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물 - 이성복 사진에세이
이성복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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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니 이름을 불러줘야 의미가 된다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이성복 시인의 에세이 타오르는 물은 그렇게 말한 시인의 또 다른 버전이다. 사람 대신 형체, 즉 사진이 등장하는... 은유(의미)없는 형체는 숲 속에서 저 혼자 쓰러지는 나무 같단다. 사진 에세이, 라는 타이틀이 붙은 책은 사진 없어도 가능한 글들로 모였다. 굳이 이경홍 사진작가의 도움을 받은 건 모든 형체에서 은유를 찾는 시인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엄지 손톱만한 사진, 형체 불분명해 온갖 주해를 갖다 붙여도 좋을 한 장의 사진을 왼쪽 모두에 배치한 채 시인의 에세이는 시작된다. 더러 손바닥만한 사진이 덤으로 붙어오긴 하지만 그건 여백을 메우기 위한 편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독자로서는 작은 사진 만으로도 시인이 하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사진 작품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되새기려는 의도'로 에세이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구상체가 아닌 추상체, 거기다 흑백인 작은 형체(사진) 안에서 시인은 존재들의 고독과 무력감을 읽어낸다. 긍정보다는 부정을, 행복보다는 불행의 은유를 자아낸다. 이런 시인은 허무주의자일까?  '진실을 구하는 것 또한 허위를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망상일 따름이다.' (16쪽)라는 시인의 중얼거림이 어떤 시적 변용을 가져올까? 구체성을 획득한 시어로 이런 아포리즘이 재현되는 시인의 시를 만난다면 침 질질흘리며 책을 핥아도 좋으리라.  

  따뜻함이나 위안을 얻기 위해 이 에세이를 집어드는 자는 그저 실수다. 늙은이의 코 고는 소리, 구더기가 끓는 다리의 화농을 핥는 사자, 한쪽 날개를 잃은 그 어떤 형상, 등 연민과 공포와 절망을 노래하고 싶거나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무의미한 세 개의 나무토막, 저 먼 우주 속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그저 그래보이는 그림 한 점을 연상하면서 '종합은 이미 분석된 것을 결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고, 분석은 이미 결정화된 것을 재분석하는 것으로서, <미적 쾌감을 해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103쪽)라고 주석한다.  

  이를 테면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없는 것의 근원인 있는 것은 없는 것의 없는 것이며 어둠의 근원인 빛은 어둠의 어둠이라 할 만하다. 빛은 어둠 없이 있을 수 있지만 빛 없이 어둠은 있을 수 없다.' (106쪽) - 무와 유, 빛과 어둠의 유기적 관계를 이딴 식으로 꼬아놓는다. 어차리 시인의 역할은  어떤 현상을 은유의 말장난으로 불장난처럼 저지르는 족속들이다. 그러려니 하고 읽어내려갈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권할 만한 책이다. 그런 사유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고통, 연민, 어둠, 외설, 욕망 등등에 관한 코드를 시인은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 라는 호기심만으로도 건질 건 있는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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