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나의 행진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아빠는 돌아가시고 양재전문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한 엄마와 떨어져 1년간 부유한 이모집에서 지내게 된 주인공 토모코. 예전에는 동물원이기도 했던(집안에 동물원이-_-) 넓디넓은 정원에 애완용하마(하마를 애완용으로-_-)를 키우며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미소녀 미나.
이렇게 대비되는 가정환경을 가진 주인공과 그녀의 사촌동생인 호화로운 저택에 연약한 미소녀라는 뻔한 설정을 (왜 부잣집에선 건강하고 활기찬 소녀가 살지 않는 걸까.) 전혀 뻔하지 않게 그려낸 소설이다.
우선은 이렇게 모든것이 대비되는 환경을 접하면서도, 그 환경이 남도 아닌 친척인 이모의 가족인데도, 토모코가 미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한치의 열등감이나 질투가 없다는 것이 가장 색다른 점이다. 전혀 은연중에도 배어나지 않는, 멋진 이모부를 동경하고 잘생긴 사촌오빠를 보며 가슴설레고, 온갖 생활면에서 흘러넘치는 여유를 느끼지만 책 어느 부분에서도 토모코의 나쁜 감정을 발견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과 가족에 대한 당당한 자신감과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서있는 자기정체성을 가진 아주 건강한 자아를 가진 소녀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미나는 미나대로 역시, 천식으로 발작을 자주 일으키고 입원을 밥먹듯이 하며 학교도 혼자 걸어가지 못한 연약한 몸을 가졌지만 이런 비슷한 설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처지에 대한 비관, 많은 것을 가졌지만 어딘가 삐뚤어진 심성 이런 종류의 성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소녀다. 자기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잘 알고, 건전하고 공정하게 삶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을 누리는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캐릭터다.
이렇게 무대는 뻔한 설정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주인공의 성격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긍정적이고 깨끗하며, 부정적인 성질은 전혀 없는 자기자신을 너무 잘 아는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그녀들의 매력은 보통 현실에서는 잘 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에서 그쳤다면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동화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모의 쓸쓸한 오자찾기 취미, 생계를 위해 딸과 떨어져지내면서 양재를 배우는 토모코의 엄마, 모든것이 완벽하지만 또다른 가정이 있어 집에 잘 머무르지 않는 이모부, 그 이모부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만화주인공같은 사촌오빠, 쌍둥이언니를 포함한 가족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고 머나먼 일본에서 일생을 보내게 된 로라할머니, 여행권이 당첨되어도 같이갈 친구나 가족 한 사람 없는 가정부, 그리고 몸이 아파 자주 병원을 들락거리며 첫사랑의 상대가 자신도 모르게 결혼해버리는 미나. 즉 동화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의 생각과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두 주인공의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성격탓인지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느낌은 '현실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기, 지금 이 시간 이 장소가 아닌 어딘가 살아숨쉬고 있을 거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두 주인공의 만남, 그 주변을 둘러싼 아름답고 평화롭고 생각할수록 웃음만 나오는 그런 이야기. 하지만 '쳇, 이런게 어디있어' 할만큼 뜬구름 잡고있지도 않고 탄탄한 대지위에 서서 어느 순간 정말 화기애애하게 모두들 웃고 있을것 같은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조화로움을 갖추고 있다. 마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처럼, 스치다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스라하면서 따뜻하게 회상되는 그런 장면들이다. 오가와 요코는 분명히 현실적이지만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현실을 가지고 있는 세계를 창조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저 그런 성장소설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또다른 여운을 남기는, 역시 그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참, 책 안의 일러스트가 너무 독특하고 이뻤다. 일본판에도 있는 것인지 우리나라에서 만든건지 모르겠지만... 책 속의 구절처럼 천사가 날개를 깁고 있는 그림의 성냥갑그림은 특히 정말로 그런게 있다면 꼭 갖고싶을만큼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