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신부의 지혜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1
G. K. 체스터튼 지음, 박용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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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압니다. 이 드라마틱한 배경에 지루하고 짧으며 무매력이 매력인 브라운 신부.

그렇지만, 제가 웃느라 숨막혀 하며, 눈물 글썽이는.

이 소설을 저는 차마 권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키가 작고 볼품 없는 사나이. 손에 든 모자와 우산조차 큰 짐처럼 다루기 힘들어보이는. 그나마 검정 우산은 흔한 것으로 벌써 수리했어야 할 상태. 넓은 차양이 위로 말려간 검정 모자. 아무튼. 소박하고 무능한 사람의 표본같은' 주인공.  주인공을 사랑해야 할 작가마저도 맨날 소개할때 '키가 작고 볼품 없는... ' 으로 브라운 신부를 묘사하고 있으니, 저와 같은 심정인걸까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던가요. 사랑은 빠지는 거죠. 사랑이란 나락으로 떨어지는(Fall in love) 거죠. 어쩔 수 없죠 뭐. 저는 이미 발 헛디뎌 빠져버린걸요.

내가 봐도 참 지루하고, 그나마 단편이라 호흡이 짧기에 근근히 읽어냅니다만, 브라운 신부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참 드라마틱 합니다. 사람도, 배경도, 악당도, 조연도. 그러니깐 그 자신만 빼고 말이죠. 

'도둑 천국'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무스카리와 에차를 볼까요? 무스카리는 무스카리스럽고 에차는 에차스럽습니다.

'무스카리는 어디든 칼집과 만돌린 케이스를 들고 다녔다. 그 칼은 많은 빛나는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온 것이었다. ... 무스카리는 결코 허풍쟁이도 아니고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한시도 참을 수 없어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정열적인 라틴 사람일 뿐이었다. 무스카리의 시는 여느 사람의 산문처럼 이해하기 쉬웠다. 명예와 예술과 미인을 열렬하고 솔직히 숭배했다. 그것은 모호한 이상과 타협으로 만족하는 북유럽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었다. 모호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솔직함이 위험한 것으로 보였으며, 범죄의 냄새마저 풍겼다. 무스카리는 너무 단순하여 오히려 신용을 얻지 못했다..'

바로 이때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 열매가 맺혀 황금빛으로 빛나는 키 작은 오렌지 나무로 반쯤 가려진 테이블에서 한 사나이가 일어나 다가왔다. 무스카리에게 싸움을 거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와는 대조적인 옷차림이었다.

'사나이는 검은색과 흰색 바둑판 무늬의 트위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칼라를 빳빳이 세우고 핑크색 넥타이를 맸으며 끝이 뾰죽한 노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피서지 바닷가를 찾아온 순진한 런던 사람처럼 평범하면서도 눈을 끄는 차림이었다. ... 이탈리아 사람 같은 머리,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가무잡잠한 피부에 명랑해 보이는 느낌. 그 머리가 보드지처럼 빳빳이 선 칼라와 멋부린 핑크 넥타이 위에 오똑 서 있었다.'

이 드라마틱한 두 남자와 '고대 그리스인 같은 금발, 맑고 발그레한 볼, 여신 같은 모습이 사파이어를 녹인 듯한 바다와 잘 조화된 그녀. 에셀 해로게이트'의 이야기.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눈에 콩깍지가 씌인 저는요.

'시저의 머리' 에서는 한 여자가 집안의 가보인 동전을 훔치고 괴인에게 쫓기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녀의 말을 빌면 그 괴인은 ' 코의 다른 부분은 제대로인데 끝부분이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아직 물렁물렁할 때 장난감 망치로 옆에서 내리친 것 같았어요. 그다지 기형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었으나 내게는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러운 대상이었습니다. 사나이는 저녁 햇살에 붉게 물든 물 속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피바다에서 나타난괴상한 바닷짐승처럼 우뚝 서 있었는데, 어째서 그 비뚤어진 코 끝이 그토록 내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사나이는 그 코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정말 코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 라는군요. 아 , 이 부분에서 옆에서 자던 개가 깜짝놀라 쳐다볼 만큼 큰소리로 웃어제쳤어요.아, 웃으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너무 웃긴걸요. 원래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숟가락으로 밥을 퍼 먹어도 웃음이 마구 난다던데. 그 비슷한 증상인걸까요. 코를 손가락처럼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 괴인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무섭고, 음침해요. 그리고 재미있어요. 그나마 현실감각을 놓지 않고 이 책을 읽어 나갈 수 있는건 브라운 신부님 덕분이에요.

그의 파트너인 대도였던 탐정 플랑보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죠. 그에 대한 묘사는 '브라운 탐정의 동심' 에 좀 더 자세히 나와요. 그 이야기를 알고 보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죠. 플랑보의 활약은 '팬드라곤의 멸망'과 '징의 신'에 도 나오는데요, 특히 '징의 신'에서는 브라운 신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죠.

'바로 그때였다. 사나이는 눈이 아찔할 만큼 빠른 동작으로 신부에게 달려들었다. 브라운 신부는 사나이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이 위기 일발의 순간에 뒤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플랑보는 아무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커다란 두 갈색 손을 긴 철제 의자에 걸치고 있었으므로 사나이의 어깨 모양이 갑자기 달라진 순간 그 큰 의자를 번쩍 눈 위로 들어올려 사형수의 목을 자르는 형리가 도끼를 내리치는 자세를 취했다. ...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에 비친 플랑보의 긴 그림자는 에펠탑을 들고 있는 거인 같았다. 이 큰 철퇴가 내리쳐졌을 때의 충격보다 그 그림자에 더 크게 압도당한 기묘한 사나이는 당황하여 몸을 돌리더니 쏜살같이 호텔 안으로 달려갔다. 그 뒤에는 사나이의 손에서 빠져나온 날이 넓은 단검이 떨어진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떠납시다!" 플랑보는 큰 의자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듯 땅에 도로 놓자 키 작은 신부의 팔을 잡고 살벌한 회색 뒤뜰을 달려나갔다. ... 플랑보의 두 어깨가 부풀어오르며 모양이 달라졌다. 걸쇠 세 개와 자물쇠 한 개가 한꺼번에 뜯겨지며 동시에 플랑보는 커다란 뒷문을 마치 가자 성 문을 둘러 멘 삼손처럼 가볍게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세번째 총알이 뒤꿈치 바로 뒤에서 눈과 먼지를 날림과 동시에 플랑보가 던진 문짝이 정원 울타리 너머로 가서 떨어졌다. 다음 순간 플랑보는 아무 말 없이 몸집 작은 신부를 번쩍 어깨에 둘러메더니 긴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시우드를 향해 내달았다. '

이런 저런 여전히 지루하고 드라마틱하고 재미있고, 웃겨 죽는 에피소드들이 많네요.

반어법 아니고요, 워낙에 재미없다는 분들이 많아서, 권해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 홀딱 반했다고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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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4-2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더라구요 ㅜ.ㅡ

panda78 2005-04-27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브라운 신부님 참 좋아해요. ^^
근데 북하우스 브라운 신부 전집은 뒤로 갈 수록, 참크래커를 물도 우유도 주스도 없이 한 통 다 먹는 기분이 들었다구요..;;;

물만두 2005-04-27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로 갈수록 딸리죠...

하이드 2005-04-27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풉. 판다님의 비유란 . 정말이지. 확 와닿는군요.

하이드 2005-04-2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914924

아, 뒤에는 읽지 말까부다요.

-_-a


panda78 2005-04-2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로 나오면 그 때 재 도전을.. ^^;; 아무래도 번역 탓도 있을 거 같아서요.
다섯 권 전부 번역자가 다른데다, 번역자들 모두 이전에 번역한 책도 없다던데요. 그래서 그럴지도..;;

▶◀소굼 2005-04-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운 신부가 만만해 뵈였을까요; ;

비연 2005-04-2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없다는 분들이 있었군요..전 너무 좋았는데.
북하우스 책 다섯권 다 읽었거든요. 판다님 말씀엔 동의합니다...헤~
뒤로 갈수록 좀 그렇더군요...그래도 추천하고 싶슴다~^^

dreamer79 2005-07-2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하이드님의 평을 추천합니다. 브라운 신부를 추천하지 않는 또 한 사람으로서. 말씀하신대로 온갖 드라마틱 한 사건 속에서도 눈을 껌벅대며 무슨 물건을 잊어 버리기라도 한듯 두리번거리는 무매력의 브라운 신부. (솔직한 심정은, 공유하기 아까운건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