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여성들의 북클럽
마리 보스트윅 지음, 이윤정 옮김 / 정은문고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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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소설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 '여성들의 연대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4명의 여성이 '베티들'이라는 북클럽을 통해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를 비롯해 『허랜드』, 『자기만의 방』 소설을 읽고, 나누면서 여성, 엄마, 아내로 살았던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로 변해간다.

마거릿, 샬럿, 비브, 빗시 네 명은 1960년대 안에서 이야기하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다룬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이지만 각자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 여성으로서 '자신'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모습까지. 엄마의 자리에서 아내의 자리에서 요구받는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네 명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인물에 자신의 모습을 이입해 보게도 될 텐데, 나의 경우 마거릿의 이야기에 이입됐다. 특히 마거릿과 남편 윌트의 이야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인 직장에, 평범하게 잘 자라주는 아이들, 큰 문제 없어 보이는 가정의 모습이지만 각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란들, 그들만 알 수 있는 관계의 골과 고민들이 공감됐다.


남편 윌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싫고,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게 있다는 걸 아는 전형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 마거릿은 자신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벽에 부딪치고, 대화 없는 부부 사이가 힘들지만 싸움보다는 낫다고 애써 모르는 척 넘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편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그 모든 이야기에 이입해서 읽었다. 그리고 그게 1960년대가 아니라 지금, 2026년에도 어쩌면 부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거릿은 엄마가 자살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래서 어머니는 끝내 자신을 찾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빌, 이건 당신이 뭘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왜 그걸 이해 못 해? 이건 내가 뭘 하느냐의 문제야."

마거릿의 엄마가 절실하게 내뱉었던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이건 내가 뭘 하느냐의 문제야.' 여성들이 '자신'을 찾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일 테니까.


그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삶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스스로 깨쳤다. 그들이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든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지금의 상황을 바꿀 힘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여성들이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고, 서로를 지지하는 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지, 얼마나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게 될지 이제 나는 믿는다. 여러 독서모임을 통해, 그 안에서 만나서 함께 나누는 독서 친구들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을 그 여정에 우리가 더 끈끈하게 연결되기를 바란다.

'베티들'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성의 삶에는 수많은 목적지와 수많은 계절이 있다. 우리의 길이 어디로 이어지고 서로 갈라지다 다시 만나게 될지는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지 우리의 마음은 늘 서로의 곁에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유대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 p388





"울프는 여성 작가들 앞에 가로놓인 사회경제적 장벽을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더 넓게 보면 어떤 직업에서든 성공하려고 애쓰는 여성들 이야기에 가깝죠. 특히 더 와닿을 거예요, 이제 자기도 글을 쓰는 여성이니까."
- P150

그래, 바로 그거였다. 뭔가 더,라는 건 살아 있다는, 자신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파문을 일으키고, 단순히 숨만 쉬며 공간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고 있음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좋은 느낌이었다. 잃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 좋은 느낌.
- P329

"오늘 나는 자유예요." 그녀는 아주 천천히, 의아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그 무엇도 아니죠. 나는 그냥...... 나예요!"
- P368

마거릿은 몇 달 전 자신이 썼던 글귀를 떠올렸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좋은 길과 옳은 방법은 무수히 많지만, 단 두 가지 잘못된 길이 있다고. 첫째, 자기 방식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우기는 것. 둘째, 고유하고 개성 있는 자신의 영혼을 억지로 일그러트려 본래의 형태를 망가뜨리고 타인의 이상에 맞추는 것. 그게 여성에게 해당된다면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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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 - 숲으로 걸어간 할머니, 엠마 게이트우드의 놀라운 여정
벤 몽고메리 지음, 우진하 옮김 / 수오서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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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머니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언제나 스스로를 잘 돌봤으니까요." 루시가 내게 한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에게도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가르치셨어요."
"저는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넬슨의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게 정상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자식들이 걱정도 안 되냐?'고 물어요." 루이즈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걱정 같은 거 안 하는데요.'라고요. 어머니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어머니가 정말 원하는 일이라면 저희는 그저 응원할 뿐이에요."
- p303


11명의 자녀와 23명의 손자 손녀를 둔 엠마 게이트우드는 혼자 숲속으로 걷기를 시작하면서 가족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1955년,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위의 문장은, 자녀들이 신문 기사를 통해, 어머니의 엽서를 받고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안다. 그런 엄마가 되고 싶어서다.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나에 대해 이렇게 기억해 주고, 말해주면 좋겠다. 엄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어디서든 즐겁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뭐든 엄마 스스로 잘 돌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이 책의 주인공, 엠마 게이트우드는 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 중 하나인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한 최초의 여성이다. 앞에 적었지만 종주를 시작할 때 그녀의 나이 67세였다. 11명의 자녀와 23명의 손자 손녀를 둔 엄마이자 할머니. 그리고 30년 넘게 남편의 폭력 아래 살았던 여성이었다. 벤 몽고메리(기자)는 엠마 게이트우드가 남긴 편지와, 기록(일기), 가족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엠마 게이트우드의 여정을 한 편의 글로 풀어냈다.

사람들은 그녀의 여행에 관심이 많았다. 나이 든 여성이 혼자 험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 대단하다는 존경, 어떤 희망 같은 것들이 한데 합쳐졌다. 그녀는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녀는 일기장에 썼다. "자유를 얻은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라고. 그리고 그냥 재밌어서 걸었다고 했고, 계속 걸었을 뿐이라고 기록했다.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생각할 때마다 명확히 보이지 않곤 하는데, 엠마 게이트우드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운 삶'을 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고.
<<오래된 세계 농담>>을 쓴 이다혜 작가는 추천의 글에서 썼다.



1955년 '여성 최초'라는 기록 뒤로 긴 시간 겪은 가정폭력부터 도피처로 택한 숲의 황홀, '할머니'에 대한 세간의 무시와 종래 마주한 든든한 환대에 이르니까지 이 책은 당신을 멀고 웅장한 숲길로 안내한다.


많은 여성들이 엠마 게이트우드의 여정을 통해 영감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오래 이 책을 옆에 두고 싶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꺼내 읽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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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문장 - 평범한 일상의 끝에도 한 문장쯤은 남잖아요
류송미 지음 / 너울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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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하루가, 보통의 일상이, 보통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살아보니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보통'의 하루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안다. 그래서 때론 그 '보통'으로 살기 위해 기를 쓰고 하루를 버티기도 한다. 그러니 무탈히 하루를 보낸 뒤 안도하는 마음과, '보통의 하루'를 보내서 다행이야, 하고 일기장에 적는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도 이제 알 것 같다.

『보통의 문장』 속에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보통의 하루라고 별것 아닌 게 아니라 그 하루하루를 보내며 쌓은 일상이면 충분하다고 위로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후회의 끝에 달라지지 않는 사실은

그때의 결정이 나의 최선이었을 거라는 것이다.

시간은 초 단위로 흘러가고

우리는 그 순간을 산다.

- <후회에 대한 결말> 중에서, p156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시간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는 건 알겠다. 내가 슬퍼하든, 기뻐하든, 울고 있든, 환하게 웃든, 어떤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그 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이 글이 참 공감됐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 이왕이면 좋은 생각을 하자.



자신의 쓸모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만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아무리 돌을 던져도

그 돌을 맞으며

묵묵히 자신이 누구인지

파헤치는 그 탄생과 소멸이,

부식되는 보석들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리라

- <자신의 쓸모> 중에서, p82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삶이 의미 없게 느껴진 적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속에서도 기쁜 일은 있고, 소중한 순간도 있고, 벅찬 순간도 있다는걸.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지는 날이 왜 없을까.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이 글을 읽을, 이들에게도 건네고 싶은 말이다.


때때로 삶을 비관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싶다.

여전히 아쉽고 후회될지라도, 후회할 것을 생각해
시작도 못 하고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시작조차 하지 못하더라도
행복을 느꼈던 순간을 충분히 기억했으면 좋겠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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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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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대회]


살면서 한 번쯤은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그게 사람이든, 종교든,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자신을 구원하는 대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기댈 곳은 있다고. 내겐 그게 책이었고, 책이고, 책일 것이다. 수잰 스캔런 역시 책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썼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다르게 얘기해 보면, 단순히 물리적인 '책'이라고만 말하는 건 맞지 않을지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가, 조엔 디디온이, 실비아 플라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어야 하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한동안 내가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책이 뭐냐고, 책으로 뭐가 되느냐고 물을 때, 반할 만큼 멋지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수잰 스캔런의 입을 빌려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은 '구원'한다. 실의에 빠진 나를, 두려움이 빠진 나를,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나를, 답답함을 풀고 싶은 나를, 불공평을 까발리고 싶은 나를.


『의미들』은 수잰 스캘런 자신의 병력에 대한 회고이자, 그로부터 벗어나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 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의 회고이고, 고백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릴 때 죽은 엄마와 정신 병원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책 속에는 두 이야기가 얽혀있으며 각각의 사건, 각각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하나의 이야기는 바로 수잰 스캘런 자신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울어본 적 있거나, 자신의 이야기 같아 흠뻑 빠져들어본 경험이 있다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책과 사람은 연이 있다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를 오늘 읽을 때와 다음 날 읽을 때 느낌이 다른 건 오늘의 나와 다음 날의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의미를 작가는 '수용의 순간'이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 책이 그런 책이 되는 것'(p96)을 작가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스무 살에 읽은 양귀자의 <<모순>>(쓰다, 2023.4.)과 마흔다섯 살의 읽은 <<모순>>은 마치 다른 책인 것처럼 다가왔다. 이십 대의 나는 그 책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흔이 넘은 나는 충분히 그것을 허락하고 받아들였다.

만약, 자신의 인생 책이 한 권쯤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수용성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그 순간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지 않을까.



우리가 병리라 부르는 것 중에는 그 무엇도 고립된 채 존재하는 건 없으며, 우리는 맥락 속에, 그 순간이라는 맥락과 서로의 존재라는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부서지기 쉬우며 유동적이라는 것은 꼭 말하고 싶다. 우리는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 <나의 정신이상과 그 밖의 것들> 중에서, p52

병원에서 보내 몇 년의 시간이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음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책 속에 담긴 모든 기록은 그래서 처절하다. 자신에게 당도한 불행과 불안과 안쓰러운 시선과 '미친' 사람이라는 시선까지 받아내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원하는, 선택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 언어를 통해서.


"독서와 글쓰기는 내가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 나에게 살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던 활동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지 모른다. 자신이 인지하기 이전부터 책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었는지도. 아니면 그 무엇으로라도 살아갈 방향을 찾았을지도.

극적인 순간이 닥치지 않으면 잘 모르니까.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느낌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모른 척하며 살기도 하니까.


아주 오랜만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읽은 책이다. 그건 이 책이 나와 수용의 순간이 만들어졌단 의미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빠져들었고, 느리게 읽었으나 강렬한 느낌을 받으며 책을 덮었다. 아직 이 책을 펼치지 않은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김지승의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마티, 2025.)를 읽을 때 샬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를 꼭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수잰 스캘런의 글 속에도 어려번 <누런 벽지>가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길먼의 책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이런 작가들은 나에게 돌아갈 길, 의미를 밝혀낼 길, 시간을 멈추고 병원에 머물던 그 여자를 이해할 길을 내주었다. 그 젊은 여자는 거기서 뭘 하고 있었을까? 절대적 운명 같았던 것이 사실은 다른 무언가였을 수도 있었다. 내가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이 책 역시 그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다.(p205)"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해. 그러다 그녀의 문장들에 기대 '독서'가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쓰기는 구원받은 자의 즐거움이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동시에 전율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책 읽기는 삶의 한 방식이, 혹은 사는 법을 찾으려는 탐색이 되었다. 젊은 여자가 책들의 영향, 독서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형태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게 경시되지만, 그럼에도. 책 읽기는 내가 가진 것이었고 내겐 그것뿐이었다.
- P55

책들을 읽는 일은 책에 안기는 일이었다. 그 처음 이후 나는 이 소설들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각각의 독서가 저마다 중요하다. 수전 손택의 표현대로, 읽을 가치가 있는 건 무엇이든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혹은 이탈로 칼비노의 말. 읽기와 디시 읽기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 P57

여러 해 동안 나에게는 나의 책 읽는 삶과 정신 질환의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둘은 나란히 함께 자랐다. 전자는 나를 문학의 삶으로 이끌었고, 문학의 삶이란 읽기와 쓰기의 삶이었다. 후자는 나를 막다를 골목으로,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침묵으로 이끌었다. 나의 영원한 굶주림. 물론 나는 여러 크고 작은 방식으로 분명히 회복했으며, 나를 지탱해 준 것, 나에게 또 하나의 삶을 준 것은 읽기와 쓰기였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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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길리 생추어리
장윤미 지음 / 아미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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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 장편소설 『숨길리 생추어리』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세상에서 받은 고통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상실을 함께 극복해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버려진 동물을 돌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과 동물이 함께 하기 때문에 치유가 가능함을 따뜻하게 그린다.

돼지 축사에서 일하며 매일을 별 의미 없이 보내던 이십 대 청년 인진. 태국의 가족들을 위해 한국에 와서 힘든 노동과 멸시를 견뎌내는 외국인 노동자 꿍과 두리안.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와 고향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해유. 그들을 한곳으로 불러들인 건 해유의 아버지 동찬이 만든 숨길리 생추어리다.

아버지를 미워했고, 아버지를 떠났으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생추어리에 도착한 해유는 자신이 몰랐던, 모른 척하고 싶었던 아빠 동찬을 마주한다.

소설은 초반부 높은 값을 받기 위해 돼지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들을 과감 없이 표현하며 독자들에게 낯설어서 살벌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구제역과, 살처분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기후 환경을 급격히 무너뜨리는 패스트패션 문제를 드러내고, 외국인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폭로하며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그러나, 소설은 무겁게만 흐르지 않는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연민과 연대, 우정과, 애정을 품은 인물들로 그려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뜨뜻한 마음을 품게 한다.

그들 덕분에 소설을 읽는 일이 힘들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토닥이고 감싸안아주고 싶었다. 숨길리 생추어리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줄 것 같았다.



해유는 도대체 아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다.

"사라지는 거."

아빠의 대답에 해유는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아바는 말을 이어 갔다.

"사라지는 건 엄마가 마지막이야. 이걸 지키려면 품은리로 가야 해." - P132

"아저씨가 그랬어. 우리의 밤은 누군가에게는 낮이라고."

인진은 해유를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밤까지 누리면 누군가의 낮을 뺏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 P244

"사라지지 않는 게 어딨어요."
"없지. 하지만 타인의 힘으로 사라지는 건 안 되지."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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