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기

선물을 하려면 책을 사야만 한다. 그리고 책을 사려면 서점에 가야만 한다. 작은, 아주 작은 서점에. 동네 상점을 하나하나 돌아가며 신중하게 외상을 깔아놓는 가난뱅이처럼 나는 치밀하게 한 곳 한 곳을 체크해가며 돌아본다.

나는 살 책을 결정했을 때에만 서점에 간다. 그런데도 서점에서 나올 때는 항상 손에 적어도 세 권은 들려 있다. 아니면 병적인 허기증 환자가 제과점 진열창을 애써 피하듯, 나는 침대 옆에서 쓰러질 듯 흔들리며 대기하고 있는 거대한 책 더미를 더 높이 쌓아올릴 뿐인 부추김의 허기와 충동구매를 피하기 위해 눈을 감다시피 하고 서점 앞을 지나간다. 계속 그러다가는 내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쌓아둔 책들이 나를 덮쳐 일종의 복수를 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경우는 도서전이다. 죽었거나 살아 있는 그 수천 명의 작가들, 내가 읽지 않은 그 수백만 권의 저작들.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나는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나는 곧 도매 푸줏간이나 대형 양계장에서 길을 잃은 채식주의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식욕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없이 널려 있는 그 책-음식물들이 구역질을 일으킨다. 나는 매년 도서전에서 나올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다니는 서점들 중 하나에 급히 뛰어들어 즐겨 찾는 코너나 신간 진열대를 허겁지겁 훑어보고 출구를 향해 달려간다. 이미 늦었다. 훑어보던 내눈에 [팔라틴 공주의 편지]가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계산대 바로 옆에 진열되어 있는, 첫 페이지가 눈부신 문장력의 진열창인 비방 드농의 {다음날은 없다]도 나는 황급히 사서 달아난다. 휴, 세 권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게다가 그중 두 권은 아주 얇다. 그 정도면 고통의 책더미도 날 용서해줄 것이다.

가끔 드라마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점에 내가 탐하는 책이 없다. "[미들마치]요? 부르주아 서점에도 재고가 없어서 나도 못 구했어요. 윈 서점에 한 번 가 보세요." 들른 김에 동생에게 선물하기 위해 엘렌 방베르게르의 소품을 집는다. 윈에는 물론 [미들마치]가 있다. 옴니버스가 다른 소설 두 권과 함께 묶어서 내놓은 것으로. 그런데 나는 아직 소설 세 권을 한꺼번에 먹어치울 만큼 조지 엘리엇에게 굶주려 있지 않다. 그만 포기한다. 짐 해리슨의 새 책이 나왔을거라며 나 자신을 달랜다. 웬걸, 게으르기는! 나는 욕구불만인 상태로 윈에서 나온다. 발자르 카페에 앉아 프랑수아를 기다리고 있자니 콩파니 서점이 아직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나에게 [미들마치]를 사게 하려는 운명의 신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책 더미가 날 깔아뭉개거나 말거나. 입에 침을 튀겨가며 그 책을 추천해준 카트린은 좋아할 것이다.

안달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이 코너 저 코너 차분하게 구경하며 돌아다닐 수 있는 프랑수아, 서점 주인의 입발린 소리에 잘도 넘어가는 아르멜이 얼마나 부러운지. 반면, 나는 마치 위협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푸르넬의 [운동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 선물용 서랍 속에 이미 세 권이나 들어 있다. 없어서 못 준 경험을 한 후로는 몇 권씩 쌓아두고 있다)를 또다시 사고 만다. 그러고는 속으로 따져본다. 이 놀라운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스포츠지 기자가 되겠다고 설쳐대는 레옹-모리스의 딸에게 한 권, 일요일마다 자전거로 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아페니노 식당 주인 리노에게 한 권. 그 책을 읽을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 책을 사랑할 이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수십 권.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나는 새 책보다는 샀던 책을 더 많이 산다. 나의 정신 나간 행동에 서점 주인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도 나와 엇비슷하다. 동시에 또는 차례로, 투덜거리고, 쾌활하고, 까다롭고, 바쁘다. 따뜻하든 차갑든, 나는 그들의 기질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적응해나가면 된다. 그들 역시 그렇겠지. 우리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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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4-0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하이드님 얘긴 줄 알았어요..^^;; 좀 비슷하지 않으신가요?

하이드 2005-04-03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하하, 우.리.가(강조해서) 글쵸 뭐.

chika 2005-04-0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 전 정말 '사기'치는 줄 알았어요. 정신없는 치카~ =3=3

하이드 2005-04-0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풉. 책사기. 흐흐흐 . 그러고보니 그렇게도 보여요. 치카님

2005-04-03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