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가만히 이해해보면, 주로 두 가지의 감정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삶의 선택과 행동에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두려움이고 둘째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인데, 이 두 번째의 감정을 유학에서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한다.
맹자가 말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왕들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였다.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맹자 공손추상>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유학에서는 인(仁)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며, 인으로 말미암아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주자가 리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신유학적 해석에 근거할 때, 인으로 말미암은 측은지심은 단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론적 상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란 단지 상대방에 대한 선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경험하는 상태이며, 그 고통의 자리에 내가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유학에서는 사적인 욕망에 의해 이 마음이 가려질 뿐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인간 본연의 이 마음은 얼마든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도가의 도(道) 혹은 불가의 불성(佛性)이 이러한 지점을 지칭한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사랑(agape)도 이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책임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너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결부시키는 거야. 그리고 나의 십자가는 그 때문에 존재하는 거야. <내가 버린 여자 107쪽>
그 어떤 고통도 고독으로 인한 절망감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 혼자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생각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설혹 사막에 홀로 있을지라도 혼자만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버린 여자 296쪽>
독서의 계절에 소설을 읽으며, 나는 엔도 슈사쿠의 글에서 이 마음을 발견하고 있다. 그에게 문화적 전통으로 내재하는 인(仁)의 정감은 그가 배운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형태로 그의 작품에 드러나며,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소설에서는 이 인간 본연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내가 버린 여자>의 미츠가 그러하고, <바보>의 가스통이 그러하며, <깊은 강>의 오쓰가 그러하다. 그리고 애초에 <침묵>에서 드러나는 신의 모습,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우리 인생에 있어 타인에게 끼친 행위는, 어느 것이건 태양 아래 얼음이 녹듯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상대에게서 멀어져 전혀 생각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마음속 깊이 흔적을 남긴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내가 버린 여자 124쪽>
인생이란 것은 복잡한 거야. 하지만 잊어서는 안 돼. 인간은 타인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서는 스쳐지나갈 수 없는 거야. <내가 버린 여자 178쪽>
이들의 삶은 그들을 만났던 또 다른 이들의 삶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엔도의 소설에서 드러나듯이 한 인간의 삶은 그를 만나는 다른 이들의 삶에 반드시 흔적을 남기며, 그렇게 개인의 삶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 없이 반드시 주변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가 만났던 이들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 남겨진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어떤 이들은 타인의 삶에 인간 본연의 마음 곧 사랑의 흔적을 남긴다.
처음으로 도모에는 우리 인생에서 바보와 위대한 바보라는 두 가지 말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꾸밈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꾸밈없이 모든 사람을 믿으며, 비록 자기가 속고 배반을 당해도 그 신뢰와 애정의 등불을 계속해서 지켜가는 사람, 그 사람은 요즘 세상에서 바보로 보일지도 모른다. <바보 254쪽>
사적인 욕망의 추구를 성장과 발전의 동인으로 삼는 현대 사회에서, 사적인 욕망에 의한 삶이 아닌 인간 본연의 사랑에 의한 삶은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삶은 남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많은 경우에 손해를 보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히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여 자신을 내어주고 있을 것이며,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미약하나마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애에는 경제적 안락함도 타인의 인정도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내면의 사랑에 따라 잠잠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떠한 삶을 원하고 있는가. 가을 하늘이 맑아서, 내가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