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새벽5시가 다 되어 잠이 들었던 나를 목소리만 듣고도 아신다. "너 또 늦게 잤구나. 다름이 아니라 저녁에 식사하러 가족 모두 왔다가렴. 강원도서 이모가 옥수수 보내왔는데 너 시어머님 좀 갖다드려라. 옥수수 좋아하시잖아?" 잠결에 꿈결에 난 그런다고 답했다.
8월이 시작되면 12살의 초등5학년의 나를 떠올린다. 강원도 홍천이 고향인 친정엄마는 자주 나에게 어린시절과 결혼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여름방학이면 가족모두 강원도 외가집으로 여행을 갔다.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탔고 원주에서는 외가집까지 택시를 탔다. 택시안에서 그 당시 대중가요였던 남진의 '저푸른초원위에.. ', 토끼소녀나 하춘하 노래를 부르면서 외가집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시끄러웠을 것 같은데 택시기사가 노래부르는 우리들을 칭찬했던 것 같다.
홍천 외가집으로 가는 길은 길고 큰 도로를 따라 언덕을 넘어야했다. 비가오면 그 큰 도로가 언덕위부터 아래로 빗물이 강처럼 흘러내렸지만 어린 나는 그것도 즐거워 비를 맞으며 도로의 빗물을발로 튕기며 뛰어 놀았다. 도로에 바로 집이 있던 외가집 입구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다. 부엌, 방, 마루, 방으로 일자(ㅡ)로 연결된 집은 도로를 지나는 차와 먼지와 바람을 그대로 다 받아서 어두운 마루 바닥은 항상 먼지로 가득했다.
집을 쳐다보며 왼쪽으로 돌아가면 바로 긴 창고가 있다. 창고 한쪽에는 화장실도 있지만 따로 등을 달아놓지 않아서 밤에는 무서워 그곳을 가지 못한다. 화장실 아래는 돼지축사가 만들어져 있고 창고가 있는 바깥에는 큰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도로쪽으로 다리가 만들어져 있고 다리에 검은튜브를 매달아 물에 들어가 장난치며 놀았다.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노는 방법도 많았다. 난 대구에서 온 사투리를 쓰는 까만 얼굴의 여자아이였다.
외가집 건너편의 약국의 아들도 나와 또래여서 함께놀았고 우리 형제 4명과 동네아이들은 금새 친해지고 함께 놀러다녔다. 버드나무 앞에는 펌프가 있다. 아마 우물펌프였던 것 같다. 처음 물을 빠지고 나면 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야하는데 그물을 마중물이라 한다.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으르 해보았다. 더운 여름에는 그 물이 더 차가워서 머리를 감으면 머리 전체가 아프고 멍했다.
이른 아침, 동네아이들과 난 다리는 지나 왼쪽 논밭길을 걸어 작은 연못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이들은 나에게 실을 매단 긴 나무가지를 주었고 그 끝에는 풀색의 왕잠자리를 잡아서 매달아 주었다. 그리고 그 가지를 둥글게 돌려보라고 했다. 빙빙 돌리는데 잠자리에 잠자리가 붙었다. 쉽게 떼어지지 않아서 손으로 떼어냈다. 그렇게 잡은 왕잠자리는 어른들 긴 손가락보다도 큰 것 같았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나를 웃으며 보던 아이들도 나처럼 까맣게 탄 얼굴이었다.
외가집으로 오는 길에는 옥수수 밭이 많이 있다. 노란 옥수수는 사료옥수수라고 했다. 닭이 옥수수를 먹고 배설한 배설물속의 씨앗이 퍼트린 옥수수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지 않고 사료로 쓴다고 했다. 정말 그런것일까? 외가집으로 들어오는데 외할머니께서 부엌에서 부르셨다. 부엌문을 열어 한 계단을 내려가야 부엌이 크게 있다.오른쪽으로 부뚜막이 있고 부뚜막 끝에 옆 방과 연결된 작은 문이 있다. 큰 무쇠솥을 열어보여주셨다. 그 안에는 연한 색깔의 통통하게 익은 옥수수가 가득했다. 찰옥수수라고 했다. 나보다 두살위인 막내 외삼촌은 자주 나를 놀려서 날 울렸고 키가 큰 백발이셨던 외할아버지는 날 안아서 달래주셨다.
친정엄마집에서 식사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시댁에 들렸다. 그리고 친정엄마가 갖다드리라는 옥수수 자루를 건네드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시댁과는 바로 한 블록지나 우리아파트가 있다. 시어머님은 고맙다고 하시며 지리산의 대학옥수수를 따로 주문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당신은 옥수수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좀 가져가라는 것을 뿌리치며 그냥 왔다.
아침에 칠성시장에 들렸다. 남편 출근길에 들린 칠성시장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부쩍대고 고등어 배를 갈라 다듬어 소금을 뿌려 자반을 만드는 아저씨를 지나 식육점에도 들렸고 큰 딸이 좋아하는 새송이버섯을 큰 봉지로 두 봉지 샀다. 버섯 가게를 지나 한참 가면 콩나물을 파시는 할머니가 있다. 콩나물도 사고 오이도 사고 부추도 한단 샀다. 무거운 두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왔던 길을 걸어 칠성교를 지나 집으로 왔다.
이곳저곳 옥수수 껍질과 수염들이 모여있다. 난장의 사람들은 옥수수를 팔고 풋고추와 수박도 팔고 있다. 옥수수앞에 툭 튀어나온 수염들을 보면서 난 또다시 12살의 강원도 여행을 떠올렸다. 무쇠솥 속의 뿌연 찰옥수수가 먹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