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재생 - 공간을 넘어 삶을 바꾸는 도시 재생 이야기
정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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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생명체다. 도시가 생명체라면 도시 재생은 생명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도시설계자/ 도시학자 정석의 진단이다. 도시 재생은 크게는 국토 재생이고 작게는 지역과 마을 재생이다. 어쩌면 내 몸 재생까지 포함되는 개념이 도시 재생이다.

 

도시 재생이란 말에 나는 풍수의 비보(裨補)를 생각한다. 정동(貞洞) 해설을 할 때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이란 두보(杜甫)의 구절을 인용한 기억이 난다. 정동을 현대적 의미의 명당으로 정의하며 그곳의 건축물들이 그곳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인지 명당이기 때문에 모인 것인지 모르지만 이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정동을 이루는 아우라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정체(整體) 관념이란 것이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하나로 이어진 우리 몸의 원리를 말하는 개념이다. 정(整)은 완전성을 의미하는 integrity와 뜻이 통하는 말이다. 저자는 도시를 살리는 일에서도 정(整)과 integrity가 핵심이라 말한다.

 

1970년대 브라질 쿠리지바 시장을 역임한 자이메 레르네르(Jaime Lerner)는 큰돈을 들이는 대규모 프로젝트 대신 작은 비용으로 침을 놓듯 작은 변화를 주어 영향을 확산시키는 방식을 도시 침술(urban acupuncture)이라 표현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집을 지을 때에도 마음대로 짓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며 짓기에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집을 짓고 길을 내고 다리를 놓아 만든 도시가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조화롭게 보인다.

 

재개발이 도시를 물건이나 상품처럼 대하는 것이라면 도시재생은 생명 다루듯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저자는 도시재생이란 말보다 삶터 재생이란 말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블랙홀처럼 사람을 빼앗아가는 수도권, 대도시, 신도심보다 사람이 빠져나가는 지방, 시골, 구도심을 먼저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외연 확장보다 중요한 것은 내부 재구축이다. 삶터 되살림의 속도는 "천천히"다. 현시대는 인구가 줄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재개발은 맞지 않다. 도시재생 시대의 개발은 개발 단위를 단지에서 필지로 줄이고 새로 만드는 대신 고쳐 써야 한다. 이렇게 작은 단위로 도시를 살리면 작은 설계사무소와 동네 자영업자도 참여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에 나오는 메시지가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과일이 익는다. 차근차근 천천히.“ 차근차근 천천히와 정반대인 빨리빨리 한꺼번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지금은 개발시대가 아니다. 빨리빨리 한꺼번에는 개발시대에 맞는 말이다.

 

재개발에는 철거형만 있지 않다. 남길 곳을 최대한 남기면서 재개발 하는 수복형도 있고 오랜 역사적 장소를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존형 등이 있다. 그간 우리나라는 철거형이 지상 목표였다.

 

1965년 재개발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세운상가가 첫 재개발 대상이었다. 주택재개발이 시작된 배경에는 무허가 주택 확산이 있다. 현저동, 홍제동, 아현동, 공덕동, 후암동, 한남동, 숭인동, 창신동, 흑석동, 노량진, 청계천, 중랑천, 정릉천 주변 등 판잣집에 무허가 건축물이 들어섰다.

 

1961년 당시 무허가 주택은 4만채가 넘었다. 이에 서울시는 무허가 주택을 철거한 뒤 주민들을 서울 외곽의 새로운 주거지로 이주시켰다. 도봉동, 구로동, 상계동, 사당동, 봉천동, 신림동, 마천동, 거여동, 신정동, 창동, 쌍문동, 가락동 등 외곽 공유지역에 재정착촌이 마련되었고 이주자들은 10 ~ 20평 규모의 작은 대지에 약간의 건축자재를 지원받아 스스로 집을 짓고 살았다.

 

1960년대 말에는 교외 지역 국공유지가 고갈되자 재정착지로 이주시키는 대신 무허가 주택지에 공공아파트를 건립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1970년에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어 서른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고 1971년에는 광주(廣州; 현 성남시) 단지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정부의 무계획적 도시 정책과 졸속 행정에 반발하여 광주대단지 사건을 일으켰다.

 

서울시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도심재개발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제기된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이 주요 계기가 되었다. 시청 앞에서 존슨 대통령 환영행사가 열렸는데 맞은 편인 북창동과 남산 자락의 무허가 주택의 적나라한 모습이 텔레비전 보도를 통해 미국까지 전해지자 재미 교민사회에서 대통령에게 도심 환경 개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서울시가 도심재개발을 서울시정의 핵심과제로 삼았다.

 

그 이후 22층의 더플라자호텔이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 서울광장 뒤편의 낙후한 화교 집단거주지였던 지금의 북창동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은 병풍 모양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1970년대 말 북한과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북한의 포격 사정 거리 안에 있는 서울에 과도하게 인구가 집중되는 것은 불리하다는 주장에 제기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도심재개발 활성화 정책이 마련되었다. 1983년 서울시는 670%였던 도심재개발 용적률을 1,000%로 늘렸다.

 

산보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로 인해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 서울의 아름다운 산, 언덕과 강변 풍경이 아파트로 인해 훼손되었다면 서울 도심부의 역사문화유산들은 재개발로 인해 지워졌다. 2000~2010년대는 개발 역풍 속에 맞이한 재생시대다.

 

역풍이란 선거로 인해 빚어진 현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2006년 선거 때 뉴타운 공약을 내걸어 당선된 단체장들이 2010년 민선 5기 지방선거에서는 바로 그 뉴타운 때문에 우수수 떨어졌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단체장들은 뉴타운과 재개발의 대안으로 도시재생을 들고 나왔다.

 

새 길이란 큰 회사들만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개발프로젝트가 아닌 스몰 프로젝트, 건물을 헐고 짓는 하드웨어보다 사람을 불러모으는 소프트웨어와 휴먼웨어에 돈을 쓰는 것을 말한다. 외연 확장을 그만두고 도시 안의 빈 곳을 채우고 혁신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도시를 살리려는 도시재생이 도시를 파괴하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일본의 경우 재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인구 감소 우려 때문이다. 사람이 없어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는 제도는 지역부흥협력대이고, 세수 격차로 재원 고갈의 위기를 맞고 있는 지방에 돈을 보내는 제도는 고향납세제도다.(100 페이지) 모두 일본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일본은 꽤 오래전부터 사람과 돈을 지방에 보내는 사업을 지속해왔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다. 시작이 늦었다고 서두르기보다 차근차근, 천천히 제대로 하면 좋겠다.“(103 페이지) 문제는 일자리다. 마을(지방,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을 붙잡아두려면 그곳에만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자생하지 않으면 재생이 아니다. 마을 만들기 지원 사업, 주거환경관리사업 등을 시행하면서 주어진 예산으로 주민공동이용시설을 신축해도 사업 종료 후 운영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해법은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다.(156 페이지)

 

도시재생에서 젠트리피케이션도 문제이지만 듀플리케이션(복제)도 문제다.(179 페이지) 저마다 자기 지역에 맞는 재생이어야 하는데 성공 사례를 따라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뒤 학업과 취업 때문에 떠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U 턴이라 한다.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J 턴이라 한다. 고향이 아닌 시골로 가는 것을 I 턴이라 한다.(214 페이지)

 

대한민국은 행복하지 않은 선진국이다. 헬조선이란 말이 있다. 20대와 30대의 90% 이상이 헬조선론에 동의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표현되는 빈부격차와 부의 불균형, 높은 실업률, 낮은 취업 기회, 고용 불안정, 고물가, 일상화된 경쟁구도, 저녁이 없는 삶 등이 이유다.

 

소득 향상이 행복을 담보한다는 믿음은 깨진 지 오래다.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심층구조와 기본골격을 바꾸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픈 도시는 우리의 책임이다.(243 페이지) 저자는 지금처럼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의 도시계획은 수요에 맞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와 결핍을 이어주는 도시계획이어야 한다고 말한다.(268 페이지)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just green enough’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윈프레드 커란Winifred Curran과 트리아나 해밀턴Trina Hamilton이 처음 쓴 말이다. 대규모 사업은 아무리 녹색 사업이라고 해도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새길 말이 아닐 수 없다. 수도권에 전 인구의 반 이상이 몰려 사는 극단의 경쟁 국가 한국의 숨통이 도시재생과 함께 조금씩 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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