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좋은책타율이 높다. 


남들이 좋다는 책들 중에 골라 읽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건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을거야. 싶은 책이 자주 나타나는건 드문 일인데 말이다.


 박문영의 '지상의 여자들' 


 이 소설은 읽을 때도 너무 재미있게 감탄하며 읽었지만, 읽고 나서도 계속 생각난다. 이 책이 너무 좋았어서 별로일 것 같은 이 작가의 신간도 사 버렸다. 일단 소재가 나의 버튼을 콱콱 누른다. 


화내고, 소리지르는 분노 조절 장애 늙은 남자들이 사라진다. 다양하게 나쁜 한국남자들의 기사를 매일 몇 번이고 보지만, 가장 와닿게 뼈에 사무치게 싫어 죽겠는 타입은 분조장남이다. 


기사 볼 때마다 다 뒤졌으면. 하는데, 이건 죽는거보다 낫다. 사라진다니. 책 속에서는 들림현상이라고도 한다. 다 뒤졌으면 염불 외우는 여자가 나뿐은 아닐텐데, 그런 일이 소설 속에서 현실로 구현된 세상은 상상가능할법 하지만, 여전히 짜릿하다. 



눈에 보이는 이 소설의 실험은 두 가지이다. 70개가 넘는 챕터의 시작은 시의 첫 연과 같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시같이 시작한다. 그 리듬을 타는 일이 굉장이 만족스러웠다. 두번째로는  '그녀'를 없애고 '그'로 통하고 있다. 이 부분을 계속 의식하게 되는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계속 의식되었다. 그 점도 좋았다. 


SF인데, 픽션같지도, SF 같지도 않게 읽혔다. 문학상 탄 소설 같은 톤이다. (내 기준 좀 지루한 톤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청 좋았다는 거. 


소설가가 맘 먹고 쓰면, 현실이 이렇게 세련되게 재현되는구나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책이다. 


재미있었지만, 페이지터너라서 막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닌데, 좋은 포인트가 많았다. 시작부터 엔딩까지 깔끔. 저자의 말에 계약금으로 캣타워 샀다는 이야기까지 너무 좋았다네. 


 로마 아그라왈 <빌트> 


이 책 읽으면서, 와, 이건 올해의 과학책이 아니라 올해의 책이잖아. 


아는만큼 보인다지만, 이 책만큼 뿌듯하게 읽고난 후, 새로 알게 된 것들로 세상이 다시 보이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물리학자이자 구조공학자인 저자가 아주 커다란 건축물들을 만드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 분야에 무지하고, 빌딩이 아주 높으면 원래 좀 흔들려야 안전하대. 수준인데, 정말 쉽게 알아듣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새로 알게 된 지식들로 내가 알아왔던 세상의 일들이 새롭게 보이는데, 그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말도 안되게 좋지. 






 한동일 <라틴어 수업> 


 이 책도 이 책이 나왔던 해 올해의 책으로 오르고, 좋은 책이라는 얘기 많이 들었지만, 별로 읽을 생각까지는 안 들었던 책이다. 좋다는 책 다 읽나. 다 못 읽지요. 어제 기사 읽고, 꽤 좋아서 라틴어 수업이나 읽어볼까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의 인간상이고, 살면서 처음까지는 아니겠지만, 필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선생님, 선생님. 


라틴어 수업 강의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이 이만큼 재미있게 읽히는 건, 그간의 나의 쓸데 못 찾은 공부들 덕분도 있어서 나도 칭찬하고, 좋은 이야기 읽으면서 감사하고 그렇다. 



어제 읽은 기사는 아래 링크 


“그냥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술·담배·이성교제… 당시 기준으로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일탈이라는 걸 하면 내 삶이 바뀔 수 있을까? 땡전 한 푼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삶을 궁극적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공부였어요. 요즘은 그렇게 공부하는 것도 어려운 사회가 된 것 같아 슬프지만. 어학공부를 좋아해서 항상 영어단어 몇 개, 숙어 몇 개 외우기로 몸을 풀 듯이 ‘웜업’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 습관이 붙어서 신학교에 가서도 라틴어 한 시간, 이탈리아어 한 시간, 독일어 한 시간씩 공부하고 다른 공부를 했죠. 일정시간 동안 학과공부를 하고, 이후에는 반드시 책읽기를 했어요. 방학 때는 주로 (서울) 정독도서관에 갔는데 철학책, 역사책 보는 게 좋았어요. 글자 보는 게 지칠 때는 그림책도 봤고요.”


이 부분을 오늘 아침루틴에 적용해서, 환기,물한잔,양치,냥생식,냥장실,설거지,책읽기에 영어공부 한시간을 더했다. 

3시간쯤 무언가를 꾸준히 공부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굉장히 좋아보이고, 따라하고 싶다. 


이 기사를 읽게 된 것은 아래의 문구 인용 때문이었다. 


“노예제가 있던 로마의 법은 불평등한 법이었죠. 그런데 명확한 신분제사회,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와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사회 가운데 과연 어떤 구성원이 더 피곤함을 느낄까요? 지금 우리는 법적으로 모두 평등하다고 얘기하잖아요. 과연 그럴까요. 만인에게 모든 기회와 도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교묘하게 차단돼 있죠. 강의할 때 청년들에게 ‘지금 여러분이 지나온 삶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냐’고 물어봐요. 그렇다고 답한 학생을 단 한 명도 못 만났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비혼과 출산 거부는 어떤 이들에겐 ‘선택’이 아니라고 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얼마 전에 한 연예인에게 불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몰아가서 더 이상 내가 갈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그렇게 되는 거죠.”

그는 <로마법 수업>에서 “노예의 소유주들은 은근히 노예가 가정을 갖기를 바랐다. 그건 노예에게서 출생한 자녀가 그대로 주인의 재산이 되기 때문이었다”며 로마 사회의 교묘한 출산장려책과 한국의 저출산 위기론을 비교했다. 그는 “젊은이들은 이미 깨닫고 있는 것”이라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사회 지배층을 먹여 살리는 하층계급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뼈아프게 간파해버렸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읽고 보니 이 부분도 좋았다. 


조직과 다른 의견을 내는 이야기에 이르자 그가 낙태, 이혼 문제에 있어 천주교의 공식입장과는 다른 이야기를 쓴 것이 생각났다. 그는 낙태에 대해 “낳아도 낳지 않아도 모두 산통을 겪는다”며 “가장 약한 생명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 생명을 잉태한 그보다 조금 더 강하지만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한 생명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할 수 있길 기다린다”고 밝혔다. 이혼에 대해서도 “당시 이혼 제도하에서 철저히 약자의 입장이었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가 이혼하지 말라고 한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며 “맥락과 취지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무작정 이혼하지 말라는 계명에만 집착하는 것은 예수의 진리를 따르는 길이 아닐 것”이라고 썼다.


기사의 다른 부분들도 다 엄청 좋다. 책 부록으로 줬으면 좋겠네.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911090600045



책을 열 권, 스무 권 읽으면, 그 책이 어떤 책이든 후회는 없다. 좋은거 하나라도 찾을 수 있으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 가 본 맛없는 맛집도 괜찮아. 이제 궁금하지 않고, 다시 안 갈 수 있으니깐. 같은 거. 나는 책 편애자라 별로인 책이 맛 없는 맛집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게 되는 건, '궁금해서' 이고, 그 궁금함이 해결된 것만으로도 그 독서는 성공이지. 


이렇게 좋은 책들을 머리에 마음에 담고, 그것이 내 안에 녹아들어 체화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힘을 주고, 감동을 주고, 감탄하게 하는 그런 책들은 작은 로또들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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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2019-11-1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트 책 재밌어 보이네요. 과학하고는 거리가 먼데 책으로라도 봐야겠어요

하이드 2019-11-12 08:54   좋아요 2 | URL
저도 과학책 잘 못 읽거든요. 책도 두껍지 않고, 정말 쉽게 원리 설명해주는데, 높은 빌딩, 긴 다리 이런 것들이라 확 와닿아요. 역사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글이 재치 있고, 저자의 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과 신념도 돋보여서 감동적이었습니다. 목차도 각 챕터도 너무나 깔끔.

무해한모리군 2019-11-11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트 읽어봐야겠어요. 과학 천문학 이런건 너무 모르니까 제게는 신비의 영역이네요.

하이드 2019-11-12 08:5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뇌과학 책들 진짜 재미나게 읽거든요. 건축, 그 중에서도 구조공학 책은 정말 생소했는데, (예전에 로마 건축 관련 책들은 로마 미술 책 관련 많이 읽었고, 그것들도 다 알고보니 구조공학이었어요) 9.11 빌딩 무너진 이유 같은거 나오는데, 정말 손에 땀 나고, 저자의 유머도 간간히 재미나고 그렇습니다. 길도 다리도 빌딩도 다 다르게 보여요.

둥둥오리 2019-11-1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설이던 라틴어수업을 읽어봐야겠네요
책추천은 늘 설레요~

하이드 2019-11-12 08:57   좋아요 0 | URL
저, 정말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거의 모든 문장을 형광펜 칠하며 읽고 있답니다. 읽을 생각 없었는데, 기사 보고, 그럼 어디 한 번, 읽기 시작했다가 정말 확 끌려갔답니다. 이 책이 이렇게 인기 많고, 좋아하는 사람 많았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2019-11-12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2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2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