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 말하며 탈존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을 무한한 자유를 가진 존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르트르의 명제를 변용해 보자면 무한한 자유는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무한한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1)

 

대개 그 억압은 절대권력으로부터 기인하기 마련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권력의 주체는 대개 국가라는 허울좋은 가면을 쓴 정치권력이었다.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알튀세르의 말처럼 우리는 이러한 악업적 구조 속에서 국가라는 권력에 의해,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구축되어 있는 사회구조의 어떤 한 가지 배역을 떠 맡게 되며 살아간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지상의 노래>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동시에 저주스럽도록 사회구조에 얽매인 사람들의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속죄의식을 다룬 이야기다.

 

형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부채감으로 형의 유고를 마무리하는 강상호, 박중위를 칼로 찌르고, 누나를 욕망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후 순례의 길을 떠난 후 그리고 세속적 권력욕으로 인해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순례길에 나선 한정효, 죽기 전 헤브론성의 집단 학살에 대해 털어놓은 장의 고백들. 등장인물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상처 받은(혹은 희생된) 타자들에 대한 속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브론성이라 불리는 오지의 종교공동체는 이들에게 속죄를 위한 장소인 동시에 속세의 부당함에서 자신을 격리시켜 저 너머의 새로운 세상으로 가려 했던 순례의 장소였다. 현실에 절망해 신화에 기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용서와 속죄를 위해 동시에 저 너머의 세상을 위해 이곳에 살면서 저곳을 버렸지만, ‘저곳의 권력은 그들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들에겐 죄의식이란 최소한의 윤리란 게 존재했지만, 권력은 죄의식조차 없는 무생물이었다. 마침내 그 무생물은 천산 공동체를 침범했고, 파괴했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였다.

 

세상은 크고 무섭고 힘이 세요. 언제나 그랬어요.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중략)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어느 시내나 힘이 세고 어디서나 무자비해요.” -292-

 

그들은 이렇게 강제로 세상 밖으로 다시 소환되었지만, 권력자들이 억압 할 수 있는 것은 육체라는 껍데기뿐이었다. 더 이상 그들의 정신은 쉽게 강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이 삶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린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의 <에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

 

그렇게 그들은 세상을 버렸고,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을 간섭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부정되었지만, 그전에 세상은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전에 그들은 세상을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버려지는 것이 그들이 세상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간섭하지 않았다.” -346-

 

1) 책 속 작품해설 인용,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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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자신의 저작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시대는 냉소의 시대가 되었다

 

냉소주의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계속 행동한다.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욕망하라고 부추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냉소주의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말하는 자유란 사실상 돈이 있어야 가능한 주입된, 강제된 자유다.

니체가 말한 낙타의 삶이 이런 것 아닐까? 기존의 관습, 체계가 주입한 강제된 자유를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짊어지고 사니깐 말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출발선이 다른 자본주의라는 게임에서 체제가 요구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주체로 살아가지만 도착 순서는 정해져 있다. 우리도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만 혹여나 하는 기대감에 체제 내 규칙하에 살아간다.

 

냉소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현재, 위선이란 행위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 기제다. 자신의 상품성을 타자와 비교 측정하여 나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려는 대비책인 셈이다.

 

이러한 위선은 우리 실생활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저 사람은 지방대를 나왔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나보단 아래야라며 나의 우월감을 드러내거나,그 사람은 명문대를 나왔으니 나보다 인정받겠군이라며 체념하며, 내 상품성의 순위를 확인하는 것이 그 예다. 즉 위선이란 행위는 자본주의라는 체계에서 자신의 생존의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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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전 한 방송비평상을 염두해 두고 쓴 <6시 내 고향> 비평.

남들이 절대 쓰지 않는 특이한 소재라서 마음속으로 가작이라도 기대했건만 보기 좋게 탈락. 이거 
쓰려고 6시 내고향 두 달치는 본 것 같음. 

하지만 내가 지금 봐도 글에 진정성이 안 느껴짐! 우연히 발견한 기념으로 업로드~

 

농어촌당 대표 <6시 내 고향>의 선전을 기대하며

- <6시 내 고향>의 현재 가치와 향후 역할 -

 

 

1. 기자님 ‘드렁허리’를 몰라요?

 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검색어 순위에 ‘드렁허리’라는 낯선 단어가 1위에 올라있어 이게 뭘까 하는 호기심에 클릭해 보았다. 곧이어 “희귀 민물고기 ‘드렁허리’ 발견”이란 제목의 기사가 떴다. 내용인즉슨 어른 팔뚝만한 길이의 미꾸라지처럼 생긴 토종 민물고기가 경남 진주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한 촌로는 칠십 평생 처음 봤다며 고개를 내저으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난 뉴스 영상에 나온 드렁허리를 보고 그놈이 어린 시절 논두렁 근처에서 즐겨 잡았던, 그러나 노린내가 나 구워먹지 못해 아쉬워했던 ‘음지’라는 징그러운 놈인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접혀 있던 댓글 주머니를 펼쳤더니, 아니나 다를까 ‘드렁허리’는 내가 알던 충청도의 ‘음지’였고 경상도의 ‘웅어’, 전라도의 ‘드랭이’였다. 댓글을 단 누리꾼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요즘도 논두렁에서 많이 잡혀 전혀 희귀한 물고기가 아니라며 기사를 폄하했다. 그 중 내 눈에 띄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기자야, 드라마만 보지 말고 6시 내 고향 좀 보고 농촌에 관심 좀 가져라”


2. 19년 ‘농어촌당’ 대표 <6시 내 고향>

 드렁허리를 모르는 기자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농어촌과 그 안의 삶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다. 지난 수십 년 경제성장의 부작용과 피해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우리지만, 속도와 효율성을 여전히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성장을 목표로 향해 눈과 귀를 닫고 전진하고 있다. 느림과 비효율성으로 표징되는 농촌은 그래서 스피드한 우리에게서 비켜나 있다.

 ‘TV’라는 사회에서도 농어촌의 지위는 우리 삶의 그것과 비슷하다. 단시간에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눈물을 쏙 빼고, 욕망을 불살라줄 수 있는 프로그램만이 환영받는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주는, 도시적 욕망의 언저리에 있는 프로그램이 TV사회에서 주류가 된지 오래다. “속도와 자극만이 살 길이다”라는 모토를 성공적으로 주입시키며 그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다.

 쾌락적 욕망만을 재생산하는 주류에 대항하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1991년 5월 이후 ‘농어촌당’을 이끌어 온 <6시 내 고향>이다. TV사회의 비주류로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6시 내 고향>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이제, 다소 촌스럽지만 한번 빠져 들면 나오기 힘든 이 우직한 프로그램의 매력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3. 다양한 장르의 혼재, 이게 진짜 버라이어티다

 매일 아침 피곤에 허덕이며, 경쟁에 뒤쳐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도시인에게 고향의 포근함과 느림의 미학을 전해주는 <6시 내 고향>은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단지 <6시 내 고향> 안에 포근함과 느림만 존재했다면 19년간의 방영이 가능했을까?  과연 무슨 매력이 있기에 19년이란 장시간 동안 사랑을 받아온 걸까?

 <6시 내 고향>은 어느 프로그램도 따라올 수 없는 가치 있는 정보와 내용을 풍부한 장르로 녹여내며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1) 내 안에 ‘News’ 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6시 내 고향>의 주된 내용은 지역 내 특산물과 먹을거리 소개이다. 근래 신설된 수많은 맛집 소개 프로그램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 전혀 ‘New’하지 않은 음식점 홍보에만 매달리고 있는 현재, <6시 내 고향>은 어느 프로그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하고 신선한 정보를 전달한다.

 매주 월요일에 방송되는 ‘고향식객’은 각 지방에서 전래되어 오지만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통 먹을거리를 소개하는 코너다. 지난 4월 6일 자 이 코너에 소개된 ‘연사자반’은 찹쌀을 삭혀 반찬으로 만드는 전남 남원에서만 유래되어 오는 음식으로 만드는 데만 한 달이 걸리는 우리 고유의 슬로우 푸드이자 로컬 푸드다. 4월 2일 자 ‘건강이 탱클탱클’ 코너에 소개된 충남 청양의 ‘맥문동’이라는 약초 역시 <6시 내 고향>이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없는 특산물이었다. 그 이름마저 직설적인 월요일 고정 코너 ‘고향 늬우스’는 사소한 것 같지만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고 있는 읍 ․ 면 단위의 뉴스를 전달하며 시청자들에게 소소한 재미와 지역 정보를 동시에 전달해 준다.

 이뿐만 아니라 친환경 농법으로 키운 참외(4월 7일 자) 등과 같은 내용은 농어민들의 실질적인 소득증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영농정보이다. 이는 특산물 정보를 얻는 도시인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넘어 농어민을 위한 정보 제공 프로그램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처럼<6시 내 고향>에서는 9시 뉴스에서는 볼 수 없는 지역 공동체 뉴스가 담겨 있고, 사라져 가는 우리 특산물과 건강에 도움이 되는 로컬 푸드에 대한 정보가 듬뿍 담겨 있는 ‘6시 News’다.


 2) 내 안에 ‘연예오락’ 있다

 무엇보다 <6시 내 고향>의 핵심은 재미다. 억지웃음은 찾아볼 수 없다. 코너 시작 전 책읽  듯 대사를 읊는 지역주민들의 어색한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천진한 웃음을 유발한다. 개그맨 유재석의 순발력에 비견되는 김종하, 배동성, 이병철 리포터의 능청스러움과 지역주민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친화력은 <6시 내 고향>을 그 어떤 오락 프로그램보다 더 유쾌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와 더불어 ‘장터 청백전’, ‘활력충전 9988’ 등의 코너에서 보여 온 매끄러운 구성력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볼 수 있는 연예오락 프로그램으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지역 시장을 돌며 시장 상인들의 재능과 끼를 엿보는 ‘장터 배 장사대회’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느낄 수 없는 현장감이 시장 상인들의 활력과 더해져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취지를 그대로 살린 ‘활력충전 9988’은 부부간, 이웃간 화합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게임을 선보이며 건강한 웃음을 유발한다.


 3) 내 안에 ‘시사교양’ 있다

 <6시 내 고향> 안에는 역사 다큐가 있었고, 자연 다큐가 있었으며, 가슴 찡한 휴먼 다큐도 존재했다. 경북 예천 석동영 소나무(4월 2일 자)는 비록 한 그루의 나무지만 상속받은 토지면적이 6,600제곱미터에 달해 세금도 내고 지역 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사연을 가진 기이한 소나무이다. 이와 같은 향토역사를 소개함으로써 <6시 내 고향>은 거시적인 역사는 아니지만 점점 잊혀져가는 지역 내 향토역사의 정보를 전달하는 문화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각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 숲길과 그곳의 풍광을 고스란히 전달했던 ‘강산별곡’, 가슴 아픈 사연을 가졌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 고향 희망가요> 등의 코너는 신선한 정보와 재미를 넘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4) 어디에도 없는 ‘공동체’가 있다

 갈수록 개인화되는 도시 사회에는 거의 사라져버린, 하지만 여전히 농어촌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공동체의식이다. 이는 농어촌을, 아니 우리 사회를 현재까지 있게 한 가장 큰 원천이자 에너지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바로 관계의 힘이다. 예전부터 우리 고향마을에는 공동체가 살아 있었고, 이 상호부조 덕분에 먹을 게 부족해 힘든 시절에도 굶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리를 얻어먹을 수 있는 옆집 갓난이네가 있었고, 가족이 아니어도 선뜻 모내기를 도와주었던 윗동네 개똥이네가 있었다.

 <6시 내 고향>에는 어느 프로그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와 같은 우리 고향마을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전통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가덕도의 숭어들이 잡이(4월 9일 자)를 할 때는 조명을 비춰주는 사람과 몸을 부대끼며 망을 끌어올리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필요하다.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공생해야만 가능한 작업방식인 것이다.

 <6시 내 고향>에서 다뤄지는 수많은 코너들의 기저에는 ‘공동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집단의 ‘정’이란 가치 말이다.


4. 지속가능한 우리 고향을 위하여

 1) 대표님에겐 ‘생태적 감수성’이 부족해요

 이처럼 <6시 내 고향>은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 있고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흥과 활력이 넘쳐나는 농어촌의 포근한 모습을 충실히 전달해왔다. 이로 인해 심신에 지친 우리 도시인들에게는 큰 위안과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6시 내 고향>에 비춰지듯 우리의 농어촌은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할까? 그렇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속도’와 ‘성장’이라는 주술과 망령이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깃든지 오래다.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매끈한 특산물을 생산하고, 작농 기간을 단축시켜 소득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성장 단계별로 수많은 농약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논밭이 파괴되고 있으며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동식물은 죽어가고 있다. 우리 시골의 풍경은 ‘발전이 덜된 지역’으로 등식화되어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6시 내 고향>에서는 이렇게 파괴되고 변해가는 농어촌 현실은 찾아 볼 수 없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어떤 코너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6시 내 고향>의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기본 제작방침 중 한 가지가 “농어촌의 현안과 변모하는 모습, 바람직한 발전방향 제시”다. 이 제작방침처럼 미래지향적이며 지속가능한 농어촌을 원한다면 농민들에 의해 벌어지는 농촌 내 환경오염 문제, 지역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파괴되어 가는 농어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이 <6시 내 고향>에는 필요하다. 이는 곧 파괴되어 가는 우리 농어촌 현실에 눈 감지 않고, 누구의 편도 아닌 자연의 편에 선 ‘생태적 감수성’을 가진 프로그램으로서의 역할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2) ‘농어민을 위한’ 공약을 보여주세요

 농어업이 직업으로서 매력을 잃은 지는 오래며, 농어촌에 가면 60~70대 노년층이 마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제 그다지 새롭지 않다. 끈끈했던 공동체 의식 역시 예전 같지 않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20~30년 후의 우리 농어촌은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지금 농어촌은 생존이라는 심각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6시 내 고향>의 임무가 더욱 막중해지는 이유다. 도시민을 위한 향수자극 프로그램을 넘어 농어민을 위한 대안제시 프로그램으로서의 역할이 요구된다. 농어촌의 적나라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지역 농어업이 발전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느슨해진 공동체 회복을 모색해야 한다.

 대안 제시는 단순히 농어촌이 잘 살 수 있는, 소득증대를 위한 정보제공의 차원에서 그쳐선 안 된다. 유기농법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농업을 발전시키고, 지역공동체를 활용하여 어떻게 하면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지 ‘how'에 대한 답이 구체적으로 나와야 한다. 제작진은 전문가들과 머리를 싸매고 심도 높은 토론을 거쳐 다방면으로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농업전문가, 생태학자, 농민이 함께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유기농 농법교육 코너, 지역 특산물의 효율적 유통판로 개척을 위한 유통전문 코너, 지역관광 상품 개발을 위한 컨설팅 등의 전문 코너가 필요할 것이다. 

 느슨해진 지역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역할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전히 끈끈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마을 소개 코너, 지역 내 갈등을 찾아 해결을 모색해주는 ‘공동체 회복 프로젝트’ 코너 등이 그 예다. 

 <6시 내 고향>은 농어촌을 떠난 도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젠 농어민의, 농어민에 의한, 농어민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서의 역할강화가 필요하다. 농어민이 잘 살고 행복할 때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도시민 또한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시민을 위한 프로그램과 농어민을 위한 프로그램 사이의 역할갈등을 끝내야 한다.

 이처럼 <6시 내 고향>은 사라져가는 우리 농어촌의 복원을 목표로 실현가능한 ‘공약’을 제시할 수 있는 농어촌 전문 프로그램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현재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19년 ‘농어촌당’ 대표 <6시 내 고향>이 유일해 보인다. 대표님의 선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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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지만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며,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어떠한 실재와도 무방하며, 그 자체의 순수한 시뮬라크르다." (보드리야르,<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바야흐로 이미지의 시대이자, 모방의 시대다. 어디까지가 진짜 나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한 가상현실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대표적인 가상 현실 세계인 인터넷 공간에서는 간단한 포토샵으로 얼짱으로 재탄생할 수 있으며, 뛰어난 검색 능력과 교묘한 짜깁기로 탁월한 문장가로 거듭날 수 있다.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들에게 이러한 가상 현실에서의 페르소나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의 위선을 감추고 개념 연예인으로 거듭나기도 하며, 의미 없이 끼적인 멘션 하나로 인해 무개념 연예인으로 낙인 찍히는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김장훈처럼 수억원을 기부하고, 차인표처럼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실체가 어찌되었든 간에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SNS를 활용해 개념을 탑재한 연예인으로 대중의 인식 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국가에 충성하는 멘션은 필수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도구다"라는 인식이 대한민국에 자리잡기에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37년 간 나라를 빼앗겼던 기억 때문인지, "국가에 대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라며 개인보다는 국가가 항상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끊임없이 주입시킨 지난 반세기 간 교육 때문인지, 우리에게 국가는 민족과 동일시되며 신성시 되기까지 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이 주류로 자리잡아 공식적으로 우리는 세계 시민의 지위를 획득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의 국가주의는 점점 강화되는 모양새다.

현실에서 생산과 사유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국가주의처럼 자신의 자존감을 쉽게 높여 줄 수 있는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탓이 커 보인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젊은 네티즌들을 공략하는 게 첫번 째 포인트다. 국가의 이익(국민의 이익이 아니다)에 반하는 글은 연예인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반드시 국가에 호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국가의 행사가 있을 때 성공을 기원하는 멘션을 남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군사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국가와 군대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래서 남자 연예인에게 군대에 대한 의심/의구심은 그 어느 것보다 치명적이다. 현재 미필인 남자 연예인의 경우에는 '다른 연예인의 군 면제'등이 이슈화 되었을 때 반드시 현역으로 가겠다는 멘션 한번 정도는 날려야 의심을 사지 않는다. 여자 연예인의 경우 현충일, 국군의 날을 이용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중인 군인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은 군인 아저씨들의 지지와 네티즌의 찬사를 받는 손 쉬운 전략 중 하나다. 혹여 가끔씩 불거지는 군대 내 폭력에 대한 부정적 언사는 금물이다. 남자 연예인의 경우 병역 기피의 의심을, 여성 연예인에는 생각지도 못한 페미니스트로 오인받을 수 있다

 

둘째, 한민족에 대한 무한 애정은 드러내라.

한민족이라는 게 실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반도에 살았던 대다수 인민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수 많은 외세의 침입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일본은 이 민초들의 고통에 방점을 찍은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원죄를 가지고 있는 일본(명확하게 말하면 일본의 지배계급)이 반성의 기미도 없이 반복적으로 다케시마를 외치고 있으니, 그들을 향한 네티즌들의 분노는 일면 정당하다. 하지만 이러한 합당한 분노를 지배계급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흔히 봐 왔다. 내부의 문제를 감추고, 내부 갈등이 원인을 외부의 적에서 찾는 전략은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선 SNS를 통해 가장 만만한 일본을 타깃으로 하라.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겨냥하면 안된다. 기회를 봐야 한다. 가끔씩 터져나오는 일본 우익 정치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기사화 될 즈음 독도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는 유한 방식을 사용해라. 이러한 멘션은 특히 교포 출신의 연예인에겐 가장 효과적이다. 당신을 우리의 한민족으로 받아들이는 귀화증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최근 이슈화된 이어도 분쟁과 관련하여 중국을 비난하는 멘션도 같은 메커니즘의 한민족 사랑법이라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한류를 등에 엎고 중국, 일본 등지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분이라면 다른 방법을 활용해 보길 권한다. 괜한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셋째, 정치색을 띤 멘션은 절대 금물이다.

최근의 수많은 석학들은 현대 사회를  탈이념화된 시대라고 진단한지 오래지만, 현실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냉전의 시대 한복판에 살고 있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치열하며, 두 이념 아래 합리적 담론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이전투구의 장에서는 무색무취의 전략이 바람직하다. 사람들은 철저한 이데올로그인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그게 좌든 우든 말이다. 사람들은 진흙탕 현실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는 스크린이라는 공간에서 희로애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가상 속의 당신을 원한다. 당신이 스크린을 벗어나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올 경우 당신과 언제 거리두기를 할 지 모른다.  

이러한 연유로 만약 특정 이념적 사안이  팽팽히 대립되고 있을 경우 사안에 대한 명확한 진실이 밝혀지기 전이거나, 가치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언급을 자제해야 한다. 엉뚱하게도 종북 좌빨로 몰릴 수 있다. 정 참지 못하고 얘기하고 싶다면 최대한 정제된 보수의 언어(비폭력, 법질서 확립 등)가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발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빨갱이라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과 같이 정권 말 레임덕이 가속화되고 정부에 대한 비판의 주류를 이룰 때는 보수의 언어가 자칫 현 정권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 레임덕 정권의 명백한 실정에 대한 비아냥 섞인 멘션은 적극 활용해도 좋다.

 

넷째,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것 같은) 멘션을 시의 적절하게 사용하라.

외모 뿐만 아니라 학벌도 경쟁력인 동시에 권력인 시대다. 판타지 스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다. 돌이켜 보면 학벌이 좋은 연예인 중 실제 그의 인문학적 교양과 학식과는 별개로 나쁜 결말에 이른 사람을 흔치 않다. 현실에서는 반대급부의 사례가 비일비재하지만 배운 사람에게 도덕성에도 후한 점수를 주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뛰어난 학벌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보가 차다 못해 넘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뉴스 기사를 통해 정치/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고,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통해 우리 시대의 키워드가 뭔지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라. 특히 베스트셀러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교양을 가장 쉽게 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긍정의 바이러스를 발설하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멘션은 그 중 가장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위인이나 고인이 된 당대의 지식인/종교인의 기일에 맞춰 그들을 추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교양 멘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당신은 교양을 갖춘 연예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런 류의 메시지를 담은 SNS 멘션을 잘 활용하면, 기사거리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기자들은 자신들의 미디어를 활용해 당신을 시나브로 개념 연예인 반열에 올려놓을 것이다

 

*장강명, <표백>, p197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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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책들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점은 타고난 스토리텔링 능력이 없다면, 그 능력을 충분히 보완해줄 수 있는 극적인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     

 

1.  내 청춘의 감옥/ 이건범 지음/ 상상너머 /11년 6월

 

 

 

 

 

 

 

  

2. 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문학 동네 /11년 5월

 

 

 

 

 

 

 

3. 표백/ 장강명 지음/ 한겨레 출판 / 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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