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뜨거웠다. 부끄러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숨이 멈추지 않았으며, 표정은 일그러졌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접한 어느 영화 담당 기자는 "영화 상영시간 내내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는데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얻어 터진 기분이었다. 

<경계도시 2>를 보는 내내 난 우리 사회의 미숙성함에 놀랐으며 이 때문에 수치스러웠다. 그 수치스러움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것이었으며,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기 전 한국 사회의 성숙함에 대해 걸었던 기대는, 영화를 보기 전 내가 했던 한국사회에 대한 일말의 기대와 비슷했다. 하지만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일제 시대의 사생아 <국가보안법>과 보수정당과 보수 언론에 의해 진보적 철학자에서 한 순간에 '김철수'라는 거물 간첩으로 추락한 송두율 교수는 진보와 보수가 투쟁하는 집단 광기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성숙함에 대한 실망에 몸서리쳤다. 영화 상영 시작과 동시에 한국 사회를 향한 나의 기대도 처참히 무너졌다.   

누구보다 레드 콤플렉스에 자유롭다고 자부해왔던 나지만, 나 또한 2003년 당시 송두율 교수가 김철수라는 것에 실망했으며, 노동당 가입은 법적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국 전 그를 옹호하던 진보 인사들이 그가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을 실망하며 그에게 전향을 강권하고, 개인이 아닌 진보 집단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2003년의 내가 송두율 교수에게 바랐던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를 사형의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어느 보수 사내의 일갈은 2003년 나의 생각보다 조금, 아주 조금 과격할 뿐이다. 나 또한 레드 바이러스에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한국사회의 일개 우매한 개인이라는 쓴 웃음이 나왔다. 

북한이 적인 동시에 적이 아닌 아이니러한 상황. 친북=진보, 반북=보수라는 어처구니 없는 도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   

7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는 그 당시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국방부 불온도서 선정 사건, 최근의 방문진 이사장의 좌빨 척결 논란, 집권여당 대표의 봉은사 직영 관여 논란까지. 철 지난 이데올로기는 현재진행형이며 여전히 유효하다. 지배세력은 여전히 '좌빨', '친북'등의 언어적 레토릭으로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있으며, 10년 전, 아니 20년 전의 이 철 지난 수법은 여전히 가장 잘 먹히는 전략 중의 전략이다. 이 비상식적인 레토릭에 농락당하는 우리는 레드 콤플렉스의 피의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언제쯤 우리는 이러한 말장난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최근 러시아의 한국 유학생들을 피습한 러시아 스킨헤드가 떠오른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 인종에 무자비한 폭행과 살인을 저지르는 스킨헤드들. 사상의 색깔이 다른다는 이유로 법적 응징과 무자비한 언어적 폭력을 저지르며 사회적 사형을 선고하는 한국 사회.  

스킨헤드와 한국사회는 무엇이 다른가? 차이가 있다면 스킨헤드 그들이 좀 더 과격할 뿐.

PS. <경계도시 2>의 압권은 사건의 관찰자를 넘어 이미 게임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언론의 행태다. 한 때 잠시 마음에 품었던 직업이었기에 다큐 속 기자의 모습은 나에게 실망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현상은 정지되어 있으나 언론들의 상호모방적 받아쓰기로 인해 어느새 현상은 유기체가 되어 계속해서 진화 발전한다. <경계인 재독학자 송두율>은 어느새 언론이 던져 준 엄청난 양의 기사를 먹잇감 삼아 건국 이후 최대 <거물 간첩 김철수>로 변모된다. 여론의 관심이 시들해진 후 <거물 간첩 김철수>는 법적으로 <경계인 재독학자 송두율>로 판명났으나 거의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단신으로 처리했다. 언론이 틈만 나면 사명인냥 떠벌리는 진실한 보도와 건전한 비판이란 수사가 실은 사주의 이익을 위한 자극하는 보도와 제 입맛에 맞는 비판은 아닐까? 출소 후 언론에 진실함을 호소했던 송두율 교수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설가 박민규가 100회를 맞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 역시 이전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시선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경쟁사회에서 패배한 루저에 향해 있다. 아직 읽어 보진 못했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던 전작과 달리 웃음기를 쫙 뺀듯한 작품같아 더욱 더 기대된다.(물론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도 웃음기를 녹여넣는 것이 박민규의 능력아닌가) 언제나 현실세계 속 사회적, 문화적 콘텍스트와 그물망처럼 엮여 있는 그의 작품은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다. 그나저나 그가 새롭게 구상하고 있다는 미국의 포르노그래피와 관련된 소설은 벌써부터 기대된다.

 

 

 

 

 

 

 

한겨레(10.10.08) "34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박민규씨"   

올해로 탄생 100돌을 맞은 작가 이상이 자신을 빼닮은 후배를 만났다. 단편 <아침의 문>으로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제34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박민규(42·사진)씨의 이야기다. ‘21세기의 이상’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과감한 형식 실험과 개성 넘치는 주제의식을 선보여 온 박씨는 “문학상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우리 세대의 로망이자 존경하는 작가인 이상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을 받게 된 것은 기쁘다”고 말했다. 수상을 고사할까 고민하다가 뒤늦게 나왔다는 7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였다.

2003년 장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지구영웅전설>로 한겨레문학상과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을 동시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박씨는 2007년 이효석문학상과 지난해 황순원문학상에 이어 새해 벽두에 최고 권위의 이상문학상 역시 품에 안음으로써 21세기 한국문학의 기대주임을 입증했다.

수상작 <아침의 문>은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이들이 주인공의 자취방에서 약을 나눠 먹고 동반 자살을 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다른 세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을 토하고 되살아난 주인공이 다시 목을 매 죽으려고 의자에 올랐다가,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남 몰래 낳은 아기를 죽이려는 여자를 발견하고 소리쳐 말린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사위원들(김윤식·권영민·윤후명·신경숙·권지예)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성을 근원적인 생명의 가치에 대한 파괴적인 해석을 통해 새롭게 형상화하고 있”는 점을 수상 이유로 들었다.

“세상에는 모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남 몰래 아기를 낳아서 제 손으로 죽이는 여자도 있더군요. 문득, 그 두 존재가 서로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 쓴 작품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들은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모여서 자살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어린 생명 역시 답이 안 나오는 탄생이라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 힘든데도 살아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박씨는 올해 ‘더블’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소설집을 한꺼번에 묶어 낸 뒤 역시 두 편의 장편을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이어지는 ‘80년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88 올림픽을 전후한 무렵을 배경으로 매스게임 이야기를 다룰 거구요, 또 하나는 미국을 무대로 포르노그라피의 세계를 다룰 생각입니다.” 한 달에 3주 정도는 춘천 집필실에서 책 읽고 글 쓰는 단순한 삶을 살며 1주는 집에 와서 가족들과 지낸다는 그는 “이제 등단 8년차일 뿐이기 때문에 여전히 신인이라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쓰려 한다”고 말했다.(최재봉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규항의 논리정연하며 젠체하지 않고 쉽게 쓰여진 문체를 나는 좋아하며, 그의 이러한 글쓰기 능력을 존경한다.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하진 않지만 그의 일관된 사상과 이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언행일치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한겨레 실린 그의 칼럼 하나를 싣는다. 더불어 작년 말에 실린 그의 저작 <예수전>과 그 전에 출간된 칼럼집 또한 함께 싣는다.    

 

 

 

 
 

  


민주주의의 씨앗

민주주의의 회복’이니 ‘민주세력의 연대’니,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바야흐로 민주주의라는 말의 홍수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역시 어원 그대로 ‘인민의 자기 지배’가 가장 보편적인 정의일 것이다. 인민이,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이 주인인 세상, 그게 민주주의다. 인민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건 단지 인민들이 언론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인 건 인민들이 바로 그 실제 삶에서 끝없이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 노동’은 그 가장 주요한 현실이다. 비정규 노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한국처럼 완전하게 자본의 이해만을 구현하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비정규노동엔 두 가지 의미만 존재한다. 총매출에서 노동자 임금의 비율을 최대한 줄여 자본의 몫을 최대화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과 조직력을 약화시켜 자본이 노동자를 멋대로 부릴 수 있도록 하는 것. 현재 비정규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8퍼센트인 880만인데, 임금은 정규노동자의 49퍼센트이며 노동조합 조직율은 고작 3퍼센트다. 여기에 청년 세대로 갈수록 비정규노동의 비율이 현격히 높아진다는 점을 보태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가 아니라 이미 파탄 난 상태라 할 수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자본의 탐욕 때문인가? 물론 자본은 탐욕스럽지만 탐욕은 자본의 본디 속성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그 탐욕은 어떤 식으로든 품고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의 탐욕 자체가 아니라 자본의 탐욕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다. 그걸 조정하고 관리하는 게 바로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이 자본의 편에 서면 인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적절히 제한하면 인민들의 삶이 살아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권이란 바로 자본의 탐욕을 적절히 제한하면서 인민들의 살림을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정권이다.
오늘 비정규 노동의 참상이 불과 10여년 동안 진행된 일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경이롭게 여겨지곤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가권력이 지난 10년 동안 어지간히 열심히 자본의 편에 섰다는 뜻이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 중 두 개의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의 편에 섰고 한 개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의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어떻게든 이명박의 세상에서만 빠져나가면 살 것 같은 싶은 심정이야 누가 다르랴만, 그렇다고 해서‘민주주의의 수호자를 가장한 자본의 수호자’를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인정할 순 없지 않은가?
체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우리가 지난 10년의 체험에서 분명히 배울 때, 이명박뿐 아니라 그 파렴치한 자본의 수호자들 또한 넘어서는 걸 고민할 때, 우리가 좌절과 무력감을 뿌리치고 저 너머 세상을 함께 상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얻을 것이다. (한겨레)  

<출처> : gyuhang.net by 김규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순화 시키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소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읽고 난 후 엄청난 양의 사유거리를 던져주는 소설과 그렇지 못한 소설.   

이번에 읽게 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당연 전자의 소설에 속한다. 최근에 나온 신작 '구월의 이틀'을 읽고 난 후 자꾸 장정일이란 작가의 사유세계가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아 찾아 읽게 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이상의 필모그래피를 내놓지 않고 있는 감독 중 여균동 감독과 함께 가장 후속작이 기대되는 감독인, 여하튼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언뜻 본 기억이 있는 장선우 감독의 유명한 90년대 영화의 원작이다. 중학교 시절 대학생 누나가 빌려온 비디오로 몰래 한번 본 것이 전부여서, 텍스트로 접하긴 처음인 장정일의 대표 장편 소설이다.     

 

 

 

 

 

 

 

소설가 이승우가 말했듯이 모든 소설은 결국 글쓴이의 이야기이며, 어떤 식이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누군가의 사유과 관념을 훔쳐보는 은밀함'이란 매력이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소설읽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저자인 장정일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세상을 향한 자신의 주장을 쉴새없이 내뱉는다. 저자가 독자에게 배설하고자 하는 것은 90년대 초 한국이란 현실세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던 사회적, 문화적 화두와 맞닿아있다. 저자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사회 안의 성과 권력 그리고 문학과 소설가의 사회적 역할 등의 수많은 화두를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은 표절작가란 낙인이 찍긴 삼류 소설가 <나>와 여덟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은행이라는 억압된 공간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발기부전환자 <은행원>, 어린 시절 남근주의 피해자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바지입은 여자>를 큰 축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하지만 이 세명의 등장인물을 포함한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은 결국 저자의 의견을 독자들에게 피력하는 메신저에 불과한 것이다. 시인이자 희곡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이번엔 소설이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여러 사유과 관념을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문학이 사회를 변혁 혹은 변화 시킨다는 믿음에 대하여 이는 소설가들의 자아도취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여전히 문학과 소설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여전히 믿고 있다. 다만 그가 무학의 사회적 역할에 비관적으로 답하는 것은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나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정치, 경제, 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로 흩어져 '운동권이자 인텔리'였다는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변절자들에 대한 조롱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또한 여타 소설 속의 일관된 매개체라 할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이 소설에서도 역시 화두로 던지며 세상 사람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쾌락의 자유를 주창한다. 그에겐 섹스란 초등학생이 받아쓰기 만점을 맞으면 찍어주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같으며, 삶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그 무엇이다.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사건이 뒤엉켜있고, 결말도 급진적이어서 전체적으로 다소 판타지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저자의 풍부한 사유세계와 사회문화적인 박학다식함을 엿볼 수 있는, 최근에 본 것 가운데 으뜸이 되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ps. 너무 오랜 전에,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감상했던 영화라서, 문성근(나)과 정선경(바지입은 여자)을 제외하곤 그 외의 등장인물들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은행원>은 여균동이었나?  아님 <색안경>이 여균동이었나? 암튼 다시 한번 영화를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이젠 이런 파격적이고 의식있는 영화는 안 나올 것인가? 

ps2. 소설을 보다 보니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속 이름이 선댄스다. 어라 선댄스라면 미국 최고 권위의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 아닌가? 로버트 레드포드가 후원하여 시작되었다는 그 선댄스 영화제. 그 소설 속 주인공 선댄스가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가 맞나 싶어, 박학다식하고 친절한 네이버에 물어보니 역시 맞다. 인간이란 역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사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 작은 발견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은 조금 뜸하다지만 나 어릴 적부터 이미 문단문학계의 핫이슈로 그 지위를 굳건히 한 장정일의 장편 소설이다. 90년대에는 나름 신세대 축에 속했던 나에게 장정일의 문학은 ‘텍스트’가 아니라 ‘영상’으로 기억된다. 중학교 시절 대학생 누나가 빌려온 비디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정선경의 엉덩이로 추억되고, 대학 시절 P2P사이트에 불법 다운로드한 무삭제판 ‘거짓말’ 김태연의 교복으로 회고된다. 
 

 

 

 

 

 

 

 

 

 

 

 

 이전 소설 ‘보트하우스’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소설에서도 저자는 위선과 욕망으로 가득 찬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소설 속 ‘그’는 처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언니와 결혼한 별난 사람이지만,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은 너무나 익숙하다. 잠에 취해 간신히 일어나 출근하고, 비디오와 양파링으로 시간을 죽인다. 토할 것 같이 지루한 일상에서 쾌락과 성적 욕망만이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다. 삶의 원동력이자 근근히 버텨낼 수 있는 모르핀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서부터 시가작하지. 원죄니 윤회, 구원이니 해탈 따위가 모두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에 물들어 있다는 수작 아니야? 그들은 나약하고 비천한 인간의 심리를 담보로 잡고서 이성과 금제의 규율을 하늘 높이 세우지.”

그에게 종교란 인간의 원죄를 덮어 씌워 금욕을 강요한 악에 불과하다. 종교적 유토피아란 없다. 쾌락과 자유만이(그게 상상에 그칠지라도)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단언한다.

너희가 쾌락을 믿느냐? 장정일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답은 명확해진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내면의 수치심’은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의 그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이 위선과 욕망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자기 기만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PS. 책을 다 읽고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다.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르주아들과 기독교의 어색한 교접. 욕망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에게 종교가 웬 말인가?
쾌락적 욕망의 완성체인 자본주의, 그 세계의 맹주로 자리 잡은 부르주아와 금욕과 금제의 규율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조합. 언뜻 보면 비키니 입은 씨름 선수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비틀어 생각해 보니 그 조합은 어느 무엇보다 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부르주아들에게 기독교란 자신의 자본주의적 쾌락과 욕망에 손대기 전 (더 큰 욕망을 위해) 깨끗이 손을 씻는 성수이며, 자기 안의 욕망을 불사르기 전 행하는 거짓 구원이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쾌락 추구를 위한 수단이며 한갓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