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뜰에서 밖으로 나가는 싸리문을 열으면 조금 걸어 작은 산소가 두 개 있다. 외할아버지는 그 산소 근처에서 낫을 들고 뭘 만들고 계셨다. 가까이 가니 굵은 갈래난 가지를 다듬어 지개를 만들고 계셨다. 지개위에 망태를 얹고 옥수수를 가득 담아 옮기셨다. 백발의 외할아버지는 힘이 장사처럼 보였다.
난 아침식사를 마치고 또다시 숲 탐험에 나섰다. 외할아버지가 지개 만들고 남아 버린 가지를 주워들고 풀 숲을 헤쳐나가면서 탐험가가 되었다. 곧 다가올 가을의 숲은 나무 사이로 바람을 일으키고 해그림 산을 쳐다보면 그림자도 빨리 날 덮어왔다. 불빛이 거의 없는 시골마을이 무서웠다.
내 어릴 적 5살 때엔 집앞 골목길도 흙으로 되어 있었다. 흙을 파다보면 땅강아지가 나온다. 지금이라면 징그러워 만지지 못했을 듯한데, 그때는 엄지와 검지로 잡아보면서 수염이 많이 난듯한 입을 즐겁게 쳐다보았다. 고무신도 뒤집어서 모래흙이 많은 곳에서 놀때면 배도 되고 차도 되었다.
외할머니는 들깻잎을 떼어다가 씻어 그위에 켜켜 얀념을 얹어 접시에 담아오셨다. 향긋한 향과 상큼했던 느낌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모가 8월에 친정엄마에게 강원도옥수수를 100개 넣어진 자루를 택배로 보내와서 나도 얻어먹고 시댁에도 갖다드렸다. 엄마는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시고 쪄낸 옥수수를 들고 여동생 집들이 때 가져오셨다. 쫀득하고 맛있는 옥수수를 먹느라 여동생이 준비한 찜닭과 다른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찰옥수수만 보면 강원도가 떠오른다. 가을이 되어가면 옥수수를 몇 가닥 수염만 떼고 엮어서 처마밑에 매 달고 방문을 열어 달린 옥수수를 보고 있으면 흔들릴 때마다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내 눈을 부시게 한다. 혼자 놀이에 잘 빠지는 나는 언니와 동생들이 어디 있는지 가끔 찾아볼 때가 있다. 부엌문을 열어 아궁이 앞에서 잔 가지를 넣고 집풀도 넣고 부지깽이로 이리저리 휘짓다가 풀무를 손으로 돌려주어 바람을 넣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떡밥을 짓는다고 하셨다.
밥을 지어 외할아버지는 떡매질을 하고 외할머니는 뜨거운 떡을 콩고물에 묻혀서 길게 늘여서 칼로 쑥쑥 잘라 주셨다. 밥이 그대로 씹히는것도 있었다. 그래도 맛있다고 호호하며 언니와 동생들과 떡에 설탕도 뿌려서 먹기도 했다. 요즘은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떡판에 모양낸 절편을 좋아한다. 또 깨송편도 좋아하고 감자송편도 좋아한다.
어디를 남편따라 여핸을 하다가도 뿌연색의 강원도 찰옥수수를 볼 때면, 커다란 다라이에 큰 비닐봉지를 넣어 그 안에 감자송편을 담아 파는 난전의 떡집을 보아도 늦은 여름과 초가을을 보냈던 강원도의 생활을 잊을 수 없다. 몇 달전 강원도 가까이의 경북 끝인 태백과 억지춘양의 시장 속에서 둥근 강원도 옥수수 엿을 사서 차 안에서 손망치질로 깨어 먹을 때도 외할머니께서 긴 나무주걱을 휘져휘져 한참을 다려 엿을 만들어주셨던 것도 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떠올라 새록새록했다.
가을이 오기전에 난 아빠와 둘이서 여행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치악산을 지나 아래로 향했다. 양평에서 한의원을 하시는 큰아버지집에 들렸다. 반질거리듯 윤기나게 닦여진 마루에 앉아서 이야길 나누고 마당에 있는 둥근 화단을 보며 우리집에도 화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우리집 뒷 마당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다.
큰아버지 집을 나서서 수원에 들렸다. 수원버스터미널에 내려서 바로 가까이 여러가지를 파는 수퍼마켓 주인에게 아버지는 누나라고 불렀다. 반점에 들려 짜장면을 사먹었다. 벽에 걸린 공중전화는 70년대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교환원을 부르는 그런 전화기 였다. 걸려있는 스피커를 귀에 갖다대고 빙빙 전화기를 돌려 그 앞에서 말하는 그런 전화기가 있었다. 수원의 친척집에 들렸다. 오빠와 언니가 있었다. 텟마루에 앉아있는데 쉴새없이 파리들이 달려 들었다. 파리떼가 싫어서 뒷 밭으로 갔다. 난 그곳에서 뱀을 보았고 긴 나무가지 끝이 갈라진 것으로 언니와 오빠가 뱀을 잡았다. 그 때 그 뱀을 팔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징그럽다.
아빠와 나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하여 걸어간 골목길에는 집들이 모두 기와집들이 대부분 이었고 크고 높은 나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흰 수염이 긴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틀니를 빼서 굵은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서 양치지를 하셨다. 방 옆에 깊이 들어간 부엌은 바닥이나 부뚜막이나 흰 네모난 작은 타일들이 붙어져 있었다. 부엌에서 또 아래로 내려가는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는 연탄이 가득 쌓여져 있었다. 늙은 호호할아버지는 신문을 읽으셨고 식사 때는 할머니께서 반찬으로 맑은 물김치를 내 오셨다. 열무로 만든 물김치는 보기에는 별로 맛이 없을 듯 했는데 외할머니의 깻잎김치만큼이나 맛있는 것이었다. 내가 많이 크고 안 이야기이지만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 시아버님과 며느리간이라고 했다. 모두 돌아가시고 그렇게 두분만 남아서 시아버님을 며느리가 모시고 있다고 했다. 난 그 이야기에 많이 놀랐지만 물김치는 또 다시 먹고 싶었다.
며칠을 친척집을 다니며 인사를 다닌 나는 그때부터 기차여행을 좋아했는 것 같다. 기차 칸칸 사이에 문이 없었던 그때인데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고 아빠가 밖을 내다 보시며 지역을 알려줄 때면 신기하게 바라보던 난 행운아란 생각을 했다. 초등 5학년 때의 여름방학은 추억으로 가득했다. 어려서부터 잔 병치레가 많았던 날 유난히 아껴주셨던 아버지는 언제나 날 업고 다니셨고 직장 생활을 마치고 집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면 오트바이를 타고 마중나오신 아빠를 만날 때가 많았다. 아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윗 조상들도 모두 기관지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결혼할 남편을 만났던 93년 여름에 아빠는 천식발작을 일으키셨고 그렇게 날 떠났다.
내가 96년 봄에 결혼식을 마치고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아이가 생겨 배가 부룩했을 여름 끝자락에 만선신부전증으로 혈액투석을 하던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난 그렇게 억장이 두 번 무너졌다. 가까이 사시는 시댁에서 제사 음식준비를 하던 2003년 겨울에 천식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갔고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명을 붙들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또 발작이 있었다. 지금은 조심하며 생활을 해서 매일매일 쓰는 흡입약을 하지 않고 응급약만 가지고 다니지만 여름에 세상을 떠난 아빠와 언니가 너무도 보고싶어 멍해지기도 자주 했다.
언젠가 두 대째의 오트바이를 직접 조립하신 아버지가 강원도 홍천의 외가댁까지 오트바이를 몰고 다녀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는 청도운문사까지 오트바이를 몰고 오셔서 버스를 타고 먼저 도착한 우리를 만났을 때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목에 먼지가 가득 해진 수건이 걸려있는 모습을 하시고 신이 나서 웃으셨던 아버지가 지금 여름에 또 떠오른다. 입추도 벌써 한 달전에 지나고 전번 주말 가족여행으로 친구네와 함께 밀양표충사에 갔었다. 오트바이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여름 땡볕에 웃음짓던 아빠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