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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소설 - 하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초연애소설을 쓰겠다고 말했던 미즈무라 미나에는 7년여간의 작업 끝에 일본 근대를 배경으로 세기의 로맨스 '폭풍의 언덕'의 일본판과도 같은 멋진 연애소설을 썼고, 거기에 일본의 근대화, 일본 마지막 부르주아 계급 이야기, 세대의 단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격정의 로맨스를 담아냈다. 짝짝짝
천페이지가 넘는 소설이다보니 두툼하다. 막상 '폭풍의 언덕'은 상권을 대부분 읽은 다음에야 시작되고,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 상권의 맨 뒷부분이다보니, '이런'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본격소설에 들어가기 전의 길고 긴 이야기' 라는 챕터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본격소설'을 읽기 전에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고, 재미있고, 끝까지 읽고 나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신분의 차를 뛰어넘는 다로의 사랑을 도와주고, 지켜보는 후미코의 입을 통해 이야기는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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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로 군은 아이한테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될 정도로 온몸으로 결사적인 기합을 발하며, 거기에 자기 자신이 밀릴 듯하면서 펼친 손바닥을 요코 아가씨 가슴께에 들이댔습니다. 그 세 개의 작은 돌멩이를 줍는 일이 그 아이의 여름방학의 전부였다는 사실이, 힘주어 젖힌 다섯 손가락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연민이라고도 경멸이라고도 감동이라고도 할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습니다. -4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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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상권 479쪽에서야 요코에게 처음으로 다가가는 다로군)
이것은 전쟁후 만주에서 넘어온 몸과 마음 모두 가난에 찌든 인력거꾼의 조카네 가족, 그 중에서도 차별받는 중국인 원주민의 피가 섞인 조카의 조카인 아즈마 다로와 일본의 마지막 부르주아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타가와가 요코 아가씨와의 신분의 벽을 뛰어넘고, 나중에 또 다른 벽도 뛰어넘는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요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엄마와 이모들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하루에, 나쓰에, 후유에. 한명만 있어도 화려한 그녀들은 셋이 모여있을때 그 아름다움은 세배가 아니라 몇십배가 된다고 했다. 화려한 꽃밭같은 미모의 세자매. 여름이면 부자들의 고급휴양지인 가루지가와에 머문다. 하루에의 딸 마리, 에리, 나쓰에의 딸 유코, 요코, 그리고 그들의 별장 맞은편에 꼭 같은 모양으로 있는 시게미쓰가의 서양관. 세자매의 사이구사가는 시게미쓰가를 동경한다. 20년대에 태어난 그들은 가장 먼저 유럽이니 미국이니 외국에 나간 세대이고, 서양식 옷을 입고, 외국잡지를 보고 문화를 누리던 당시의 상류층 계급이었다. 그런 그들 중에서도 뭔가 외모도 성정도 그들과는 달랐던 요코는 몸도 약하고, 외모도 뛰어나지 않다. 그런 그녀가 각기 다른 타입의 백마탄 왕자님 두 명에게 동시에 정말 '소설에나 나올법한' 불멸의 사랑을 받는다.
연애 이야기도 물론 재미있지만, 세자매 이야기도 흥미롭다. 시골에서 자란 후미코의 눈에는 별세계와도 같았던 세상에 대한 묘사. 식모라고 부르던 것을 가정부라고 불러야 하는 봉건적인 세대의 마지막 부르주아 계급으로서의 세 자매. 시대의 뒤꼍으로 밀려난채 세상에 투정을 부리는 늙은이로 주저앉고, 가난해져버렸지만.. 그들의 프라이드는 연약할지언정 그들과 함께 살아남았다.
"맞아요, 왜 이런 사람이 오페라 구경을 할까 싶은 작자들까지도 오페라, 오페라 하고 떠들어대거든요."
"3층 테라스 좌석 같은 것에도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돈을 치르면서."
"맞아, 그러니까 모처럼 오페라를 보러가도 글쎄, 신주쿠 영화관으로 알고 잘못 알고 오신 거 아니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얼굴뿐이야."
"호호호."
"멋내는 것도 여전히 시원찮아서 극장 분위기나 망치고"
"맞아, 맞아."
"그래서 저는요, 최근 정말이지 너무너무 지겨워서 이렇게 집에서만 들어요."
"네, 그게 제일입니다."
"이상한 것들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요." -224쪽-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앞서 말했듯이, 마지막 부르주아 계급의 이야기, 그리고 세대 단절의 이야기라 하였다. 세대 단절의 이야기는 우리와도 비슷하다. 세자매 시대에 있었던 인간의 패기와 뛰어남은 그 아랫세대에서는 뭉퉁그려졌다. 모두가 같아졌다.후유에가 말한 것처럼 덩치만 커지고, 사람은 계속 작아져만간다. 는 것에 더해 아즈마 다로는 이야기를 듣는 유스케에게 말한다.
"경박한 건가요?"
이십육 년간의 인생에서, 유스케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경박..."
남자는 그렇게 되풀이하고 나서 툭 내던지듯 말했다.
"경박을 넘어 희박이죠."
샴페인 글라스를 눈높이까지 올려 거품을 바라보면서 말을 잇는다.
"이 거품 같은 느낌...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417쪽-
책을 덮고 나면, 연애에 대한 벅찬 느낌과 함께 한 시대의 마감과 다음 세대로의 과도기를 본 것에 대한 진한 허무와 여운을 느끼게 된다. 샴페인 거품과도 같은 경박하다 못해 희박한 이 세대가 지나면 다음에는 어떤 세대가 와서 또 이 세대를 마감하고, 대체할지 궁금해진다. 분명한 것은 그 때에도 격정의 로맨스는 존재하리라. 존재해야만 하리라. 는 것.
※책에는 가루이자와라는 곳의 역사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흑백 사진들은 묘하게 감동적이다. 소설 속에 끼워져 있는 '사진'의 역할이란 것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이 정도의 강한 느낌을 주는 흑백사진이라는 것은 장르불문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