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 말하며 탈존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을 무한한 자유를 가진 존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르트르의 명제를 변용해 보자면 무한한 자유는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무한한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1)
대개 그 억압은 절대권력으로부터 기인하기 마련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권력의 주체는 대개 국가라는 허울좋은 가면을 쓴 정치권력이었다.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알튀세르의 말처럼 우리는 이러한 악업적 구조 속에서 국가라는 권력에 의해,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구축되어 있는 사회구조의 어떤 한 가지 배역을 떠 맡게 되며 살아간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지상의 노래>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동시에 저주스럽도록 사회구조에 얽매인 사람들의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속죄의식을 다룬 이야기다.
형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부채감으로 형의 유고를 마무리하는 강상호, 박중위를 칼로 찌르고, 누나를 욕망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후 순례의 길을 떠난 후 그리고 세속적 권력욕으로 인해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순례길에 나선 한정효, 죽기 전 헤브론성의 집단 학살에 대해 털어놓은 장의 고백들. 등장인물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상처 받은(혹은 희생된) 타자들에 대한 속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브론성’이라 불리는 오지의 종교공동체는 이들에게 속죄를 위한 장소인 동시에 속세의 부당함에서 자신을 격리시켜 저 너머의 새로운 세상으로 가려 했던 순례의 장소였다. 현실에 절망해 신화에 기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용서와 속죄를 위해 동시에 저 너머의 세상을 위해 ‘이곳’에 살면서 ‘저곳’을 버렸지만, ‘저곳’의 권력은 그들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들에겐 죄의식이란 최소한의 윤리란 게 존재했지만, 권력은 죄의식조차 없는 무생물이었다. 마침내 그 무생물은 ‘천산 공동체’를 침범했고, 파괴했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였다.
“세상은 크고 무섭고 힘이 세요. 언제나 그랬어요.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중략)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어느 시내나 힘이 세고 어디서나 무자비해요.” -292쪽-
그들은 이렇게 강제로 세상 밖으로 다시 소환되었지만, 권력자들이 억압 할 수 있는 것은 육체라는 껍데기뿐이었다. 더 이상 그들의 정신은 쉽게 강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이 삶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린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의 <에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
그렇게 그들은 세상을 버렸고,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을 간섭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부정되었지만, 그전에 세상은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전에 그들은 세상을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버려지는 것이 그들이 세상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간섭하지 않았다.” -346쪽-
1) 책 속 작품해설 인용, -3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