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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씨앗일까? 2 ㅣ 샘터 솔방울 인물 15
황병기 외 지음, 유준재 그림 / 샘터사 / 2014년 2월
평점 :
제목만
들어서는 처음에 아이들이 씨앗을 심고 가꾸는 과학이야기가 적혀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표지를 보고 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읽은 책은 '나는
무슨 씨앗일까? 2편' 이다. 이처럼 책이 몇 권으로 시리즈가 되어 나눠져 있을 때는 앞서 나온 책의 내용이 궁금해지고 뒤에 나올 책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지금의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더 어린동생들은 위인전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위인들의 이야기이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한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닌 글쓴이가 모두 주인공들이라 7명이다. 최초 여자 민항기 기장 신수진, 곤충박사 원갑재,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도선사 윤병원, 한글 디자이너 석금호, 국악인 황병기, 민들레 수사 서영남의 이야기이다. 7명 각자 글쓴이가 되어 글을 읽는
이에게 자신의 꿈을 어떻게 이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야기는 그들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로써 민항기 기장이 된 신수진씨는 우리나라 민간 항공기 역사상 60년 만에 첫 여성기장이라고 한다. 영어교육을 일찍 받고 외교관을
꿈꾸며 공부하다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관광용 경비행기를 타 보게 되고는 비행조종을 하고 싶어서 미국에서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고 다시 한국에 왔지만 여자를 조종사로 뽑는 항공사가 없었지만 비행을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미국으로 가서 비행학교에 입학 했다. 남자들도
힘든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비행 교관 자격증을 따고나니 한국의 항공회사에서 여성에게도 조종사 문호를 개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항공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일 년 후 부기장이 되고 기장이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잘 견뎌내서 기장이 되었다. 신수진씨는 맡은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자세와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후배에게도 배우려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고 한다.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책속에는 여러 직업에 대한 설명과 어려운 낱말설명이 따로 있다.
국립
수목원이 있는 광릉에서 태어난 곤충박사 원갑재씨는 일찍부터 곤충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4,5학년 무렵 나비를 채집하다가 학교 근처에 임업 시험장
광릉 출장소에 해충을 연구하는 학자와 생물학과 대학생들을 만나면서 곤충에 대해 물어보고 때로는 심부름을 하면서 곤충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집안에서 중학교 진학은 포기하라고해서 친구네 아버지를 찾아가서 돈을 빌려 원서를 접수하고
헌책방에서 교과서를 구해서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었다. 임업 시험장연구원 사이에서 곤충에 일가견이 있는 동네
소년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일을 돕게 되었다가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긴 연구원 한 분을 따라가 보조 교사로 활동하게 되었고, 1972년 국립
과학관이 개관될 때 특별 채용되면서 본격적으로 곤충 표본을 제작하게 되었다. 책 속에는 곤충을 채집하는 여러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곤충박사’라는 학위는 없는 호칭을 듣고 있다고 한다. 진짜 박사들에게도 자문을 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원갑재씨에게 박사학위를 줄 수
없을까? 조금 안타까웠다. 이 책을 읽는 청소년이나 어린 학생들이 곤충박사가 되는 꿈을 꾸게 된다면 그 꿈을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이 필요할
것이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옷을 만드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이영희씨가 조금 크자, 어머니는 집안일을 가르쳤다.
중학교 때 솜저고리를 만들어가는 숙제도 혼자서 다 할 수 있게 도와주지는 않고 대신해주지 않았다. 부업을 하면서 이불을 만들어 팔다가 친척에게
속아 재산을 다 날리고 늦은 마흔의 나이에 옷가게를 차렸다. ‘이영희 한국의상’이라는 간판을 걸고 한복을 만들어 팔았다. 한국복식을 연구한
1세대 민속학자인 석주선 박사의 책을 찾아 읽고 또 박물관에 전시된 의복들을 보며 공부했다. 그 후 대학원에 들어가 염직공예를 배우고 많이
공부를 했다. 1980년, 한국의상협회가 창립되면서 한복 디자이너 10여 명이 합동 패션쇼를 시작으로 작품이 모이는 대로 계속 패션쇼를 열었다고
한다. 1993년 3월, 파리 패션쇼에서 저고리 없이 치마를 마음껏 활용한 옷이 ‘바람의 옷’이란 타이틀을 받게 되었다. 뉴욕에 ‘이영희
박물관’을 열었다. 한복뿐 아니라 우리 문화를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해오고 있다. 자신만의 영감, 창의성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고 한다. 새것은
옛것에서 비롯되며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정성’이라고 한다.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익숙한 것에서 창의성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한다.
선박의
안전을 책임지는 도선사 윤병원씨는 학창 시절에 성적이 별로 좋지 못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부산의 상선 전문대학에 진학을 했다. 졸업한 후에는
미국과 일본 합작 회사에서 외항선을 타는 항해사가 되어, 바다 곳곳을 누볐다. 그러다가 도선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도선사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쉬는 시간 대부분을 영어공부를 하며 보냈다. 선박이 세계 각국으로 다니기 때문에 당장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노트정리를 열심히 해서 운항 과목과 법규를 800장씩 정리하여 두 권짜리 책으로 만들었다. 정리한 자습서는 이후에 후배 선장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용기란 ‘겁이 없는 게 아니라 어렵고 무서워도 참고 도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도전은 실패가 아니고 포기에서 끝난다고
한다.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기분이 들어도 꾸준히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윤병원씨가 공부시작하면서 다짐한 말을
옮겨본다.
71쪽-
‘포기하지만
않으면 할 수 있어. 남보다 머리가 나쁘면 두 배로 노력하면 되잖아? 난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두 배로 노력해 보자.’
‘오늘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내일 거둘 게 없지.’
한글디자이너
석금호씨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너무 반가웠다. 책 속에 소개하는 식자기는 내가 직장 다닐 때 광고기획실에 있어서 옆 사무실에 일을 맡기면서 많이
접했던 것이고, 결혼 후 컴퓨터를 많이 접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 때 폰트를 샀던 기억이 난다. 그때 폰트를 구입하면 컴퓨터에 저장하는 식으로
다운로드 받는데 컴퓨터 고유번호가 저장되어 다른 컴퓨터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지금은 돈 주고 산 폰트를 다 잃어버렸지만
‘산돌광수체’가 석금호씨가 만든 것이라니 반가웠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석금호씨는 대학 졸업 후 유명했던 국제 잡지사에
취직하고 그곳에서 한글글꼴 연구의 선구자 김진평선배를 만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진 식자기와 한글 자판을 수입해서 쓴다는 사실에 한글을
개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자라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한글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뛰어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인지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1988년 한겨레가 가로쓰기 판형으로 창간되고, 중앙일보도 1995년에 판형을 바꾸고 1999년에는 조선일보가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신문
판형을 바꾸고 가로쓰기 전용 본문 글꼴을 개발할 업체를 공모했고 철저한 준비로 공급을 하게 되었다. 회사가 경영위기에 닥쳤을 때도 대학원에
들어가서 경영자 과정을 공부하며 직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산돌의 경영 이념인 ‘3P 정신’을 옮겨 적어본다.
93쪽-
프로정신(Professionalism),
열정(Passion), 가치 있는 행동(Practice).
난
이 3가지 정신에서 어느 것을 얼마큼 행동하고 있을까?
가야금을
타던 괴짜 남학생으로 국악인 황병기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딸을 낳고 16년 만에 얻은 삼대독자인 황병기씨는 공부를 못하는 낙제생이었다고
한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서울대에 입학한 친척아저씨가 가정교사가 되어 삼국지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숭례문을 거닐며 조선 왕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역사공부도 하고 풍금을 치며 동요를 부르며 음악공부도 했다. 그 후 3학년 2학기 때부터 우등을 하고, 4학년부터는
졸업할 때까지 일등을 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을 가 있을 때, 친구의 추천으로 가야금을 배우러 다니게
되면서, 사내가 왜 가야금을 타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생겼지만 남의 눈길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을 했다. 졸업을 앞둔 때, 서울대학교 음대 학장님이 국악과를 설치하려고 하니 강사로 나와 가야금을 지도해달라고 부탁하고
결국4년 동안 다른 직업은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민간에서 가야금은 악보 없이 구전으로 배워 왔는데, 정악과 산조를 오선보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본격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해서 많은 새로운 가야금 곡을 내 놓았다고 한다. 순간순간을 항상 충실하고 즐겁게 살고자했다고
한다. 취미로 시작한 가야금연주이지만 삶과 생활이 되었다.
나에게도
주위에서 자꾸 물어본다. 음식을 잘 만드는데 식당을 오픈하면 장사 잘할 것 같은데? 그림을 잘 그리는데 전문 핸드메이드샵을 오픈하면 어떨까? 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한다. “음식은 어려서부터 만들어왔지만 결혼하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 만들어주려고 한 것이고, 미술부 부장을
했지만 미대도 가지 않은 것은 그냥 취미일 뿐이고 아이들이 그림 그려달라고 하면 그려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항상 뭐든지 못한다고 미리 포기하지
않고 해보면 된다고 도전을 해왔기 때문에 다 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난 재능기부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페이스페인팅이나 네일아트
봉사가 나의 재능기부인 것이다.
민들레
수사 서영남씨는 민들레 국수집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곱 남매는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으로 피란 나와서 살게 되었다. 막내가
갓 돌을 지날 무렵 아버지가 열차 사고로 돌아가시고 삯바느질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거지가 찾아오면 뭐라도 나눠
주지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나도 어려서 네 남매를 집 주인이 사는 집 한쪽 방에 세 들어 살던 때에 작은 방 앞마루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거지에게 항상 밥을 챙겨주시던 것이 잊히지 않는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고 나중에는 교도소 교정 사목을
맡았다. 수도원 바깥에 마련된 출소자 쉼터에 함께 머물면서 일을 하던 중 수도원으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고 수도원을 나오려고 결심한다.
출소자들을 위한 ‘겨자씨의 집’을 열었으나 자주 소동이 있었다. 후원자 베로니카가 찾아와서 가족이 되자고 한다. 베로니카 딸 모니카도 기쁘게
가족으로 맞아들었다. 그 후 출소자 형제들의 자립을 위해 월세로 얻어 준 집수리 가게가 두 달 만에 망해서 그곳에서 배고픈 사람들한테 공짜
음식을 대접하는 식당을 만들었다. 손님들이 국수 말고 밥을 찾아서 메뉴는 밥으로 바뀌었지만 간판은 ‘민들레 국수집’으로 그냥 두었다. 후원자들이
많이 생겨서 형편이 되는 대로 어려운 이들에게 방을 얻어주기도 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날마다 기적을 만든다고 한다. 김남주 시인의 ‘사랑1’이라는
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나도 책속에서 읽었다.
난
봉사활동을 나가면 많은 자원봉사자를 만나게 된다. 며칠 전 대구시 수성문화원(두산문화센터) 강당에서 ‘전국민 7000만 희망 의류모으기’
대구경북운동본부 발대식이 있어서 참석을 했다. 물론 그전에 회원 가입을 했다. 회원 대부분은 다른 봉사단체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이다.
나 또한 봉사활동으로 아는 지인의 연락으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돕는 데 동참하길 바란다.
일곱
위인들(난 위인들이라고 하고 싶다.)은 노력하고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고, 남을 돕고 자립성이 강하며 꾸준하다. 어려서 어려운 생활을 했을 때도
부모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책속의 일곱 선배들처럼 용기 있게 도전하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