 간 휴업하게 된다. 이후 일본 자본의 지원으로 다시 문을 열고 1911년엔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은행의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넘어간 뒤였다. 조선인 경영진은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맡는 등 실권 없는 명예직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타성에 젖은 1세대 부르주아지를 대체할 2세대 부르주아지가 등장한 것이다. 형성은 김성수로 대표되는 이들 2세대 부르주아지에 주목한다. 개항 이후 미곡무역을 통해 성장한 2세대 부르주아지는 개성 같은 사행로 도시가 아닌 서남해안의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삼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는 점에서 1세대 부르주아지와 달랐다.

 

무엇보다 이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이승렬은 미야지마 히로시의 전북형(全北型) 지주경기형(京畿型) 지주라는 틀을 빌려와 김성수를 이전 세대의 부르주아지와 차별화한다. 경기형 지주가 조선왕조 관료제의 일원으로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지대추구에 만족했다면, 전북형 지주는 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근대적인 계약서를 작성하고 선진농법을 도입하는 등 진취적인 경영자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성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관직을 사긴 했으나 이승렬은 착취를 위해 관직을 사는 것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관직을 사는 것은 다르고, 김성수 집안은 후자였다고 이야기한다.

 

김성수는 비단 진취적 지주, 경영형 지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경성방직을 대기업으로 키워냄으로써 농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의 도약에 성공했고, 동아일보를 운영하는 등 경제계를 넘어 사회, 문화계로의 영역 확대를 시도했다. 드디어 한국에도 서구적 의미의 부르주아지, 3신분이 탄생한 것이다. 김성수가 1915년 양반사족의 공간인 경성 계동(북촌)에 근대적 교육기관인 중앙학교를 신설하고, 1917년 기호지방의 관료적 지주인 윤치소로부터 경성직뉴를 인수한 것은 부르주아지의 세대교체를 웅변하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김성수와 같은 2세대 부르주아지의 이주로 경성은 중세적인 관료의 도시에서 근대적인 시민의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1910년대를 거치며 싹을 틔운 시민의 씨앗은 1919년의 3.1운동을 기점으로 쑥쑥 뻗어나가 꽃을 피우고, 전 조선에 홀씨를 흩뿌린다. 이승렬은 3.1운동을 계기로 김성수를 위시한 2세대 부르주아지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천도교 세력이 뭉쳐 시민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이야기한다. 관료에서 시민의 도시가 된 경성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근대적인 철도망, 기독교와 천도교의 탄탄한 조직력이 이를 뒷받침했다. 민중 역시 고종의 장례식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온건하면서도 평화롭게 구체제와 이별했고, 비로소 백성에서 시민으로 거듭났다.

 

이후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하며 식민지 공론장의 형성에 이바지했고, 자치론을 주도하거나 합법적 민족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시종일관 온건개혁의 길을 걸었다. 해방이 이뤄진 뒤에도 김성수는 지주라는 출신계급을 배반하면서까지 농지개혁을 지지했고, 의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맞서 저항세력의 통합을 촉구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김성수로 대표되는 상층 지주, 부르주아지의 온건주의와 점진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이 동아시아 4(북조선까지 포함) 중 유일하게 의회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형성의 문제점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편집이란 걸 아예 거치지 않은 듯 보이는 난삽한 구성은 가독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포메란츠의 대분기처럼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내용을 뺀다면 분량을 절반 이상으로 확 줄여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전작 상인같은 쫀쫀한 역사서라기보다는 벙벙한 역사사회학서인 만큼, 김두얼이 송호근의 탄생3부작에 했던 비판은 이 책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이승렬이 3.1운동 이후 형성되었다 주장하는 시민적 네트워크는 송호근이 같은 사건으로부터 추출해낸 환상형 공화 네트워크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비교의 문제다. 동아시아 4국을 아우른다곤 하지만 형성이 주된 비교대상으로 삼는 나라는 일본과 영국이다. 영국의 경우 의회주의의 성립에 상층 지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념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형성은 사실상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한 셈이다. 조슈번의 지원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자비로(=관에 의존하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김성수, 송진우와 대조하는 등, 형성은 일본에 관 주도라는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한국에 민간 주도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는데 적잖은 공을 들인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조작업이 선택적으로, 그러니까 지은이의 틀에 부합하는 사례만을 추려내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형성의 방대하고 난삽한 구성 역시 두 나라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일 수 있다. 이승렬은 전전 일본의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의 흐름이 어떻게 농민의 지지를 받는 군부에 의해 압살되었는가를 다소 지루할 정도로 길게 서술하면서, 전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군국주의의 후예들이 일본 정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설명으로 갈음한다. 한국의 경우엔 상층 지주와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1920~30년대 자치운동과 1950년대 반 이승만 운동만을 부각하고, 1940년대 일제에 협력한 역사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군사독재 시절의 정경유착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이승렬은 자신의 가설을 지지하는 사례에 대해선 너무 많이 말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례에 대해선 침묵한다. 비단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령 다소 뜬금없이, 장황하게 서술된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는 자치론을 내세운 상층 지주의 선구안을 부각한다. 반면 어쩌면 이들이 토지개혁에 내몰렸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해방 이후의 혁명적인 사회 분위기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독서를 주저하기엔 형성은 너무나 아까운 책이다. 지금껏 찾아보기 어려웠던, 아주 흥미롭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성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좌절된 것이 길게 보면 축복일 수 있다는, 굉장히 위험한주장을 한다. 전작 상인에서 상세히 조명했듯 정치권력이 상업자본을 리드하는 방식의 근대화가 성공했더라면 부르주아지의 독립은 요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인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탓에오늘날까지 미쓰이 그룹을 비롯한 재벌이 정치권력에 종속된 일본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면 한국은 광무개혁이 실패한 덕에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김성수와 같은 부르주아지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이승렬의 설명이다. 이들의 존재가 한국 의회정치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앞서 설명한 대로다.

 

이승렬의 주장에 대한 반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부르주아지가 과연 얼마만큼 국가로부터 독립적이었는지, 오늘날 일본이 과연 정치권력 우위의 나라인지 등, 반박할 거리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20세기 한국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그간 사회에 대한 국가의 압도적 우위는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역사적 특질로 이해되어 왔다. 조선총독부와 그 뒤를 이은 한국의 군사정부는 전형적인 강한 국가, 사회의 전 영역을 계획하고, 간섭하고, 동원하고, 단속해왔다는 설명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요새 나는 조선총독부와 군사정부가 과연 그렇게까지 전능한 존재였을지, 솔직히 조금 의심스럽다. 조선총독부와 군사정부 모두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상태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과연 사회를 강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국가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도 사회 역시 강하게거듭나지 않을까? 요컨대, “강한 국가강한 사회를 요청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상적인근대사회는 늘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식민지 사회식민지 공론장이 일종의 결여로 여겨진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국가가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사회는 통념과 달리 훨씬 많은 일을 자율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제 시대의 천도교나 군사독재 시절의 기독교가 그랬듯이 말이다. 국가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승렬의 도발적인 주장은 20세기 한국의 사회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를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이런 식의 포스트모던한 해석까지 갈 것도 없이, 이승렬의 주장은 보수주의의 맥락에서도 충분히 전용할 수 있다. 근대 보수주의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이성을 내세워 모든 것을 개조해버리려는 계몽주의의 마수에 맞서 사회의 자율성을 옹호하지 않았던가. 박정희 이래 한국의 보수주의가 강한 국가를 내세워 무언가를 하게 하는힘이었다면, 이제는 무언가를 내버려두는힘으로 전환해도 좋을 듯하다. 특히 박원순 시정 10년을 거치며 지방정부와 너무 밀착한 나머지 활력을 잃어버린 서울시의 시민단체들을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오세훈이 잘한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절한 거리를 강조하고 그 상징으로 김성수를 내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형성의 주목할 만한 특징 또 하나는 귀족정에 대한 옹호다. /대통령과 사대부/귀족/의회, 백성/민중/농민이라는 세 세력의 협력과 길항으로 정치를 이해하는 건 한국사회의 오랜 습성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혁군주정조에, 보수 정당이 장악한 국회가 노론에 비유되곤 했다는 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세조를 전두환에 빗대거나 조선의 붕당을 근대적 정당에 견주기도 하지만, 어느 쪽을 옹호하든 왕과 사대부의 대립이란 도식은 아직까지 꽤나 사랑받고 있는 셈이다.

 

난 예전엔 이런 비유가 비역사적이라고 여겼지만, 최근엔 생각이 바뀌었다. “조선시대 공론정치는 역시 훌륭해!”보다는 근대 의회정치가 그렇게까지 대단해?” 정도의 마음이랄까?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에 따르면, 근대 이전까지 서구에서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은 민주정보다는 과두정이나 귀족정과 친화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역사적으로만 그랬던 게 아니다. 선거제는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공직을 맡을 가능성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못하고, 후보의 구조적, 선천적 탁월성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마넹은 중국의 과거제는 똑같이 공직을 불평등하게 분배할지언정 최소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은 존재했다는 점에서 선거제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 능력주의와 공정담론에 가해지는 날카로운 비판이나 경화거족의 신분세습 수단으로 전락했던 조선후기 과거제의 변질에서 알 수 있듯, 과거제는 선거제만큼이나 귀족주의적이다. 즉 선거제와 과거제는 기능적으로그리 다르지 않으며, 사대부와 국회의원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귀족의 성격을 갖고 있다.

 

아시아의 몇 안 되는 공화국이자 완전한 민주주의국가요, 아직도 평등주의적 정서가 강한 한국인들 입장에선 이런 주장이 마뜩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의 귀족이란 비교적 넓은 의미로, 사람들이 흔히 귀족하면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는 엘리트에 가깝다. (써놓고 나니 조 모 전 법무장관이 떠오르지만 어쨌든...) 그리고 능력과 덕성, 품위를 갖춘 귀족의 존재는 순수한(=대표라는 불순한 매개를 거치지 않는)’ 민주주의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지금 꽤나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승렬은 이를 정확히 알고 있다. 2세대 부르주아지, 상층 지주, 시민 등 때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는 일관되게 김성수를 (넓은 의미의) 귀족으로 정의한다. 다만 이승렬은 조선왕조에서는 독립적인 귀족이 존재하기 어려웠다”(p.629.)고 이야기하며 김성수를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특수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조선시대 양반이 귀족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노비가 노예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은이가 조선말~대한제국기 정치세력을 농업관료제로 퉁치지 말고 좀 더 섬세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형성은 굉장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귀족의 존재를 부각한다. 심지어 이승렬은 왕과 농민을 거대한 보수적 반동적 흐름의 두 축”(p.627.)이라고까지 표현하며 귀족의 역사적 의의를 옹호한다. 이는 단순히 김성수와 의회정치에 대한 옹호뿐 아니라 민족주의 사학과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의미 역시 담고 있다.

 

가령 이승렬은 한국 역사학계의 거인 강만길이 국민주권에 대해 이중 잣대를 취한다고 지적한다. 똑같이 왕권강화를 목표로 했음에도 대한제국기는 주권이 황제에게 있었다는 이유로 근대로 규정하지 않는 반면, 조선 정조 대는 왕권과 민중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었다며 한국의 중세에서 가장 근대 지향적이었던 시기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강만길의 학문적 불철저함에 대한 비판을 넘어, 민족주의 사학 혹은 민중사학이 마주한 보다 근본적인 곤경을 겨냥한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면서도 그들의 일반의지를 실현할 주체로서 왕이나 대통령 같은 최고지도자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뉴라이트에 대한 이승렬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다만 그가 뉴라이트 진영이 국부로 내세우는 이승만을 일관되게 독재자로 규정하고, 김성수를 그에 맞선 의회주의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나는 사실 이영훈도 일종의 우파 민중사학자라 생각하고, 이승만에 대한 그의 숭배에 가까운 태도 역시 귀족을 배제한 왕과 백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입장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여긴다. 이승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귀족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강조가 민족주의 사학과 뉴라이트가 공유해온 국부 숭배의 대안으로 기획되었다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실상 형성의 핵심 주장인 만큼 배링턴 무어에만 의존하지 말고 좀 더 탄탄하게 이론적 근거를 갖췄다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

 

머리말에서 이승렬은 이 책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음에도 분열과 대립은 오히려 더욱 심해진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형성은 명백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책이고, 이승렬은 우리에게 김성수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은 자율적 부르주아지이자 왕/대통령과 백성/민중 사이에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옹호한 귀족/의회주의자로 새롭게 그려진다. 김성수가 한국 보수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진보성향의 한겨레형성에 주목한 둘 뿐인 신문사라는 사실은 퍽 고무적이다. 보수 진영의 말 걸기에 진보 진영이 응답한 것이다. 이 문제적인 책을 계기삼아 진보와 보수가 합리적 소통의 공간을 넓혀가기를 바라는 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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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평전 - 근대이행기 조선 정치사의 이면 고종시대 인물연구 총서
김종학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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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은 조선정치사의 파천황적 존재다. 왕이 아니면서 왕의 아비가 된 자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살아있는 대원군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정작 어떠한 공식 직함도 갖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막대한 권력으로 벌인 일들이다. 경복궁 중건, 호포제, 사창제, 서원 철폐 등 그때까지 아무도 손대지 못하던 수백 년 된 적폐들을 과감하게 해치웠다. 대원군의 안티만큼이나 팬 또한 많은 이유 역시 역사상 이런 사이다를 보여준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특히 입만 열면 개혁을 외치면서 정작 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혹은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은 더더욱.

 

  흥미로운 건 대원군에 대한 이런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그의 정치사상을 조명하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존 질서를 죄다 무시하고 깨부수는 파괴의 화신이란 이미지가 너무 강한 탓이다. 진짜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자라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치 않겠다!”는 말을 대원군이 했다고 믿는다는 건 퍽 의미심장하다. 유교문명의 창시자인 공자조차 가만두지 않겠다는 사람이거늘, 사상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는 심리렸다.

 

  하지만 공자를 거스른다고 해서 사상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공자를 거스르기 위해서라도, 사상은 필요하다. 특히 그곳이 유교 탈레반의 나라인 조선이라면 더더욱. 김종학의 흥선대원군 평전(이하 평전)을 펼쳐본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권력의 원천부터 실제로 행한 일들까지 무엇 하나 정상적인게 없었던 대원군은, 어떻게 자신의 비상함을 정당화했는가? 그는 어떠한 언어를 사용해 지지자를 모으고, 적을 규정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했는가? 요컨대, 대원군의 정치사상은 무엇인가? 이게 나의 질문이었다.

 

  안타깝게도, 평전은 대원군의 정치사상이나 그의 권력에 당위를 부여한 정치사상적 토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은이는 시종일관 대원군을 정치적 이념과 정치철학이 부재한 권력욕의 화신”(p.249.)으로 묘사한다. 기존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이다. 실제로도 지은이는 황현의 오하기문이나 매천야록, 박은식의 한국통사등 지금까지 숱하게 쓰였던 자료들에 의존한다. 그런 만큼 대원군에 대한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대원군에게 정말 정치사상 따윈 없었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게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의 정치사상은 없어도, 정치사상으로서의 대원군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당대의 맥락, 구체적으로 정조부터 시작해 세도정치를 거치며 특정 개인 혹은 집단에 권력이 과도하게 쏠린 상황에서 마침내 대원군이 기회를 잡은 과정을 정치사상사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에겐 비약이라며 욕먹겠지만, 다른 어떤 학문보다 비평의 성격이 강한 사상사 연구자라면 그런 과감함은 오히려 미덕일 수 있다. 당장 우리시대 최고의 평론가인 김영민의 전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실제로 얼마 전 출간한 태종처럼 승부하라에서 정치사상사 연구자 박홍규는 한비자나 마키아벨리 등을 사상적 도구로 삼아 태종을 새롭게 그려낸다. 하물며 역사학자인 후지이 다케시조차 푸코를 끌어와 이승만과 박정희의 통치방식을 나병모델(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페스트모델(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로 구분했다. (여담이지만, 후지이 다케시는 단편적인 사실들에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는, 속된 말로 야마 잡는능력이 정말 탁월했던 역사가라고 생각한다. 정작 그가 일본에서 석사논문을 마치기도 전에 한국으로 건너와 수업을 청강할 정도로 좋아했다던 지도교수 서중석이 실증의 역사가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퍽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아직도 후지이의 칼럼 모음집 무명의 말들을 가끔 펼쳐보곤 하는데, 그의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나는 너무나 안타깝다.)

 

  김종학 역시 대원군을 정치사상사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작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이하 개화당) 말미에서 그는 대원군을 일종의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했다.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모두 무너진, 마치 자연상태와도 같았던 조선 말기에 오직 대원군만이 새로운 질서와 권위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평전에서 자세히 설명하듯 (사실 이게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다) 실각 이후에도 개화당, 친청파, 일본, , 동학군에 이르기까지 이념도 지향도 제각각인 세력들이 대원군의 호랑이 같은 기세를 빌리려 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틀을 만들어놓고도, 김종학은 정작 평전에선 대원군을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리바이어던의 자리를 가져간 사람은 청일전쟁 이후 주조선 일본 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다. 지은이는 수틀리면 아무나 픽픽 죽여버리는 대원군, 수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하는 명성왕후, 독재자가 될 강인한 기질도 없으면서 독재자가 되고 싶어하는 박영효가 대립하는 혼란상을 종식시킬 사람은 오직 이노우에뿐이라는 윤치호의 한탄을 두 번이나 인용한다. 이렇게 대원군은 조정자에서 플레이어로 격하되고 만다. 결국 지은이는 사상없음의 정치사상이라는 역설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혹은 아예 도전하지 않았거나.

 

  『평전을 펼치며 기대했던 것 또 하나는, 조선의 정치시스템에 대한 지은이의 구체적인 평가였다. 김종학의 전작 개화당은 갑신정변이 단순히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친 쿠데타가 아니라 신분차별 철폐를 위한 혁명이었으며, 그 주축은 박제가로부터 이어지는 중인과 상인 세력이었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킨 문제작이다. 지은이는 학계의 김옥균이 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는데, 막상 책을 읽어보면 과연 그 정도인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지은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물증인 역관 오경석과 의원 유대치, 승려 이동인이 조기에 퇴장하고 결국 정변은 김옥균과 박영효라는 양반 도련님들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중인과 상인이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했다면, 갑신정변은 양반들 권력다툼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다소 무리해가면서까지 갑신정변을 중인과 상인을 위한 혁명으로 규정하는 만큼, 김종학이 조선왕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무능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는 놀랄 만큼 유능하고 단결도 잘 되는 양반세력이라는 지은이의 말은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김종학은 아예 개화파의 계보를 박지원-박규수-김홍집·김윤식으로 이어지는 체제수호파와 박제가-오경석-김옥균으로 이어지는 체제변혁파로 분리하기까지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양반 신분제를 질타하면서도 김종학은 왕권과 신권이 견제와 균형을 이룬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 또한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공저자로 참여한 다시 국가를 묻는다에서 잘 느낄 수 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그때는 왜 맞았고 지금은 왜 틀린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개화당을 읽으면 정작 책의 메인 빌런으로 설정된 친청파 엘리트, 대표적으로 김윤식이 오히려 진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건 그러한 설명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청에 의존하는 수구세력이라기보다는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을 근대적으로 변용하려는 합리적 보수로 그려진다.

 

 (김종학과 마찬가지로 개화기로 박사논문을 쓴 유바다 역시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책봉관계가 근대 서구의 국제법으로도 정당화될 근거가 있었음을, 즉 서구와 동아시아, 전통과 근대가 꼭 충돌하지만은 않았음을 밝혔으면서도 정작 조선에 주어진 유일한 길은 김옥균의 완전독립밖에 없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어째서 다들 이리도 김옥균을 좋아하는 것일까? 마성의 사나이, 김옥균!)

 

  『평전에서도 김종학은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을 무너뜨린 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개화당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요컨대, 대원군은 친청파 엘리트보다는 오히려 개화당과 함께 묶일법한 존재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대원군의 호랑이 같은 기세를 빌리려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기에 질문해본다. 지은이는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을 긍정하는가, 아니면 부정하는가? 지나친 도식화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지은이의 총론이 워낙 칼칼하고 선명한 만큼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특히 그간 조선왕조의 역사적 성취로 평가받았던 군신간의 견제와 균형이 최근엔 하물며 군주조차 손댈 수 없었던 양반 엘리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장치로 평가받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 질문에 대한 김종학의 대답은 김옥균이나 대원군보다는, 오히려 김윤식에 대한 평가로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간 김윤식은 친청파 엘리트 중 비교적 많이 다뤄지긴 했으나, 그를 조명한건 대부분 일본 학자들이었다. 그런 만큼 김윤식은 소국주의 내셔널리즘(기무라 간)”, “조공체제와 국제법 모두로부터 이득을 얻겠다는 양득론자(오카모토 다카시)”, “유교를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근대에 도달한 선각자(조경달)” , 일본과는 다른 조선/한국적 특수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소비되었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김윤식에 대한 단행본을 쓴 국제정치사상 연구자 장인성 역시 그를 승출(乘出)의 사상가 요코이 쇼난과는 대조되는 근수(謹守)의 사상가로 정의했다. (장인성이 활동시기로 보나 역할로 보나 쇼난의 짝꿍에 훨씬 어울리는 박규수 대신 김윤식을 고른 건 조경달에 대한 비판보다도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기획은 아니었을까?)

 

  김종학이 그려내는 김윤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청에서 임오군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청군 전함과 함께 귀국해 대원군을 납치할 만큼 노회했고, 고종에게 자신이 대신 써준 반성문을 읽히게 할 정도로 거침없었으며, 무력으로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에게 국제법을 근거로 그 부당함을 설파할 만큼 주도면밀했다. “박규수 스쿨의 베드로-자로이자 청질서 아래에서의 근대화를 지향하던 속국자주(屬國自主)의 정치가, 전통적인 군신공치(君臣共治)의 현대화를 도모한 합리적 보수의 면모를 모두 갖고 있었던 야누스적 인물이었다. 치렁치렁한 수염을 달고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만년의 사진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김윤식의 다면성을 포착한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김종학 밖에 없다. (굽시니스트도 있지만 그는 김종학의 개화당을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했다.) 자신의 지향과는 정 반대편에 서있는 김윤식을, 그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조선왕조의 통치시스템, 그리고 이를 깨부수고자 한 대원군과 개화당에 대한 김종학의 생각은 김윤식 평전이 나온 뒤에야 선명히 드러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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