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내려와서의 내 생활은 이것 저것 몸과 마음을 다해 시도해보는 시기다. 


대학교 졸업하기도 전부터 계속 돈을 벌기는 벌었는데, 그냥 흘러가는대로, 무계획, 무개념으로 벌고, 버는 것 보다 더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과 여행 과소비에서 벗어났다고, 나는 돈을 진짜 안 써. 착각하고 살았고, 지금도 약간 진행형이다. 

돈을 어디 더 아껴. 진짜 돈 안 쓰는데. 내가 미용실에를 가, 화장품을 사, 외식을 해, 옷을 사. 책도 안 사. 뭐, 돈 쓰는게 없잖아. 아니다. 근데, 왜 계속 돈 없냐고. 돈 쓰고 있는거야. 그냥 너무 생각없이 살았던 것 같다. 사람이 변하려면, 장소, 시간, 사람이 변해야 한다고 하는데 (제일 쓸모 없는게 결심하는거) 그 세가지가 다 변했고, 이제야 제대로 생각 외주주지 않고, 내생각하고 살려고 하는 것 같다. 


여튼, 돈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아니,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돈이 주인공은 아닌 이야기. 


스콧 트렌치의 '돈 걱정 없는 삶'을 읽고, 피와 살이 되고 뼈에 박혔다. 생활 방식의 문제다. 

내 삶을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그런 것들을 시도하고 있다. 딱히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아서, 할 수 있는 이것저것을 시도하고 있다. 


알바를 하고, 농사를 하고, 계약을 하고, 프리를 뛴다. 이 중에 돈이 된 것도 있고, 아직 안 된 것도 있고, 앞으로도 가망 없을 것 같은 것도 있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거니깐요. 


오늘 박문영의 <3n의 세계> 읽다가 김혜순 시인을 만났다. 엄청 반가웠고, 짜릿했고, 아, 나 이제 좀 책 궤도에 오른것 같다는 생각 들었다.시집 잘 안 읽었던지라 김혜순 시인 모르지만, 왠지 낯 익어서 찾아보니, 얼마 전에 샀던 <여자짐승아시아하기> 가 김혜순 시인의 책이잖아. 











이렇게 책 읽다가 책 만나는거, 굉장히 반갑고, 개인적으로 이제 좀 책 읽는 것 같다고 안도하게 되는 신호였다. 


주6일하던 알바를 주2일하고, 주7일 가던 정원을 주0.5일 가느라 시간이 갑자기 확 많아졌는데, 책 읽는 진도 안 나가는거, 12월까지 마쳐야 하는 일은 진도 안 나가서 마음 갑갑하고, 돈도 안 벌고 까먹고만 있고, (줄어드는 잔고~ 느는 체중~ ) 책도 못 읽고 있는, 놀지도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와 불안. 


책 못 읽고 있다고 꽤 오래 매일매일 징징거리다가 이제 조금 맘이 편해진 것 같다. 밤되면 또 징징거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제부로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다. 내 인생에 두 달쯤 책 실컷 읽고, 앞으로 계획하며 지내는게 뭐가 나빠. 필요한 일이고, 이 두 달을 즐겨라. 농번기 되면, 일 궤도 오르면, 이런 고민하는 시간도, 여유로운 시간도 가지기 힘들거야.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마음 먹고, 그 길로 도시락 싸들고 룰루랄라 가게 되는 일은 없는거다. 막상 들어서긴 했는데, 길이 없는 것 같아, 길이 끊긴 것 같아 어떻게 넘어가지, 돌아갈까, 그냥 아는 길로 갈까. 고민도 하고, 시행착오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며 그렇게 가는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요즘 읽고 있는 <라틴어 수업>도 도움 됐다. 독서선순환에 들면, 모든 책에서 나에게 앞으로 나가기에 꼭 필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아멘! 내 보기에 '공(부의) 신' 인 한동일 선생님도 준비 열심히 하고 갔는데도, 1년 동안 수업시간동안 말도 못 알아들으며 매일 고민했대. 그 뒤로도 더 얘기 있는데, 여튼, 내가 뭐라고. 결심하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거야. 덜컹거리고, 돌아가고, 넘어가고, 길이 막혔으면, 뒤로 돌아나와 다른 길 찾고, 그런게 당연한건데 말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시간에 하는, 그런 삶이 내가 원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파이어족이고, <돈 걱정 없는 삶>에서 먼저 간 길을 보여준다.


파이어족에 관한 해외 기사는 몇 번 보긴 했는데, 어제 본 이 기사도 분석 잘 해 놓았다. 

기사의 예시가 파격적이고, 도전!하고 싶게 만든다. 식비 8만원! 

" 미국 시애틀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실비아 홀 씨(38·여)는 400제곱피트(약 11평)짜리 소형 아파트에서 살며 한 달 식료품비로 75달러(약 8만4300원)를 쓴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갈변이 시작된 바나나 등 유통기한이 다 된 고기나 채소를 골라 산다. 걸어서 출퇴근하고 읽고 싶은 책이나 비디오는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다. 짠내 풀풀 나게 살며 연봉의 70%인 10만 달러(약 1억1200만 원)를 꼬박꼬박 저축하고 있다.

40세가 되는 2020년 200만 달러(약 22억4700만 원)를 모아 조기 은퇴한 뒤 세계여행을 하며 여생을 보내는 ‘파이어(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가 그의 꿈이다. 홀 씨는 2005년 뉴올리언스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집과 직장을 잃고 로스쿨 학자금 대출까지 내지 못하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날 이후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아주 적게 소비하며 살지만 박탈감을 느끼진 않는다”며 “돈을 갑절로 벌더라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 미국 엘리트 젊은이들이 파이어 문화에 빠져드는 건 일에 대한 불만, 높은 청년실업률, 학자금 대출 부담, 사회안전망 축소, 경제적 불확실성 확대 등과 관련이 있다. 얼리샤 머널 보스턴칼리지 은퇴연구센터장은 “젊은이들은 (소득, 부채 등) 경제적으로 거의 모든 면에서 부모나 할아버지 세대보다 뒤처져 있다”고 말했다. 소득이 늘면 ‘부의 효과(Wealth effect)’가 발생해 소비가 늘어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히려 저축률이 올라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금융위기 이후 9년 반 넘게 이어진 금융시장 호황으로 종잣돈만 넉넉하면 금융투자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불 마켓(bull market·상승 장세) 환상’도 커졌다."



내가 그들이 말하는 백만불, 이백만불을 모을 것을 목표로 하고, 악착같이 돈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위에 말한 거,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시간에 하고, 내가 시간 내고 싶은, 간 내야 하는 일에 내가 원할 때 시간 낼 수 있는 그런 생활이 목표인 것은 같다. 


그러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에 '우아한 가난' 이 이슈가 된 적 있다. 

이 먹고 살만한 것들아, 가난 타령 하지 말아라. 라는 말들이 잔뜩 나올 것들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랬지만, 나는 하퍼스 바자의 그 글이 좋았다. 


'돈 걱정 없는 삶'에 나오는 돈 많이 버는 CEO들도 애 병원 데려갈 시간 한 번 못 내는 매여 있는 몸이라면, 나는 그거 가난한거 아닌가 싶거든. 몇백억 부자가 주변에 없어서 모르겠지만, 벤츠 타는 사람도 포르쉐 못 타서 가난하다 하고, 포르쉐 타는 사람도 가난하다고 마통만 있는 뚜벅이인 나한테 5만원만 깎아 달라고 하고 ㅎㅎ , 수십억 부자도 세금이 천만원 가까이 나왔다고 돈 없다고 하고, 하루에 몇천만원도 버는 사촌은 해외 유학하는 애들 보낼 돈 없다고 가난하다고 하고. 그냥 다 가난한거 아니냐고. 체념 정서인거 맞긴 한데, 그럴거면, 좀 우아하게 사는게 좋지. 창 밖에 나무 한 그루라도 보이는 그런 전망의 원룸 찾는거, 좋은 음악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사는 거. 나는 그 기사에서 그런 얘기를 봤거든. 


그래서 나는 가난과 빈곤이 다르다고 생각했고, 사전도 찾아보니 가난이 더 포괄적인 개념이더라. 전세대에 더 가난했어도 가난하고 생각 안 했고, 그 전 세대는 의식주 해결도 힘들었을테고, 지금은 대부분이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거 아닌가. 


의식주가 해결 안 되는 빈곤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지만, 가난이 우습냐 불뿜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야기는 비참한 가난이 현재 진행형인 것도 아니던걸. 옜날에 내가 그랬는데! 그런 사람도 있고, 빈곤과는 거리가 쭉 멀었던 것 같은 사람도 있고 그렇더라고. 의식주 해결되지 않는 빈곤을 제외한 가난은 상대적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기사 링크는 ↓


우아한 가난의 시대 


악착같이 벌어 조기은퇴 

 


책 많이 읽고, 글 많이 쓸거에요. 


오늘 본 플텍 트친님의 글, 너무 좋았는데, 

"여성주의 행동 중 쉬운건 소비고 어려운 건 생산이다. 읽는게 아니라 말하고 쓰기, 보는게 아니라 본 것을 쓰고, 전하고, 

이해하는 걸 넘어서 만들고 실현하기." 


뒤로 갈수록 맘에 아주 꾹꾹 박히더라고. 


잘 읽고, 잘 쓰자. 본 것을 잘 쓰고, 잘 전하고, 이해하고, 

그걸 넘어서 만들어내고, 

실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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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나는 콘크리트를 쓰다듬는 습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새끼 고양이를 툭툭 건드리거나 박물관의 전시물을 만지고 싶다는, 거부하기 힘든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는 콘크리트를 보면 그렇게 느낀다. 표면이 부드러지, 황량한 회색인지, 돌이 조금 보이는지, 의도적으로 거친 질감을 남겨두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떤 질감인지, 얼마나 차갑거나 따뜻한지를 알아야한다. 그러니 내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손이 닿지 않는 머리 위에서 고대 콘크리트를 보고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독자 여러분도 짐작하실 것이다. " 


로마 아그라왈 [빌트] 









이 이야기를 읽고, 로마 아그라왈이 너무 좋아졌다. 나 그거 알아, 알아요. 

내가 쓰다듬는 건 콘크리트는 아니지만. 아니, 콘크리트를 쓰다듬는건, 한 번도 안 해봤고, 그거 쓰다듬는거, 뭔가 학교 드라마에 왕따들이 괴로워하며 시멘트 벽에 손바닥 가는거, 이런거밖에 생각 안 나지만, 너무 좋아서 쓰다듬는 그 기분 뭔지 알 것 같고, 그대가 그렇게 좋아하는거, 나도 이제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볼 것 같아요. 


나의 오랜 습관은 서점에서 책 각맞추기이다. 책 쓰다듬는건 안 한다. 오프에 있는 책이라도 조금이라도 손 덜 타는게 좋지. 궁금한 책을 펼쳐 볼 때도, 손에 땀이라도 나면 옷에 문질러 닦고, 책도 반만 펼쳐서 읽는다고. 


사람들이 보고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책들을 제자리 아니면, 제자리 찾아주고, 흐트러져 있으면 (늘 흐트러져 있다) 각 맞춰 놓는다. 시골 내려와서 의외로 불편한게 없고, 불편한 것들을 어떻게 대체해나갈지 찾았는데, 대형서점은 아쉽다. 서울의 다섯배 크기이지만, 백화점도 없는데, 대형서점이 있을리가. 


온라인 서점도 하루 종일 들락거리고, 밖에 나갈일 있으면, 서점 근처에서 약속 잡고, 서점 들리고, 일터에는 늘 대형 서점이 있어서 출근길, 점심시간, 퇴근길 내킬때마다 들렸었는데 말이다. 


제주에는 동네 책방들이 있다. 당일배송 책들도 기본 3일- 5일 배송되는 이 곳에서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을 집 앞 동네 책방에서 살 때도 있긴한데, 그렇다고 또 바로 읽게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느긋하게 주문하려다 보면, 다음에 다음에, 이것이 바로 책 사는 것을 줄인 비결. 그렇다. 당일배송은 책소비진작의 첨병인 것이었다! (이제 알았냐) 


요즘 읽는 책들마다 좋아서, 왠일이야. 하고 있는데, 이건 독서 컨디션 올라와서 그런거라고 생각한다. 책 많이 읽으면, 그만큼 좋은 책도 많아지는거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해서 올해의 책이야! 꺅꺅 하는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추천마법사'를 본다. 아직까지 추천 알고리즘은 완벽하지 않다고 느낀다. 몇십년 전에 아마존 이용할 때는 정말 다 사고 싶었는데, 지금은 구엑, 이거 내가 싫어하는 작가, 싫어하는 책, 왜 추천? 하는 책들이 자주 있다. 새로나온 책들도 본다. 새로나온 책 구경 하는건 늘 재미있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실물 보는 것이 더 좋긴 하지만, 온라인은 시도때도 없이 들여다 볼 수 있지.새로나온 책도 체크하고, 알라딘 서재의 블로거 베스트셀러의 1위부터 100위까지도 본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시간 한 없이 보낼 수 있다. 문구류 구경도 좋아하고, 책 구경도 좋아하고. 서점 향기,책 향기와 책 읽는 공기도 좋다. 한 번씩 육지 갈 때면, 서점 근처에서 약속을 잡거나, 시간을 내서 서점을 스케줄에 끼워 넣는다. 예전에 자주 갈 때랑은 다른 기분이긴한데, 역시 서점에 가서 책을 쓰다듬, 아니, 책의 각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금 서점의 기분을 대체하는 것이 도서관이지만, 도서관과 서점은 또 다른 분위기이지. 다 달라. 다 다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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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좋은책타율이 높다. 


남들이 좋다는 책들 중에 골라 읽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건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을거야. 싶은 책이 자주 나타나는건 드문 일인데 말이다.


 박문영의 '지상의 여자들' 


 이 소설은 읽을 때도 너무 재미있게 감탄하며 읽었지만, 읽고 나서도 계속 생각난다. 이 책이 너무 좋았어서 별로일 것 같은 이 작가의 신간도 사 버렸다. 일단 소재가 나의 버튼을 콱콱 누른다. 


화내고, 소리지르는 분노 조절 장애 늙은 남자들이 사라진다. 다양하게 나쁜 한국남자들의 기사를 매일 몇 번이고 보지만, 가장 와닿게 뼈에 사무치게 싫어 죽겠는 타입은 분조장남이다. 


기사 볼 때마다 다 뒤졌으면. 하는데, 이건 죽는거보다 낫다. 사라진다니. 책 속에서는 들림현상이라고도 한다. 다 뒤졌으면 염불 외우는 여자가 나뿐은 아닐텐데, 그런 일이 소설 속에서 현실로 구현된 세상은 상상가능할법 하지만, 여전히 짜릿하다. 



눈에 보이는 이 소설의 실험은 두 가지이다. 70개가 넘는 챕터의 시작은 시의 첫 연과 같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시같이 시작한다. 그 리듬을 타는 일이 굉장이 만족스러웠다. 두번째로는  '그녀'를 없애고 '그'로 통하고 있다. 이 부분을 계속 의식하게 되는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계속 의식되었다. 그 점도 좋았다. 


SF인데, 픽션같지도, SF 같지도 않게 읽혔다. 문학상 탄 소설 같은 톤이다. (내 기준 좀 지루한 톤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청 좋았다는 거. 


소설가가 맘 먹고 쓰면, 현실이 이렇게 세련되게 재현되는구나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책이다. 


재미있었지만, 페이지터너라서 막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닌데, 좋은 포인트가 많았다. 시작부터 엔딩까지 깔끔. 저자의 말에 계약금으로 캣타워 샀다는 이야기까지 너무 좋았다네. 


 로마 아그라왈 <빌트> 


이 책 읽으면서, 와, 이건 올해의 과학책이 아니라 올해의 책이잖아. 


아는만큼 보인다지만, 이 책만큼 뿌듯하게 읽고난 후, 새로 알게 된 것들로 세상이 다시 보이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물리학자이자 구조공학자인 저자가 아주 커다란 건축물들을 만드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 분야에 무지하고, 빌딩이 아주 높으면 원래 좀 흔들려야 안전하대. 수준인데, 정말 쉽게 알아듣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새로 알게 된 지식들로 내가 알아왔던 세상의 일들이 새롭게 보이는데, 그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말도 안되게 좋지. 






 한동일 <라틴어 수업> 


 이 책도 이 책이 나왔던 해 올해의 책으로 오르고, 좋은 책이라는 얘기 많이 들었지만, 별로 읽을 생각까지는 안 들었던 책이다. 좋다는 책 다 읽나. 다 못 읽지요. 어제 기사 읽고, 꽤 좋아서 라틴어 수업이나 읽어볼까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의 인간상이고, 살면서 처음까지는 아니겠지만, 필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선생님, 선생님. 


라틴어 수업 강의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이 이만큼 재미있게 읽히는 건, 그간의 나의 쓸데 못 찾은 공부들 덕분도 있어서 나도 칭찬하고, 좋은 이야기 읽으면서 감사하고 그렇다. 



어제 읽은 기사는 아래 링크 


“그냥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술·담배·이성교제… 당시 기준으로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일탈이라는 걸 하면 내 삶이 바뀔 수 있을까? 땡전 한 푼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삶을 궁극적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공부였어요. 요즘은 그렇게 공부하는 것도 어려운 사회가 된 것 같아 슬프지만. 어학공부를 좋아해서 항상 영어단어 몇 개, 숙어 몇 개 외우기로 몸을 풀 듯이 ‘웜업’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 습관이 붙어서 신학교에 가서도 라틴어 한 시간, 이탈리아어 한 시간, 독일어 한 시간씩 공부하고 다른 공부를 했죠. 일정시간 동안 학과공부를 하고, 이후에는 반드시 책읽기를 했어요. 방학 때는 주로 (서울) 정독도서관에 갔는데 철학책, 역사책 보는 게 좋았어요. 글자 보는 게 지칠 때는 그림책도 봤고요.”


이 부분을 오늘 아침루틴에 적용해서, 환기,물한잔,양치,냥생식,냥장실,설거지,책읽기에 영어공부 한시간을 더했다. 

3시간쯤 무언가를 꾸준히 공부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굉장히 좋아보이고, 따라하고 싶다. 


이 기사를 읽게 된 것은 아래의 문구 인용 때문이었다. 


“노예제가 있던 로마의 법은 불평등한 법이었죠. 그런데 명확한 신분제사회,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와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사회 가운데 과연 어떤 구성원이 더 피곤함을 느낄까요? 지금 우리는 법적으로 모두 평등하다고 얘기하잖아요. 과연 그럴까요. 만인에게 모든 기회와 도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교묘하게 차단돼 있죠. 강의할 때 청년들에게 ‘지금 여러분이 지나온 삶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냐’고 물어봐요. 그렇다고 답한 학생을 단 한 명도 못 만났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비혼과 출산 거부는 어떤 이들에겐 ‘선택’이 아니라고 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얼마 전에 한 연예인에게 불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몰아가서 더 이상 내가 갈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그렇게 되는 거죠.”

그는 <로마법 수업>에서 “노예의 소유주들은 은근히 노예가 가정을 갖기를 바랐다. 그건 노예에게서 출생한 자녀가 그대로 주인의 재산이 되기 때문이었다”며 로마 사회의 교묘한 출산장려책과 한국의 저출산 위기론을 비교했다. 그는 “젊은이들은 이미 깨닫고 있는 것”이라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사회 지배층을 먹여 살리는 하층계급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뼈아프게 간파해버렸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읽고 보니 이 부분도 좋았다. 


조직과 다른 의견을 내는 이야기에 이르자 그가 낙태, 이혼 문제에 있어 천주교의 공식입장과는 다른 이야기를 쓴 것이 생각났다. 그는 낙태에 대해 “낳아도 낳지 않아도 모두 산통을 겪는다”며 “가장 약한 생명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 생명을 잉태한 그보다 조금 더 강하지만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한 생명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할 수 있길 기다린다”고 밝혔다. 이혼에 대해서도 “당시 이혼 제도하에서 철저히 약자의 입장이었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가 이혼하지 말라고 한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며 “맥락과 취지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무작정 이혼하지 말라는 계명에만 집착하는 것은 예수의 진리를 따르는 길이 아닐 것”이라고 썼다.


기사의 다른 부분들도 다 엄청 좋다. 책 부록으로 줬으면 좋겠네.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911090600045



책을 열 권, 스무 권 읽으면, 그 책이 어떤 책이든 후회는 없다. 좋은거 하나라도 찾을 수 있으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 가 본 맛없는 맛집도 괜찮아. 이제 궁금하지 않고, 다시 안 갈 수 있으니깐. 같은 거. 나는 책 편애자라 별로인 책이 맛 없는 맛집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게 되는 건, '궁금해서' 이고, 그 궁금함이 해결된 것만으로도 그 독서는 성공이지. 


이렇게 좋은 책들을 머리에 마음에 담고, 그것이 내 안에 녹아들어 체화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힘을 주고, 감동을 주고, 감탄하게 하는 그런 책들은 작은 로또들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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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2019-11-1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트 책 재밌어 보이네요. 과학하고는 거리가 먼데 책으로라도 봐야겠어요

하이드 2019-11-12 08:54   좋아요 2 | URL
저도 과학책 잘 못 읽거든요. 책도 두껍지 않고, 정말 쉽게 원리 설명해주는데, 높은 빌딩, 긴 다리 이런 것들이라 확 와닿아요. 역사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글이 재치 있고, 저자의 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과 신념도 돋보여서 감동적이었습니다. 목차도 각 챕터도 너무나 깔끔.

무해한모리군 2019-11-11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트 읽어봐야겠어요. 과학 천문학 이런건 너무 모르니까 제게는 신비의 영역이네요.

하이드 2019-11-12 08:5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뇌과학 책들 진짜 재미나게 읽거든요. 건축, 그 중에서도 구조공학 책은 정말 생소했는데, (예전에 로마 건축 관련 책들은 로마 미술 책 관련 많이 읽었고, 그것들도 다 알고보니 구조공학이었어요) 9.11 빌딩 무너진 이유 같은거 나오는데, 정말 손에 땀 나고, 저자의 유머도 간간히 재미나고 그렇습니다. 길도 다리도 빌딩도 다 다르게 보여요.

둥둥오리 2019-11-1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설이던 라틴어수업을 읽어봐야겠네요
책추천은 늘 설레요~

하이드 2019-11-12 08:57   좋아요 0 | URL
저, 정말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거의 모든 문장을 형광펜 칠하며 읽고 있답니다. 읽을 생각 없었는데, 기사 보고, 그럼 어디 한 번, 읽기 시작했다가 정말 확 끌려갔답니다. 이 책이 이렇게 인기 많고, 좋아하는 사람 많았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2019-11-12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2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2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상의 여자들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5
박문영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 명제 찬성일세. 

왜 신청했는지도 잊고 있을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도서관에 책이 들어왔다. 희망도서 신청할때만큼은 심혈을 다하므로, 좋은 책이겠지.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나니, 짧지만 아주 좋은 꿈을 꾼 것만 같다.


시골도시 구주, 구주에서 남자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자를 때리려다, 여자를 죽이려다, 여자에게 소리지르다 남자가 사라진다. 

목격정보들이 쌓이면서 판이 벌어진다. 


너무 현실적이지만,  너무 바라는 바여서 꿈 같고, 웃기고, 씁쓸하고, 그랬다. 


시골에 와서 더 실감나는 부분도 있지만, 도시에서 더 많은 1호선 광인같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살아야해서 더 실감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일단 시골에는 사람이 없으니깐. 매일, 무례한 개할저씨들을 볼 확률도 좀 줄어든다. 타인일 경우에는 그런데, 개할저씨가 가족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꾸준히 무시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여자는 출산 직후에 더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반추하며 되돌려 놓는 작업을 하려면 아예 다시 태어나는 게 나았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더 예뻐지셨네요. 과장된 인사엔 항상 비교와 판단이 들어 있었다. 복도에서 누군가를 맞마주칠 때마다 그의 시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주여성들은 한국인들이 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편의를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멍하고 무해한 얼굴로 집안과 거리를 돌아다녔다." 


"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을 꾸려 놓고 태평히 지내는 이곳 사람들이 기이하게 낙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양상은 치밀하고 계산적인 평소 행태와 괴리가 있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여자는 많은 이들이 사고사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의식적인 자살 욕구가 강해 보였다. 하루하루에 연연했지만, 정작 긴 인생을 얼버무리는 이들이 곁에 너무 많았다." 


짤막짤막한 장면으로 이루어진 73개의 챕터가 있다. 챕터 들어가는 첫문장이 시같다. 


성연은 형근의 손을 

놓았다. 이를 


안고 남자를 쫓아가는 여자가 길바닥에 떨어뜨린 게 있었다. 


이런식으로 모든 챕터가 시작됨. 이 책의 실험 하나 더. '그'만 존재한다. '그'에 '녀'를 덧붙인 그녀는 없다. 읽는 동안 계속 사기하게 됨. 그렇다고 이 책이 막 되게 실험소설같고 그렇지는 않다. 내용은 픽션인데, 너무 논픽션 같아서 읽는 내내 조금씩 입꼬리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파안대소 하며 읽다가 씁쓸하게 웃다가 그러지만, 좋은 이야기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개할저씨 없는 유토피아. 여자가 안전하고, 여자가 사람인 유토피아. 


" 형근이 타인의 은근한 간섭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습성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도 ㅇ낳았다. 그의 입가를 닦아내고, 머물렀던 자리의 부스러기를 치우고, 다음 끼니를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매번 성연의 몫이었다. 성연은 그가 어제의 불찰과 오늘의 불찰을 똑같이 이어가는 까닭이 궁금했다. 답은 가까이 있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시중을 들고 있는 자신 때문이었다. 성연이 쇠똥구리처럼 그들의 일상을 궁글리고 있었다. 그러나 형근에게 뻗어 나가는 손은 반성보다 빨랐다. 가루, 티끌, 먼지를 털어내는 성연의 손은 독립된 기관처럼 움직여 그들 생활의 크고 작은 균열과 무질서를 무서운 속도로 정돈시켰다." 


형근과 성연은 부부, 형근이 다른 지방으로 긴 출장을 간 사이에 구주 분조장남 실종 사건이 시작되고, 출장간 지방이 본가 근처라 본가에 머무르던 형근을 시모가 구주로 못 가게 잡는다. 구주의 여자들이 주인공이고, 주요 인물은 성연, 형근, 성연과 친구이자 연인인 희수, 희수의 딸 선미 


"치료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선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곳은 특별히 야만적이고 권태로운 장소가 아니었다. 집, 학교, 거거리,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첫 밥벌이의 곤혹은 충분히 예상했다. 그러나 불꽃이 튀는 콘센트에 잭을 꽂고, 청소기를 돌리고, 스펀지를 빨고, 습기 찬 부항을 닦고, 수건을 개키고, 물리치료기 전선을 연ㄱ결하고, 피 묻은 솜과 침을 버리고, 가습기를 조절하고, 밥을 차리고 치우고, 침구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떼고, 침대 밑의 침을 줍고, 쑤쑥뜸을 만들고, 라디오 주파수를 바꾸고, 은행에서 잔돈을 찾아오고, 환자복을 수거해오는 일을 도맡아 하는 동안 선미는 벌어지는 입을 닫을 수도, 도리질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 책은 분명 SF인데, 픽션으로 읽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 사회문제, 사회파 소설! 이런 느낌도 아니다. 글이 피부에 와닿는다.책의 핵심 이야기는 사이다 중에 사이다인데, 그런 느낌이 강한 것도 아니다. 뉴스 볼 때마다, 다 죽어버렸으면. 이를 악무는데, 죽는것보다 나은 결말인데도 말이다. 그냥 깨끗하게 사라져버리니 더 해피엔딩이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가상의 상황임에도, 너무 그럴 것 같아서 웃겼다. 


" 실종을 지켜봤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늘었다.

남자들이 화를 내다 


사라졌다는 목격담이 쌓였다.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주민들은 적었다. 화가 왜 나쁜지 묻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부당한 처사라고 따져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화를 어디까지 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시도로 여겨졌다. 닥친 사고 앞엣에서 생각은 걸리적거렸고, 거듭한 생각은 비효율적이었다." 




" '요새, 보루, 유토피아' 같은 단어가  

구주 앞에 붙었다. 구주는 


여성들이 살고 싶은 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 




"실종 외에도 사건, 사고는 연일 쏟아졌다. 수사는 진전이 없었다. 거실, 안방, 부엌,많은 이들이 CCTV와 블랙박스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서 사라졌다. 가정폭력 현장이 다수였다. 거리에 즐비한 카메라는 소용이 없었다. 서류철엔 여자들의 진술만 쌓였다. 부서진 빵가루처럼, 미미한 말이었다. 


나오는 에피소드들도, 작가의 실험도, 소재도, 주제도 결말도, 마지막의 저자의 말까지도 다 좋았다.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지만,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소설이 소설로 읽히는 날이 올 수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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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 캘린더 도착

올해도 여전히 예쁘고 귀엽다.
예년에 비해 클로즈업과 원샷이 많다.

매일 아침 고양이 날짜 넘기며 다음 고양이 만나는 행복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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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2019-10-30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넘 이뻐요 어디서 구매하나요?

하이드 2019-10-31 06:40   좋아요 0 | URL
맨 위에 상품 누르면 상품페이지로 넘어가요. 몇년째 써오는데, 한 장도 빠짐없이 다 엄청 예쁩니다!

지나 2019-10-31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네 감사합니다.저도 구매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