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웬만해서는 누가 업어가도 깨지않는 나를 깨울만큼 물소리는 요란했다.
보름쯤 비워두었던 너덜이에 저녁 무렵에야 올라오니 집은 그야말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왜 그런지 지난 번부터 전기가 불안정하여 본의아니게 냉동실을 깨끗이 비우고 청소를 해야했고
김치냉장고는 어차피 회복불능일 듯 하여 열어보지도 않았다.
보일러는 뭔가가 시원치 않아서 방이 데워지는데 천년 쯤 걸리는 느낌이었고
2층의 나무보일러는 연통이 어찌 되었다나 불길이 거꾸로 치솟아 나오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하나 겨우 제대로 돌아가는 석유난로 앞에 손바닥만한 담요를 깔고
두 아이와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너 시간을 오들오들 떠는데 낮부터 지끈거리던 머리가 어찌나 아프던지...
그 와중에 30분이나 한 시간마다 나무보일러에 땔감 넣으러 나가면 태민이는 그악스럽게도 울었다.
전쟁같은 한 나절을 보내고 겨우 온기가 도는 방에서 막 잠이 든 참이었는데
더운 물이 도니, 수도꼭지는 물론 변기 속 물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2층 목욕탕 물이 녹았나보다
산더미 같이 모아 온 빨래를 내일은 다 할 수 있겠구나 좋아했는데
심상치 않은 물소리의 정체는 벽 속에서 얼어터진 수도관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미니아빠가 손전등도 없이 찬바람 속을 이리저리 뛰더니
어찌어찌 하여 흘러나오던 물은 멈추었다.
정전이 되니 열선이 제 기능을 못해서 수도관이 얼고, 냉동실에 든 음식들은 상하고
보일러는 어딘가 밸브가 헐거워 물이 새어나가느라 제대로 작동이 안 되었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면서 2층 수도 밸브를 열지 못하니 세탁기는 못 쓸테고
급한 빨래 몇 가지는 1층에서 손으로 빨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온 가족 내복이며 여벌 옷이 전혀 없는 상태라 귀가 번쩍 뜨였다.
새해가 되었는데 예전에는 올해는 이래야지 저래야지 각오도 다지곤 했는데
올해는 심드렁하니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 좀 서글프기도 했었다.
신랑 말을 듣고 보니 올해는 상식적인 수준의 융통성을
다름아닌 나도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새해소망이 생겼다.
저것 참 보기 싫은데 어쩌지? 하면서도 치우면 된다는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벌 옷이 없는데 세탁기를 돌릴 수 없으니 손빨래를 해야겠구나 라는 단순한 해결책도 찾아내지 못하니
이것이 진정 꽉 막히고 굳은 생각 탓인지 게으름 탓인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어쨋든 내게는 융통성이 절실하기는 한 것이다.
심지어 어젯밤 방을 데우는데 천년이 걸린 것도
2층방 밸브가 잠긴 것을 점검해보지 않은 탓이었다는 것 아닌가?
(신랑이 와서야 겨우 밸브를 열어주었는데 한 시간 남짓 만에 방이 따뜻해졌다.)
온 가족의 내의와 겉옷 한 벌씩을 빨간 고무함지에 담아놓고 보니 한숨부터 났지만
나도 올해는 융통성을 발휘해가며 효율적으로(?) 살아보자 마음 먹고
의욕적으로 빨래를 시작했다.
사이사이 틈틈이 온돌 아궁이와 나무보일러 양쪽에 땔감을 넣으러 푸르르 달려갔다오고
애들 밥 챙겨먹이고 온갖 요구에 부응해 가면서 어찌나 열심히 빨았던지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봐 온수 밸브를 잠궈놓아 찬물만 써야했는데도
저녁 무렵에는 다 마칠 수 있었다.
가지고 올라간 빨랫감 전체 양에 비하면 빨아놓은 것은 새 발의 피였지만
가슴에는 뭉게뭉게 뿌듯함이 소용돌이 쳤다.
내친 김에 조금 더 할까?
고민하다가 충분히 애 쓴 하루였다고 자평하며 저녁만 지어먹고 9시에 땔감넣기도 끝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난로에 석유를 붓다가 장갑에 묻는 바람에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했는데
불도 다 꺼버린 1층으로 내려가기가 싫은 거였다.
그러다가 수도관 속에 남은 물로 손 정도는 얼마든지 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아니나 다를까 비누로 손을 다 씻을 때까지 물이 끊기지 않고 나와주었다.
흡족해하며 돌아서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수도꼭지를 모두 열어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럴수 럴수 이럴 수가!!!
변기, 세탁기를 포함하여 6개의 수도관 중 잠긴 것은 두 개 뿐이었던 것이다.
아침에 한 번 확인했더라면 힘들게 손빨래 안해도 되고 급한 빨래들 다 마저 할 수 있었을텐데
원대하지도 않고 소박하기 그지 없는 새해소망이 품어 본 첫날부터 와그르르 어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