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이동도서관
오드리 니페네거 글.그림, 권예리 옮김 / 이숲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자책을 읽어보려고 시도를 종종 해본다.
학교도서관에 책을 신청하면 전자책이 있는 건 전자책 구입이 우선이라고 해서 여러 번 전자도서관을 이용해 보기도 했다. 결과는 번번이 실패.
전자책 읽기를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작은 화면 안에 들어 있는 활자는 눈으로 읽어도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어딘가로 흩뿌려지듯 사라졌다.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 종이책에서 나는 사각거리는 촉감 없이 미끈한 패드에 닿는 느낌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연필을 들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 쭈욱 밑줄을 그을 수 없는 게 즐겁지 않았다.

《심야 이동도서관》은 나처럼 책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거나 책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종이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한밤의 인적 없는 거리, 당신 앞에 느닷없이 캠핑카 한 대가 나타난다. 망설이며 들어간 캠핑카 안에 당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읽은 모든 텍스트가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책은 물론이고 시리얼 상자며 일기장까지. <심야 이동도서관>의 주인공은 우연히 마주친 이동도서관에서 떠올린 유년의 기억과 오래된 종이 냄새를 그리워하며 밤거리를 헤맨다. 어릴 적 읽었던 책과 지난날의 추억을 되찾으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집착으로 변한다.』 책 소개 중(해당 책 제공)

내가 읽은 책들을 보관하는 도서관이라니,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 안에는 책마다 읽은 날짜를 기록해둔 흔적, 선물을 받았던 책에 적혀 있던 좋아하던 아이에 대한 추억, 친구에 대한 고마움, 많이 아팠거나 우울했던 어느 시절의 나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이 주인공이 느끼는 '풀이 죽은 기분'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다가 놓쳐버린 적이 있는가?' 이 문장과, 이 뒤에 이어지는 주인공의 행동이 연결되면서 결말이(조금은 충격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림이 없이 짧은 소설로만 읽었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것 같지만, 그림과 함께 읽는 이야기는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내가 읽는 책들이 내 책장에 꽂혀져 있는 오래된 나의 책들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의 한 시절을 기억하게 해 줄 사랑스러운 책들을 찾아 읽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찻잔을 서랍 위에 놓고 이동 도서관 뒤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거기서 나는 위안을 찾았다. 손등으로 코를 훔치고 서가를 둘러 보았다. 꽃에서 정성스레 추출한 향이 향수에 담겨 있듯이, 책장에 꽂힌 책들에는 내 삶이 스며 있었다. 나를 바람맞힌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읽은 바버라 터크먼의 『희미한 거울』이 보였다. 여러 번 읽어 두툼해진 『안나 카레리나』도 있었다. 나는 『중력의 무지개』를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자 글이 57쪽까지만 있고 그 뒤로는 없었다.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었다. 내가 읽다 만 페이지에 아이스크림 막대가 꽂혀 있었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다가 놓쳐버린 적이 있는가? 나는 독자로서의 내 초상을 봤던 것이다. 공기가 탁한 교실에 몇 시간씩 앉아 있던 나날, 아파서 결석하고 집에서 『낸시 드류』시리즈에 빠져든 기억, 금지된 책들을 밤늦게 몰래 읽던 어린 시절. 『네이키드 런치』, 『파우틴 헤드』, 『율리시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처럼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책을 읽은, 아니 읽으려 애쓰던 10대 시절. 마치 완벽한 연인이 나온 꿈에서 깨어나 사라진 이를 그리워하며 풀이 죽은 기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도 가족일까? 풀빛 그림 아이 60
마르코 소마 그림, 다비드 칼리 글, 김경연 옮김 / 풀빛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이었지만,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아이와 읽기에는 그리 쉬운 책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가족'에 대해 설명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이는 '가족'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 나'이렇게 알고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과 어느정도의 책임감, 동지애, 사랑, 애증 같은 걸 아직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 《나도 가족일까?》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가족'이 된 보리스와 엄마, 아빠의 이야기다.

'보리스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어. 의사들 말로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대.'
라고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이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왜, 아이가 없었어? 아이를 왜 가질 수가 없을까? 라고 묻는 아이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보리스의 부모는 늪 근처에서 보리스를 발견했다.
버려진 아이인지, 누군가 잃어버린 아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조금 자란 아이는 바람에 실려 온 늪의 냄새를 맡고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은 '늪'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늪으로 떠난다.
보리스의 부모는 슬픔에 잠겨 자주 늪으로 찾아갔다. 병 속에 편지를 적어 늪에 두고 돌아왔다.
편지에는 늘 이렇게 적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에서 행복하다면, 우리도 행복하단다.'
보리스는 늪에서의 삶이 익숙했지만 어느순간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늪에 사는 생물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사랑때문이 아닐까? 사랑하기때문에 비슷해 지는 건 아닐까' 하고. 그리고 다시 늪을 나와 엄마, 아빠가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와 세 번쯤 이 책을 함께 읽었다.
읽으면서 이 문장을 여러번 들려 주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에서 행복하다면, 우리도 행복하단다.'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 우리가 같이 본 씽 영화에서도 그러지 않았어? 행복하라고"
아마도 아이는 영화 속에서 '겁난다고 가슴이 시키는 일을 포기해선 안돼'라는 장면을 보고 내가 해 준 말 "윤아, 언제라도 네가 가장 행복한 일을 해야 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책 속에서, 영화를 보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꼭 안고 말해주었다.
"윤아, 언제든 네가 행복해지는 일을 하면 돼. 그리고 그 순간순간 언제나 엄마가 널 응원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줘. 그러면 힘든 일이 생겨도 금방 이겨낼 수 있을거야."

언젠가 아이가 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순간이 오겠지.
나는 그때까지 아이에게 끊임없이 믿음과 사랑을 주면 되는 거겠지. 언제까지나.

 

 서정적인 느낌의 그림과, 글이 참 좋았다.

보리스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던 말 '너 정말 행복해?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이야? 아니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삶이야?'을 나에게도 물어본다.

언제가 아이가 자라서 혼자 이 책을 읽을 때 쯤, 아이도 이해하게 될까.
아이와 함께 읽고, 엄마 혼자 읽어도 좋은 그림책을 만나서 괜히 좋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할까?
이 질문이 물고기처럼 보리스의 마음을 헤엄쳤어.
보리스의 부모는 비늘이 없었지만 보리스를 사랑했지
자신들과 닮았든 닮지 않았든 개의치 않았어.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하기 때문에 비슷해지는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로움살해자
윤재성 지음 / 들녘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저는 외로워요. 저무는 태양 밑에서 외롭고, 뜬 달 아래 또다시 외로워요. 내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그 의미가 희속될까 입을다물 만큼 외로워요.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턱턱 막혀요. 누군가 주기적으로 심장을 움켜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것처럼.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잦아들지도 않아요. 이건 천식 환자의 호흡곤란 같은 거예요. 찾아올 때마다 속절없이 호흡기부터 물어야 하는."p92


" 전 언제나 혼자고, 그건 변하지 않아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으로 외로움이 사라진다면 밤마다 홈파티를 열었겠죠. 인간이 갖는 질량은 존재의 고독을 달래주지 못해요. "p93

저는 외로워요.
이 문장을 여러번 소리나게 읽어본다. 아주 조용하게. 혼자만 들릴듯한 목소리로.
저는, 외로워요. 라고도 읽었다가 저는...... 외로워요. 라고도 읽었다가 저는외로워요.라고도 읽어본다.
외롭다는 단어가 퍼지는 속도와 질감을 가늠할 수가 없다.
가끔 나는 이렇게 말했던가. 나. 외로워. 라고.

이 소설 《외로움 살해자》는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과 그들의 외로움을 죽여주는 말그대로 '외로움살해자'들의 이야기다.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이 의뢰를 하면 외로움 살해자들은 그들의 매뉴얼과 방식으로 의뢰인의 외로움을 살해한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우선 '외롭다'라는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그 감정의 실체가 '외로움'이라는 걸  어떻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뢰인 김미는 자신의 외로움이 살해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러번 외로움살해자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죽여달라고 의뢰한다.
"전 아직도 제 외로움을 누군가 죽일 수 있다고 믿지 않아요."
"그럼 어째서 절 부르셨습니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면서요."
"외로웠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외로웠다, 는 말에  잠시 책장 넘기는 걸 멈추고  상상해본다. 누구나 외롭다는 전제가 깔린 말, 그렇지만 누구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거라고 기대하는 말, 그러니 자신의 외로움을 죽일 순 없지만 최소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희망, 희망.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길게 꼬리를 내밀게 된다.
공감이 되면서도, 설마 싶고,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가도 에이 그럴리가, 싶어진다.
한가지 분명한 건, '외로움 살해'라는 소설의 주제가 충분히 흥미로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궁금해져서.

외로움살해자가 의뢰인의 외로움에 전염되는 순간, 그들은 직업을 잃게 된다. 의뢰인보다 훨씬 혹독한 외로움을 겪거나, 정신병을 얻거나, 사라진다.

김미의 외로움 살해자였던 윤필은 업계에선 알아주는 '외로움 살해자'였다. 그는 의뢰인의 외로움을 살해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실패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도 김미는 쉽지 않은 의뢰인이었다.
이제 윤필은 다른 의뢰인은 제쳐두고, 김미에게 매달리기 시작한다. 나중에 가서는 그게 직업적인 목적에서인지 개인적인 감정때문인지 헷갈릴만큼.

"다른 이들의 외로움에는 제각기 해결 방법이 있어요. 속내를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던 사람은 친구가 생기면 나아져요.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은 연인을 만들면 회복되고요. 개인이 느끼는 고독이란 말할 곳과 기댈 곳, 약해지고픈 곳의 부재에서 비롯되니까요. 맨 처음 제 외로움을 없애지 못할 거라고 말씀드린 것도 그래서였어요. 제가 가진 병은 저런 임시방편들로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p93"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롭다. 친구가 없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연인이 없어서, 등등등의 이유로.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다. 친구가 많아도, 늘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연인이 있어도,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있어도 사람들은 외롭다는 걸.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외로움'과 '외로움 살해'라는 주제는 공감되고 흥미로우면서도 그 범위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동시에 남는다. 또 한가지, 그 외로움을 살해해 가는 과정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뻗어나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는 아쉬움.

윤필은 김미의 외로움을 살해하기 위해, 데이트를 하고, 함께 집에가고, 찾아가고, 만난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외로움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 윤필은 어떻게 되었을까. 외로움을 살해하지 못하는 외로움 살해자는. (소설을 읽고 확인하시길 권한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외로움이 물러가고 고통이 덜해지고, 인간적인 감정을 되찾은 다음에는? 제가 정상으로 돌아온대도 절 외롭게 만든 현실은 바뀌지 않아요. 아빠는 나와 엄마 주위를 맴도는 그대로에, 엄마는 여전히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시도하겠죠. 외로움과 함께 내 외로움 살해자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과연 나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결국 지금보다 더 외로워지고 말 텐데."p328

"어디에나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체품이 존재함을 의미하죠. 미는 항상 곁을 지키지만, 그 미가 꼭 나일 필요는 없어요. 아마 내 외로움의 이유도 같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엄마에게는 아빠가 있었고, 아빠에게는 딸이 아닌 여자가 있었고, 내가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나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늘 많았으니까. 어쩌면 인간은 타인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는지도 몰라요."p437

'외로움'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타인을 기준으로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은 결국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외로움이 기인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신으로서의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한 사회에서 자신의 외로움조차 대리 된 외로움인 건 아닌지.

이제 '나 외로워' 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할 것만 같아.  이거 좀 외로워지는 소설이잖아.

소설의 내용과 상관없이 조금 덧붙이자면,
이 소설의 작가 윤재성의 프로필이 낯설었다. 신춘문예 당선이든, 문예지 당선이든, 작품집을 내는 작가의 프로필엔 비슷비슷한 문구가 들어가 있다. 이 작가에겐 대한민국전자출판대상 장려상 이라는 경력이 전부다. 저자는 소설을 직접 출판사에 투고하고 끊임없이 출판사에 자신의 작품을 읽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고백하자면, 작가의 말에 나는 조금 감동받았다.
'내 첫 꿈이 출간이었다면 두 번째 꿈은 서점 판매대에서 한 달을 버티는 것이었다. 세 번째 꿈은 계속해서 소설가로서 글을 쓰는 것이고.'
세번 째 꿈 꼭 이루시길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걸 작가의 말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설집의 맨 앞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으로 읽는다.'

아무도 아닌,이라고 말 할때와 아무것도 아닌, 으로 말 할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더 쓸쓸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읽히거나 들리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나를 향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때면 조금 더 쓸쓸해진다.

나는 누구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까, 혹은 당신은 누구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까,라고 속절없이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을 읽을 때면 읽기 전,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다. 쓸쓸해질 준비. 멍해질 준비. 아파도 그냥 아프구나, 하고 다음 페이지를 넘길 준비.

전 작 장편,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 한동안 멍했던 그 여운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을 읽어내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미리 적어야겠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거나, 별일 아닌 것 같거나, 그리 슬프지 않은 이야기들 같거나, 평범하게 읽히는 문장들이었음에도 다 읽고 난 뒤엔 역시나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어딘가 자꾸 찌릿거린다. 그게 내가 황정은의 작품을 계속 읽는 이유이기도 하고, 읽기를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변에서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이 평범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들이 자꾸 걸린다. 그들은 아프거나, 아팠거나,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다. 그들은 떠나거나, 버리거나, 화내거나, 슬프다.
그들 주변에서 화자는 오히려 담담하게 그 상황들을 지나쳐(건너) 간다.
떠나는 이들을 떠나보내고, 아픈 이들을 어느 정도는 모른척하고, 남겨지는 것도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담담해서 슬픈,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헤어짐에 울부짖지도, 미련을 떨지도 않는데 그냥 왜 헤어졌을까,를 조용히 읊조리는데 왜 그게 더 슬픈지 자꾸 이야기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호재와는 그 뒤로도 계속 만나다가 서로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밤 영화관 앞에서 말다툼을 했는데 호재는 영화 티켓과 나를 내버려 둔 채 뒤돌아 가버렸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중략) 호재는 이제 어디에 있을까, 잠버릇은 여전할까. 그 잠버릇을 알아채줄 여자친구를 사귀었을까. 특별히 내게 못해준 것도 아닌데, 호재가 다음 여자친구에겐 더 잘해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중략)햇빛이 가장 좋은 순간에도 나는 여기 머물고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다 갈 것이다. 다시는 연애를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회를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p47-48(양의 미래) 중에서'

'나는 오래전에 제희와 헤어졌다. 수목원 나들이가 있고 이 년쯤 지나 시점이었을 것이다.  헤어질 무렵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무슨 계기로 헤어지게 되었는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중략) 나는 지금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 (중략)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 그럴 땐 버려졌다는 생각에 외로워진다. 제희와 제희네. 무뚝뚝해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한 사람들에게. p86-87 (상류엔 맹금류) 중에서'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해 말 할 때도, 밥 먹었니, 라고 묻는 것처럼 가벼워서 오히려 듣는 사람이 흠칫 거리게 된다.

' 어머니가 이제 죽었으면 좋겠어. 아버지도. 이런 이야기를 내가 했을까, 내가 정말로 했을까. 둘 가운데 어느 이야기를 했고 어느 것을 하지 않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둘 다를 하지는 않았어도 둘 가운데 하나는 했을 것이다.p45-46(양의 미래) 중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 너와 내가 죽은 뒤에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위안이 되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죽어서, 실리를 만날 것이다. 실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실리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떤 것, 어떤 상태로든 남아 있을 테고 내가 죽은 뒤 실리와 나는 서로 그런 상태로, 그런 상태로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세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세계에 실리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그러나 없다. 없다.  점차로 없고 점차로 사라져가는 것이 있다. 그뿐이다. p105(명실) 중에서'

계속 소설 속 화자들를을 졸졸 쫓아다니다 보면, '아무도 아닌' 사람은 없다.
없는 듯 보이지만 있고, 곧 떠나려 하지만 역시 있다. 아직은.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가 아니라 누군가이다. 누군가의 ... 이라는 말을 자꾸 붙여 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슬쩍, 자꾸 화자들에게 속삭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 이봐, 좀 웃으라구. 이봐, 좀 편하게 살라구. 이봐 좀, 다정해지면 안되겠어?" 이렇게 말이다.

그러기엔 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매섭다. 이 소설들이 씌여지고 발표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소설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건너오면서 그 시간들이 오롯이 작가의 몸에 새겨져 다시 소설로, 화자에게로 옮겨져 간 듯 느껴진다.

上行 _009
양의 미래 _037
상류엔 맹금류 _063
명실 _089
누가 _113
누구도 가본 적 없는 _137
웃는 남자 _163
복경 _187

여덟 편의 소설을 읽는 일도, 다 읽은 뒤에 무심히 덮어버리는 일도 쉽지 않다.
묘한 작가다. 묘한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 나의 주체는 온전히 나인가. 누군가에 의해 '나'를 대리하는 또 다른 '나'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수히 많은 고민이 시작됐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이제 '시작'을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갈 길이 멀다.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다 읽었다는 시원함이 남아 있지 않다. 아쉽고, 두렵다.
어쩐지 내가 원하는 답을 결국엔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내가 대학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저자의 이전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흥미롭다는 표현보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공감했고, 아팠고, 어느 순간엔 참담했다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그 이후, 저자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이나 기사들을 찾아 읽기도 했고, 그다음 행보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여만에 이 책  《대리사회》가 나왔다.

고백하자면, 이번 책 《대리사회》는 전작보다 더 좋았다.
굳이 고백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내가 아마도 이 저자를 앞으로 쭉, 좋아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대학을 그만두고, 강의실이 아닌 사회로 나온 저자는 1년 동안 글만 쓰겠다는 각오를 뒤로한 채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아내가 있었고,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태어날 아이까지.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그를 다시 거리로 나가게 했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만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거리에서의 기록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우리는 온전히 '자신'인 것 같지만, 결국엔 사회가 만들어 내는 무언가의 '대리'로 살아간다는 저자의 시선이, '대리사회'라는 명명이 와 닿았다.  책을 덮은 뒤에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한 문장이 있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p183' 라는 문장.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을'은 '을'일 뿐이라고, 결국 '갑'의 욕망을 대리해서 힘겹게 싸우는 존재들이라고, 그러니 희망 따위 버리라고 말하ㄷ는 것만 같아서.

저자의 첫 책을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이번 책에서도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사회적인 시선이나 개인적인 상황이나, 주변의 상황들이 저자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세상을,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자신의 미래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점이 참 좋았다. 그래서 독자인 '내'게 와 닿는 감동이 조금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썼다고 적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어 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도 다시 나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적어도 저자는 이미 자신의 길을 선택한 듯 보인다. 대학에서 나오며 두려웠겠지만 여전히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고 있다.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현재에 머물며 내내 머뭇거리는 내 안의 깊은 약점 하나를 이 책이 툭툭, 건드리고야 말았다. 이제 나의, 우리들의 선택이 남아 있다.

대리운전을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사람이라서, 대리운전에 대한 이야기들이 꽤 흥미로웠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고, 갑질이나 진상 고객의 이야기에서는 마치 내가 겪은 일인 것 마냥 분노했다. 혹시 대리운전을 할 일이 있다면 꼭, 기사님께 감사 인사를 해야지 하는 감정 섞인 다짐까지.

저자는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또다시 대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주체로서 선택한 완벽한 주체적 대리일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단순히 지명을 외우고 막차 시간을 계산하는 데서 나아가 그 안의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그들의 도시는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는지,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러한 사유로도 확장된다. 그렇게 경험한 삶의 문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대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내 몸에 남을 것을 믿는다. p61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p77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안내하고 든 아니하고 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p105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p174

나는 나의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장 어두운 밤에 나를 위해 깜빡이를 켜둔 그곳으로 기쁘게 걸어간다. 나는 기꺼이 아내와 아이를 위한 대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아내 역시 아이와 나를 위한 대리로, 하지만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갈 것을 믿는다. 그렇게 서로를 대리하면서, 그리고 주체의 언어로 상대방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가족‘이 된다. p121

대리운전을 하며 만난 손님과, 어머니와 내가 공유하는 감정은 결국 ‘분노‘다. 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타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아마도 곧 노래와 음식을 넘어 또 다른 대리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다시 열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은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분노할 것이다.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익숙한 공간에까지 이미 침투한 대리사회의 괴물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강요된 환각에서 깨어나 온전한 나로서/우리로서 ‘즐겁게‘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p214-215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 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나 합법도 아닌,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법의 틈새를 이용한 ‘편법‘이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 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p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