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혹은 '파시스트'는 모호함 개념이다. 물론 말의 출처는 분명하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1883~1945) 등이 주도해 1919년 3월 23일 밀라노 산세폴크로 광장 옆에 있는 상공회의소 홀에서 결성한 최초의 파시스트 운동 단체 '이탈리아 전투 파쇼'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이란 원래 '이탈리아 전투 파쇼'의 이념을 가리키는 것이다. -10쪽
그렇다면 무솔리는 '파시즘'이라는 말을 어디서 끌어왔는가? 파시즘의 어원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최고 정무관인 콘솔 consol(집정관)의 대권 auctoritas을 상징하는 일종의 왕의 홀, 즉 '파스케스 fasces'이다. 파스케는 콘솔의 징벌권을 표상하는 도끼를 나뭇가지들로 한데 동여맨 형태였다. 따라서 파스케스 자체는 '묶음'이나 '다발'을 가르킨다. -11쪽
적어도 파시즘은 19세기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명백히 개인주의였고,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려고 했다. 반면에 파시즘은 민족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해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런 만큼 파시즘은 개인주의에 반대하는 집산주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집산주의의 또 다른 형태인 사회주의가 주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민족의 특수성 대신 계급의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국제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집산주의는 사회주의의 집산주의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파시즘이란 반 자유주의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민족주의인 것이다. -13쪽
파시즘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된 데는 파시즘의 개념이 원래부터 모호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개념이 광범위하게 남용되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다. -16쪽
(파시즘 개념 정의) 대안은 역사적으로 파시즘이라고 명확하게 명명디고 나아가 충분히 발달한 단계의 현상들, 즉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으로 대상을 한정해 파시즘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은 인간 해부가 원숭이 해부의 열쇠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과도 부합한다. -20쪽
이탈리아 파시즘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이 왜 등장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곧 파시즘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탈리아의 저명한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크로제의 명쾌한 답변이 있다. 그는 이탈리아 근대사를 자유가 점진적으로 확산된 역사로 파악하면서 파시스트들을 이 자유의 역사에 난입한 야민인들에 비유했다. -34쪽
이러한 크로체의 견해는 서로 연관된 그의 두 가지 당파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하나는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적 전통에 대한 간단없는 옹호와 긍정이다. 또 다른 크로체의 당파적 입장은 자유주의 반명제로서의 파시즘에 대한 간단없는 비판과 부정이다. -35쪽
일찍이 파시즘의 발생을 이탈리아 역사의 필연적 귀결로 파악한 이들은 다름 아닌 파시스트들이었다. 무솔리니도 파시즘이 리소르지멘토의 대업을 이어받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고 천명했다. -38 쪽
이탈리아에 앞서 국가 구성의 과정을 겪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가 보여주었듯이, 국가와 민족의 실질적인 일치화 과정은 비단 법적, 정치적 제도를 완비하는 과정을 그치지 않고 주민 전체의 의식, 가치, 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거대한 문화 혁명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파시즘은 이러한 문화 혁명의 과제가 미완으로 남겨진 역사적 상황에서 등장한 현상이었다. -43쪽
이러한 파시즘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파시즘이 풍기는 피의 냄새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철정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좌에 무혈 입성했다는 사실이다. -48쪽
2장에서 살펴본 파시즘의 기원은 이탈리아의 국가 구성 과정이라는 긴 역사적 맥락에서 작동한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난 파시즘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는 이탈리아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또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작동한 복잡한 사회적 역학 관계를 이해하는 일 또한 필수적이다. -54쪽
기실 오늘날의 많은 연구자들은 파시즘을 계급적 현상으로 환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파시즘을 거대 자본의 하수인으로 보는 견해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파시즘과 거대 자본 사이의 조화와 협력보다는 긴장과 갈등의 국면을 강조한다. -57쪽
당대의 사회주의자 치보르다는 파시즘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항한 중간 계급들의 반혁명으로 파악했다. 이는 아무런 계급적, 사회적 귀속 의식도 없는 이들이 파시즘의 주된 지지자였음을 강력히 시시한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희망의 표현이 아니라 절망의 표현이었다. -60쪽
파시스트들이 실패한 더 중요한 이유는 모든 계급에게 똑같이 무엇인가를 약속하려는 파시즘의 발상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73쪽
파시즘은 이탈리아에서 국가가 건설되었으되 민족이 국가에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 상황을 비판하면서 민족 국가의 완성을 내세우며 등장했다.이탈리아 민족 국가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이미 파시즘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탈리아 사회에 널이 유포되어 있었다. -79쪽
파시즘 이전의 독재자가 민중이 광장에 나오는 것에 본능적인 공포심을 느꼈다면, 파시스트들은 오히려 민중을 광장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집단적 열정을 조직함으로써 이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다. -83쪽
파시즘은 세속적인 대상을 숭배하고 신성화하기 위해서는 신화와 상징과 제의가 필요했다. -85쪽
재차 언급하거니와 역사를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파시즘의 몰락의 원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그 어떤 정부도 달성하지 못한 20여 년간의 장기 집권에 파시즘에 성공한 이유일 것이다. -108쪽
요컨대 이 명제는 나치즘의 병리학이 근대성의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성 자체 혹은 과잉 근대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134쪽
다시 말해서, 파시즘은 패망했고 그 뒤에 악마화되어 현대 민주주의 세계에서 추방되었지만, 파시즘을 역사의 예외 상대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파시즘이 지나간 과거의 일회적 경험이 아니라 눈 앞의 현실적인 위협일 수 있다는 말이다. -136쪽
거듭 강조하거니와, 파시즘을 일회적 현상으로 일축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공통되는 맥락 context은 유사한 현상 text이 다시 나타날 개연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수용소의 참상을 보고해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려고 한 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시대는 그 자신의 파시즘을 갖고 있다."-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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