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원 산책 -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의
오경아 지음, 임종기 사진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8월
절판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의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이번에는 첫번째 책에서 아쉬웠던 사진도 함께. 그 사진은 남편인 임종기 교수의 사진들이다.

사진이 없는 책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초록의 사진들은 그야말로 지친 일상을 정화해주는, <영국 정원 산책>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대단히 고상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목차 다음에는 이 책에 나온 39개의 정원 이름이 영문명과 함께(이거 중요!) 정리되어 있다.

자기 이야기 하면서 독자에 대한 배려도 느껴지는 좋은 책이다.

저자는 책을 크게 여덟개의 장으로 나누어 놓았다. 치유healing, 의미meaning, 유행fashion, 위대한 완성great perfection, 사람들people, 디자인design,사랑love, 그리고 방문visiting.

"이 여덟 개의 단어들은 정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게 정원은 이것입니다'라는 답이 될 듯하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첫 페이지의 왼쪽 사진을 보면 나무 그늘 사이에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보인다.

'정원에 의자를 놓는 건 걸음을 잠깐 멈추라는 의미ㅏ. 내가 걷고 있으면 풍경도 나와 함께 걷는다. 내가 멈춰야 비로소 나와 함께 걷고 있던 풍경의 속도를 알고 있다. (...) 가끔 세상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땐 차라리 앉아서 멈춰야 한다. 그래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고, 나를 둘러싼 풍경이 보인다.'


책의 표지도, 첫 이야기도 처칠의 정원으로 시작한다.
이 책을 읽고 마침 제프리 베스트의 처칠 평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를 읽었어서,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읽는 책에 나온 처칠의 이야기가 가슴 깊이 와닿는다.

정치권에서 밀려나 글로 생계를 이어가며 차트웰에서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며 지내게 된다. 말로는 평화로운 나날들 같지만, 처칠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간들이고, 그는 정원가꾸기와 그림으로 그 괴로움을 달래게 된다.

조금 길지만, 이 책을 볼 사람, 이 책을 본 사람들을 위해 평전에 나온 차트웰 이야기를 옮겨본다.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 중인 현재의 차트웰 저택은 거의 전적으로 처칠 가족이 꾸민 것이다. 처음 살 당시에는 폐가에 가까운 볼품없는 집이었고 정원이나 마당도 지금처럼 다채롭거나 넓지 않았다. 단 하나 같은 것이 있다면 작은 언덕 너머 남쪽으로 끝없이 숲이 펼쳐진 멋진 경치였다. 처칠은 18세기 귀족의 눈으로 집을 살펴본 후 즉시 그 가치를 알아보고 얼마나 비용이 들든 간에 그 가치를 실현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어쩌면 그는 승리를 이끌어 낼 전략을 구상하며 전쟁터를 살피는 장군의 시선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승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승리는 거의 20년 동안 클레먼타인이 가슴을 졸이는 비용을 들여서 거둔 것이었다. (...) 처칠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런던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원과 마당을 손질했다. 현재의 상태는 그가 작업을 마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채소밭 주위로 직접 긴 벽돌담을 쌓았고 과일나무를 심었으며 메리를 위해 정자를 지었다. 다른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준 나무집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처칠이 차트웰에서 올린 가장 큰 성과는 수생 식물이 가득한 연못과 약 24도까지 물을 데울 수 있는 호화로운 수영장, 그리고 계곡 아래의 호수로 물을 내려 보내는 자연스런 급수 방식이었다. (...) 차트웰 저택은 처칠의 친구와 친척들이 언제나 환영받는 곳이면서, 1939년 9월 까지는 영국 역사상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가까운 친구들로 구성된 측근을 비롯하여 처칠의 정치적 동료와 지지자들은 대안적인 사교 클럽과 같은 차트웰 저택에서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210- '

왕립원예학회 위즐리 가든의 온실과 앞마당
몽글몽글 올라온 보랏빛 알리윰이 탐스럽다.

세계최고의 식물원인 큐가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결핍은 열정을 부른다'는 결론을 꺼내 노았다.

'부족함은 늘 열망의 원동력이 된다. 때론 풍요롭다는 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굳이 많이 지니고 태어나지 못했다고 우리 삶을 원망할 이유도 없는 듯하다.'

저자의 정원 사색들이 녹색 사진들만큼이나 마음을 달래고 얼러 준다.

사진은 시인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 정원. 시인도 정원 이름도 낯설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낯익어지는 유명한 정원이다.

정원은 분명 돈이 많은 사람들의 취미였다. 돈이 든다. 근데, 이게 돈만 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든다. 그래서 특별하다. 더욱 특별하다.

정원의 나라 영국은 400년 이상의 정원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400년 .. 휴우..
어떤 가문의 정원은 400년간 세대가 아홉번 바뀌기도 했다고 한다. 정원 모퉁이에서 증조, 고조가 심어 놓은 나무가 있고, 그 옆 9대 할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장미 정원에서 21세기의 장미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데이비드 오스틴의 신종 장미가 꽃을 피우는 풍경.

'정원은 한 세대로는 완성될 수 없다. 느리고 천천히 가는 작업이다. 그래서 난 가끔 절망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급하고, 빨라야 하고, 묵은 것을 참아낼 줄 모르는 우리가 과연 400년 후 후손에게까지 정원의 꿈을 이어가도록 할 수 있을까.'

'쓸쓸한 사치스러움' 이란 챕터에 나오는 블렌하임 정원의 17세기 포멀 정원. 바로크 시대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데, 정작 이 곳에 살았던 여인들은 꽃이 없는 정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

또 처칠이다.

처칠 가문 (말보로 공작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300년 역사의 블렌하임 팰리스 정원. 왕궁을 능가하는 거대한 건물과 바로크식 정원의 호화로움은 당시 영국을 떠들석하게 할 정도였다고 하나, 이 사치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말보로 가문은 몇 번의 가산탕진을 겪었고, 9대 말보로 공작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 미국 철도회사 상속녀와 계약결혼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결혼은 로맨스 소설에서와는 달리 파탄과 이혼의 결말..


이 책의 대부분은 녹색 사진이다. 그건 내가 이 책이 '치유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번떡번떡한 종이질보다 재생지에 그 녹색이 더 잘 우러났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이지만, 재생지가 심히 거슬리는 사람에게는 이 포토리뷰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무튼, 90%의 녹색 정원 사진이 나오는 와중에.. 진짜 눈이 녹색으로 정화된다.
가끔 이렇게 눈에 덮인 하얀 정원이 나온다.

사진의 눈덮인 정원은 스터들리 로열 워터 가든.. 물의 정원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수도사의 정원

트렌섬 정원의 이탈리아 정원, 위에도 언급한 바로크 정원이다. 소박함 보다는 화려함, 자유로움 보다는 위엄과 엄격함이 있는 정원.

드디어 나왔다. 영국 풍경식 정원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인구가 급격히 늘자 영국 전역의 숲을 개간해 먹을거리, 입을거리를 만들 수 있는 양이나 가축을 키우는 초원으로 바꾸고, 이 초원이 풍경식 초원의 모태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프랑스 바로크 문화에 대한 반발로 '자유로움 liberty'라는 슬로건을 정형화된 틀을 깨고 자유로워지는 풍경식 정원의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저자의 말을 옮겨보면,
'모든 창조가 그러하듯, 하늘 아래 뚝 떨어진 새로움이란 없다. 정원 역시 결국 우리 삶, 정신, 영혼이 녹아든 결과물일 뿐이다.'

보는 즐거움, 읽는 즐거움..

영국 정원이라는 독특한 소재의 책이 나왔다고 해서, 이런 책은 사 줘야해.라고 샀지만,
기대 이상의 책이다.

저자의 사색과 오랜 역사의 영국 정원들을 보는 즐거움.
확실한 일상탈출이고, 안구정화다.

영국에서 생활하는 6년 경력의 가든 디자이너로서의 저자의 전문성이 잘 드러나면서도, 글이 쉽게 읽히고, 거기에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저자의 사색까지 곁들이니 만족스러운 글이고,
거기에 그런 저자의 시야 (남편의 사진들인데, 맘대로 부부의 시야는 닮았을 꺼라고 생각해버린다.) 또한 곁들여져서 프로 사진가의 사진보다 와닿는다.

일상의 쉼표를 찾는 사람에게 많이많이 선물하고 싶은 책.

*리뷰가 길어져, 옮겨두고 싶은 사진들 몇장을 더 페이퍼에 먼댓글로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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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국 정원 산책에서 옮기는 사진들
    from 책과 고양이와 이대호 2010-09-26 15:49 
    ... 리뷰에 이어    녹색 정원으로 눈 씻으세요  : )                                
  2. 요즘 읽는 책들에서 빠지지 않는 처칠 이야기
    from 책과 고양이와 이대호 2010-09-27 11:06 
    처칠이 워낙 이렇게 많이 인용되는 인물이었던가, 하필 내가 읽는 책들에 주구장창 나오는 것일까?  시작은 <영국 정원산책>이었다. 표지에서부터 처칠의 정원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은 것이 9월 초. 9월 8일에 포토리뷰를 위해 책사진을 찍었으나,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읽은 책이 <스티브 잡스처럼 프레젠테이션 하라> 여기에도 명연설가로서의 처칠이 잡스와 비교되어 잠깐이나마 언급된다
 
 
blanca 2010-09-26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니까 하이드님이 권해 주신 <작가의 집>의 비타 색빌웨스트의 영국식 정원이 떠올랐어요. 역시 여기에도 나왔군요. 다시 한 번 찾아 보게 됩니다. 하이드님은 보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을 함께 주는 책들을 많이 권해 주시네요^^실제로 한 번 가서 봤으면 좋겠어요.

하이드 2010-09-26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안그래도 '작가의 집' 이야기 같이 하려고 책 찾으려고 .. 까지 생각하다가...까먹고 있었는데 ^^;
생각난김에 또 찾아봐야겠네요. 예전에는 아무리 책이 많아도 어디 있는지 다 알았는데, 요즘은 몰라요 .. 우울 ;;

이 책 근래 산 30여권 중에 소장용으로 살아 남은 두고두고 봐도 좋을 책이에요. ^^

하이드 2010-09-2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하고, 후지와라 신야의 <메멘토 모리> 도 좋아서 포토리뷰 올려야지 하고 있는데, 이 책은 한 번 보는 데 뭔가 에너지가 소모되어서 꺼내 놓고, 펼치지를 못하고 있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