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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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대회]


살면서 한 번쯤은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그게 사람이든, 종교든,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자신을 구원하는 대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기댈 곳은 있다고. 내겐 그게 책이었고, 책이고, 책일 것이다. 수잰 스캔런 역시 책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썼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다르게 얘기해 보면, 단순히 물리적인 '책'이라고만 말하는 건 맞지 않을지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가, 조엔 디디온이, 실비아 플라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어야 하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한동안 내가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책이 뭐냐고, 책으로 뭐가 되느냐고 물을 때, 반할 만큼 멋지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수잰 스캔런의 입을 빌려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은 '구원'한다. 실의에 빠진 나를, 두려움이 빠진 나를,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나를, 답답함을 풀고 싶은 나를, 불공평을 까발리고 싶은 나를.


『의미들』은 수잰 스캘런 자신의 병력에 대한 회고이자, 그로부터 벗어나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 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의 회고이고, 고백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릴 때 죽은 엄마와 정신 병원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책 속에는 두 이야기가 얽혀있으며 각각의 사건, 각각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하나의 이야기는 바로 수잰 스캘런 자신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울어본 적 있거나, 자신의 이야기 같아 흠뻑 빠져들어본 경험이 있다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책과 사람은 연이 있다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를 오늘 읽을 때와 다음 날 읽을 때 느낌이 다른 건 오늘의 나와 다음 날의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의미를 작가는 '수용의 순간'이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 책이 그런 책이 되는 것'(p96)을 작가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스무 살에 읽은 양귀자의 <<모순>>(쓰다, 2023.4.)과 마흔다섯 살의 읽은 <<모순>>은 마치 다른 책인 것처럼 다가왔다. 이십 대의 나는 그 책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흔이 넘은 나는 충분히 그것을 허락하고 받아들였다.

만약, 자신의 인생 책이 한 권쯤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수용성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그 순간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지 않을까.



우리가 병리라 부르는 것 중에는 그 무엇도 고립된 채 존재하는 건 없으며, 우리는 맥락 속에, 그 순간이라는 맥락과 서로의 존재라는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부서지기 쉬우며 유동적이라는 것은 꼭 말하고 싶다. 우리는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 <나의 정신이상과 그 밖의 것들> 중에서, p52

병원에서 보내 몇 년의 시간이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음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책 속에 담긴 모든 기록은 그래서 처절하다. 자신에게 당도한 불행과 불안과 안쓰러운 시선과 '미친' 사람이라는 시선까지 받아내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원하는, 선택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 언어를 통해서.


"독서와 글쓰기는 내가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 나에게 살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던 활동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지 모른다. 자신이 인지하기 이전부터 책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었는지도. 아니면 그 무엇으로라도 살아갈 방향을 찾았을지도.

극적인 순간이 닥치지 않으면 잘 모르니까.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느낌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모른 척하며 살기도 하니까.


아주 오랜만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읽은 책이다. 그건 이 책이 나와 수용의 순간이 만들어졌단 의미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빠져들었고, 느리게 읽었으나 강렬한 느낌을 받으며 책을 덮었다. 아직 이 책을 펼치지 않은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김지승의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마티, 2025.)를 읽을 때 샬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를 꼭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수잰 스캘런의 글 속에도 어려번 <누런 벽지>가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길먼의 책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이런 작가들은 나에게 돌아갈 길, 의미를 밝혀낼 길, 시간을 멈추고 병원에 머물던 그 여자를 이해할 길을 내주었다. 그 젊은 여자는 거기서 뭘 하고 있었을까? 절대적 운명 같았던 것이 사실은 다른 무언가였을 수도 있었다. 내가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이 책 역시 그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다.(p205)"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해. 그러다 그녀의 문장들에 기대 '독서'가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쓰기는 구원받은 자의 즐거움이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동시에 전율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책 읽기는 삶의 한 방식이, 혹은 사는 법을 찾으려는 탐색이 되었다. 젊은 여자가 책들의 영향, 독서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형태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게 경시되지만, 그럼에도. 책 읽기는 내가 가진 것이었고 내겐 그것뿐이었다.
- P55

책들을 읽는 일은 책에 안기는 일이었다. 그 처음 이후 나는 이 소설들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각각의 독서가 저마다 중요하다. 수전 손택의 표현대로, 읽을 가치가 있는 건 무엇이든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혹은 이탈로 칼비노의 말. 읽기와 디시 읽기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 P57

여러 해 동안 나에게는 나의 책 읽는 삶과 정신 질환의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둘은 나란히 함께 자랐다. 전자는 나를 문학의 삶으로 이끌었고, 문학의 삶이란 읽기와 쓰기의 삶이었다. 후자는 나를 막다를 골목으로,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침묵으로 이끌었다. 나의 영원한 굶주림. 물론 나는 여러 크고 작은 방식으로 분명히 회복했으며, 나를 지탱해 준 것, 나에게 또 하나의 삶을 준 것은 읽기와 쓰기였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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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길리 생추어리
장윤미 지음 / 아미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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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 장편소설 『숨길리 생추어리』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세상에서 받은 고통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상실을 함께 극복해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버려진 동물을 돌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과 동물이 함께 하기 때문에 치유가 가능함을 따뜻하게 그린다.

돼지 축사에서 일하며 매일을 별 의미 없이 보내던 이십 대 청년 인진. 태국의 가족들을 위해 한국에 와서 힘든 노동과 멸시를 견뎌내는 외국인 노동자 꿍과 두리안.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와 고향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해유. 그들을 한곳으로 불러들인 건 해유의 아버지 동찬이 만든 숨길리 생추어리다.

아버지를 미워했고, 아버지를 떠났으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생추어리에 도착한 해유는 자신이 몰랐던, 모른 척하고 싶었던 아빠 동찬을 마주한다.

소설은 초반부 높은 값을 받기 위해 돼지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들을 과감 없이 표현하며 독자들에게 낯설어서 살벌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구제역과, 살처분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기후 환경을 급격히 무너뜨리는 패스트패션 문제를 드러내고, 외국인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폭로하며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그러나, 소설은 무겁게만 흐르지 않는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연민과 연대, 우정과, 애정을 품은 인물들로 그려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뜨뜻한 마음을 품게 한다.

그들 덕분에 소설을 읽는 일이 힘들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토닥이고 감싸안아주고 싶었다. 숨길리 생추어리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줄 것 같았다.



해유는 도대체 아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다.

"사라지는 거."

아빠의 대답에 해유는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아바는 말을 이어 갔다.

"사라지는 건 엄마가 마지막이야. 이걸 지키려면 품은리로 가야 해." - P132

"아저씨가 그랬어. 우리의 밤은 누군가에게는 낮이라고."

인진은 해유를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밤까지 누리면 누군가의 낮을 뺏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 P244

"사라지지 않는 게 어딨어요."
"없지. 하지만 타인의 힘으로 사라지는 건 안 되지."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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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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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을 읽을 때면 떠난다는 것, 남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곳으로 이주한 적 없는 나는, 낯선 땅으로 이주해 삶을 꾸려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듣고(읽고), 상상하고, 해석한다.

 

그 사이 대체로 많은 이야기들이 내 마음대로 오역되고, 받아들여지고, 이해된다.

 

때론 디아스포라 문학(소설)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작은 틈새로 각기 다른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폴 윤 작가의 <<벌집과 꿀>>은 그동안 읽었던 디아스포라 소설과 또 다른 틈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건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주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선명하게 혹은 흐릿하게 그려지는 이미지를 천천히 쫓으며 소설 한 편 한 편을 읽게 했다.

 

 

작품집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은 다양한 공간, 다양한 시간,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아우른다.

 

잘 모르는 장소, 낯선 지명, 낯선 분위기에 헤맬 것 같다가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문장과 그 문장이 그려내는 이미지들 사이를 유영하며 천천히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짧게 혹은 길게, 자의로 혹은 타의로, 어딘가로 떠난다, 자꾸.

'떠남''남고자' 하는 마음과 비슷한 게 아닌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나의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내가 정착해야 할 곳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아서, 그리워서, 슬퍼서, 외로워서...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너무 많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불현듯 알게 된 게 있다면, 어떤 소설은 책을 덮은 뒤 스토리나 인물이 아니라 잔상이 남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거였다.

물안개가 가득 낀 강가에 서 있는 것처럼 뿌연데 그게 답답하거나 축축하게 느껴지지 않고, 물안개가 걷히면 무언가 보이겠지, 희망을 갖게 했다. 편안하고 다정하게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이들을 환대하고 싶어졌다.

 

 

위에 언급했던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주민'일 지도 모른다고 쓴 건,

탈북 후 영국에 자리 잡은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 이야기를 다룬 <크로머>, 사할린 점에 끌려온 할아버지를 둔 조선인 3, 십 대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고려인> 소설을 읽고 난 뒤였다. 나고 자란 곳에서 낯섦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쫓으면서 정착할 집이 없고, 머물고 있더라도 이방인 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어도 집 없는 사람처럼 외롭고 내쳐지는 기분이 드는 순간, 떠나고 싶은 순간, 돌아갈 곳이 있을ᄁᆞ 되짚어 보는 어느 순간, 같이 있어도 외롭고, 슬픈 관계들 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러 돌아오실 건지 궁금했어요. 하지만 돌아오실 생각이라면,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필요 없다는 거구나, 그렇지?" 아버지가 말한다.

"그래요." 막심이 말한다. "전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 <고려인> 중에서, p236

 

 

출소 후 다시 삶을 살기 위해 낯선 동네에 자리 잡으려는 청년이 등장하는 <보선>, 낯선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장교 이야기를 담은 <벌집과 꿀>, 탈북한 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코마로프> 세 편의 소설은 특히 마음에 남았다.

 

소설이 왜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지, 우리가 읽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세상은 어떠한지......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 가며 마음껏 읽고, 듣고, 상상하시길.

 

 

# 그가 아는 한 그는 혼자였다. 이상한 동시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는 그들의 얼굴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던 상사와 다른 운전사들의 얼굴을. 그다음엔 카드 게임을 하던 바의 주방 직원들과 빨래방 할머니의 얼굴도 잊어버렸다.- <보선> 중에서, p15

 

# 저는 그에게서 늘 보아온 익숙한 분노의 폭발을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진지하면서도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더군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부탁이니 우리를 그냥 놔둬줘요. 우리는 아무도 원치 않고 관심도 없는 땅에서 ㅅ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당신이 와서 이 땅을 다시 차지하려 들기 전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요."- <벌집과 꿀> 중에서, p198

 

# 아버지, 저는 지금 당신이 어디 계신지 상상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요. 왜 누군가는 저주받은 장소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지도요. 아이는 이제 멀리 있습니다. 온통 햇빛으로 둘러싸인 채, 아주 조금만 보일 뿐입니다. 숨겨진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돌아오던 벌은 이제 더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벌집과 꿀> 중에서,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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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엄마에게
한시영 지음 / 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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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동안 알코올중독 엄마의 딸로 살아온 여자가 있다.

술 때문에 딸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한 엄마.

술 때문에 아무 데서 건 쓰러지고, 경찰의 전화를 여러 번 받게 한 엄마.

술을 사러 나가지 못하 게 한다고 과도를 휘두르던 엄마.

그런 엄마를 선명하게 미워했다고 썼다. 정확하게 사랑했다고 썼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그 문장이 너무 슬프고 기쁘고 찡했다.

이건 정말 알 것 같아서.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그랬다.

'엄마'라서 징글징글하지만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알지 않을까.

이 양가적 감정이 뭔지, 정확한 단어로 설명할 순 없을지 몰라도 느껴지지 않을까.

'그래, 그런 거 있어.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했어'. 하면서.

책 속에는 어린 시절의 저자가, 청소년기의 저자가, 어른이 된 뒤의 저자가 살고 있다.

그 옆엔 언제나 어른이었던 그녀의 엄마가 있었다. 의지하고 싶었으나 의지할 수 없었던, 그럼에도 곁에 있어 좋았던 엄마가.

사랑인 줄 몰랐으나 끝내 완벽하게 사랑이었음을 알게 해준 엄마가.

엄마가 되고 나서 알았다.

대단한 엄마라서가 아니라 그냥 '엄마'라서 아이들은 무턱대고 엄마에게 무한한 애정을 품어준다는 것을.

시도 때도 없이 그 사랑을 표현해 준다는 것을.

그래서 또 알았다. '엄마'가 가장 무서운 건 '자식'이구나.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

엄마가 어떻게 그래? 수없이 되뇌던 말이 작가의 문장처럼 "어떻게 저런 사람이 엄마를 해냈을까"로 바뀔 만큼의 시간이 내게도 흘러갔다.

좋으면서 슬픈 것, 좋은 것과 같이 딸려오는 슬픔, 아이가 병렬로 놓은 좋음과 슬픔이라는 단어가 담긴 문장을 곱씹는다. 좋고 소중하기 때문에 때로 슬펐던 시간들. 슬펐어도 분명히 존재했던 빛나는 시간들. 빛나던 시간 안에도 그늘은 존재하고, 유쾌한 웃음소리 안에도 글썽이는 눈물은 있을 수 있다. 좋고 나쁨을 정확하게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삶은 어렵고 복잡하다. 삶이 품고 있는 복잡성과 모순을 껴안는 것이 버거웠던 나의 시간들이 아이와 걸으며 떠올랐다. - <분홍색 나뭇잎> 중에서, p47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조금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왜 미워만 해야 한다고, 사랑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서로를 괴롭혔을까.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한다. 둘 다 할 수 있는 게 어쩌면 '행운'이 아닐까 하고.

손으로 밥을 차려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고부터 내게는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과 지켜내야 한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엄마가 날 버리지 않고 혼자서 기른 것처럼 나도 끝까지 엄마를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엄마를 향한 나의 돌봄과 사랑은 늘 초라했다. (...) 빨리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왜 나는 엄마가 나를 홀로 키운 것처럼 정성을 다하지 않느냐는 마음, 이 두 마음은 늘 동시에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엄마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게 엄마의 중독이 심해지지 않도록, 끝이 보이지 않는 이 터널을 내가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 <첫 외출> 중에서, p233


섣부른 짐작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자라면서 자주 "착하구나."같은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 듣지 않았을까. 엄마를 잘 챙기는구나, 엄마가 못 챙겨도 스스로 혼자 잘 하는구나, 너 참 착하구나, 그런 말들과 시선들. 내가 자주 들었던 말. 그래서 지긋지긋했으나, 벗어나기 힘들었던 말. 여전히 가장 취약한 말.


슬프고 기쁘고 찡한 감정으로 읽다가 끝내 참지 못했던 마지막 단락. 다시 태어나 엄마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다시 엄마를 선택하겠다는 저자의 말에 움켜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면서 마음이 요동쳤다.


"내게 한계였던 동시에 나의 잠재력이었던 나의 엄마. 나의 토대, 나의 기반."


우리가 끝내 엄마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엄마를 재창조하는 것만 같아요. 나는 그녀를 안다고 할 수 있는지 제게 되물어요. 그러면 저는 놀라울 정도로 확신해요. 내가 아는 모습이 엄마의 다라고요. 거만해 보이나요? 그런데 진짜예요. 나는 엄마를 깊숙이 알아요.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을 보았어요. 아니, 모두 안다고 하는 것이 마음 편할지도 몰라서 하는 말일까요. 누군가 제 글로 표현된 엄마를 보았을 때 입체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제 안의 엄마는 고정적이에요. 늘 그 자리에 찰싹, 끈질기게 제게 달라붙어 있어요.
- P13

저 사실 엄마가 죽고 나서 시원했습니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음이 터져 가슴을 부여잡고 우는 동시에 드디어 중독의 족쇄에서 풀려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의 아픔보다는 죽음이 가져온 해방감이 더 크게 느껴졌어요. 이제 새벽에 경찰서 연락을 받고 나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더이상 엄마가 외상한 술값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겠구나. 엄마의 몸과 마음이 다칠까봐 그만 불안해해도 되겠구나 하는 해방감이요. 엄마를 떠올리면 슬픈데 그립지는 않습니다. 27년을 중독자의 딸로 살면서 감내해온 고통은 엄마와의 이별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고통도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랑도, 이런 모녀도, 이런 가족도 있는 것이겠지요.
- P159

불행과 다정이 뒤섞인 시간들을 글로 쓴다는 것은, 그때는 묻어두기 바빠 알지 못했던 내 감정들을 꺼내어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색을 입히고 냄새를 씌우면서 그때의 내가 되는 일이었다. 나의 불행을 기억하고 쓰는 일. 쓴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불행을 껴안을 때 비로소 내 안에 숨죽이고 있던 시간들이 숨 쉴 수 있음을 느낀다. 불행이 내뱉는 숨에 의지하여 써 내려갈 수 있는 시간과 글이 있다면 여전히 아프고 괴로울지라도 좋을 것이다. 불행이 숨이 되고 글이 되어 내쉬어지는 날들이 더 많이 오길.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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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소설집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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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초기 노래 중에 <9와 4분의 3의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큰 아이가 덕질 중인 아이돌이라 귀가 따갑게 얘기를 듣는 중인데, 이 노래의 제목을 듣고 나서 "야, 무슨 노래 제목이 그러냐!"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지 않은 사람이다.

호크와트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매 새 학기마다 학부모들이 킹스 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학생들을 배웅한다.

이것도 검색해 찾아낸 내용이다.

정소연 소설가의 <<앨리스와의 티타임>>을 읽으면서 세계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문'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과 저쪽을 오갈 수 있지만 눈에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특정인들에게만 보일 수도 있는) 그런 문.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

묘한 느낌이 들어 계속 검색창에 생각나는 단어를 넣고 검색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킹스 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이었다.

그러고 나니 연쇄반응처럼 투모로의바이투게더의 노래 제목이 떠올랐던 거다.

숨겨진 9와 4분의 3엔

함께여야 갈 수 있어

비비디 바비디 열차가 출발하네

비비디 바비디 우리의 매직 아일랜드

이 터널을 지나면

눈을 뜨고 나면

꿈속은 현실이 돼

내 영원이 돼줘 내 이름 불러줘

- <투모로루바이투게더,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 부분>

가사를 찾아 읽고 나니 어떤 이미지들이 떠올랐고, 다시 소설 <<앨리스와의 티타임>>으로 생각이 연결됐다.

어떤 사람들은 본 적도 없을 우주의 한복판에서 정연이 이처럼 흔들렸던 순간이 있었다.

정연은 잠시, 지영에게 저 틈 너머에 수많은 세계가 있다고,

지영도 원한다면 그 사이로 아득히 흩어지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맞지 않는 세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지영이 얼마나 대단하고 대견한지 진심으로 칭찬하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정연은 지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한 번 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그리고 틈이 닫혔다.

- <비거스렁이> 중에서, p64

그러면서 계속 마음에 남은 단어가 있다.

'틈' 혹은 '틈새'

대체로 '틈이 생기다'처럼 쓰일 때 긍정보다는 부정의 느낌이 전해지는 이 단어가 소설에서는 자꾸 '희망'의 단어처럼 느껴지는 거다.

'벽'처럼 단단히 막혀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틈'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희망.

높기만 해 보이는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차근히 밟고 올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만나게 될 희망.

어쩌면, 지윤이 다른 계단을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학교 밖으로 통하는 계단을, 서혜가 어디에 있든 서혜에게로 열리는 계단을.

사라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어쩌면 열리는 계단들을 처음 찾아낸 것은 지윤 같은 사람들이었을지도 몰랐다.

먼저 앞서 나갈 만큼 용감하지는 않은 사람들, 조금 느린 사람들, 저 밖에서 내 곁으로 무사히 데려오고 싶은 이가 있는 사람들.

학교에는 아직, 지윤이 밟아보지 않은 계단이 아주 많았다.

- <계단> 중에서, p108

궤도선이 천천히 내려앉더니 이윽고 멈추었다. 우주항의 출구를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이 나를 금세 발견하고 일어섰다.

아버지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우리 사이의 틈을 메우듯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당겨 잡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물컹한 젤리처럼 밀려난 공간에, 희미하게 온기가 퍼졌다.

나는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고, 나보다 훨씬 길로 큰 아버지의 손을 감싸 쥐었다.

- <귀가> 중에서, p246



SF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던 건 언제나 내 발이 '현실'을 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설의 내용도 대체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내가 가능할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읽기를 바랐다.

정소연의 소설을 읽으면서 세계와 세계 사이, 틈과 틈 사이,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세계에도 결국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혐오 받는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이.

나는 언제나 누군가가 빈자리를 채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루트벤은 다른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셸던 부인이 낯선 시공을 헤매며 만들어간 것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빈자리로 남은 세계가 아니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앨리스와의 티타임> 중에서, p34

언제나,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고 나도 그렇다.

틈을 넘어가야 보일지도 모르는 내가 모르는 세계에 겁내지 않기를,

그 틈을 보아야 내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보일 것임을,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말기를,

소설을 덮고 난 뒤 오래 한 생각이다.


"아주 천천히, 아주 적은 글을 썼다. 삶은 외롭고 용기는 드물고 선의는 귀하여, 삶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보기에 가장 외로운 것, 가장 진심인 것, 가장 귀한 것을 모아 소설로 만들었다.

소설이라는 이 배가 당신과 나 사이의 긴 항해를 버틸 만큼 튼튼하기를, 시공간을 넘어 언젠가 결국은 당신에게 도달하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중에서,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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