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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평점 :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 나의 주체는 온전히 나인가. 누군가에 의해 '나'를 대리하는 또 다른 '나'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수히 많은 고민이 시작됐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이제 '시작'을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갈 길이 멀다.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다 읽었다는 시원함이 남아 있지 않다. 아쉽고, 두렵다.
어쩐지 내가 원하는 답을 결국엔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내가 대학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저자의 이전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흥미롭다는 표현보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공감했고, 아팠고, 어느 순간엔 참담했다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그 이후, 저자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이나 기사들을 찾아 읽기도 했고, 그다음 행보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여만에 이 책 《대리사회》가 나왔다.
단순히 지명을 외우고 막차 시간을 계산하는 데서 나아가 그 안의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그들의 도시는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는지,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러한 사유로도 확장된다. 그렇게 경험한 삶의 문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대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내 몸에 남을 것을 믿는다. p61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p77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안내하고 든 아니하고 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p105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p174
나는 나의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장 어두운 밤에 나를 위해 깜빡이를 켜둔 그곳으로 기쁘게 걸어간다. 나는 기꺼이 아내와 아이를 위한 대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아내 역시 아이와 나를 위한 대리로, 하지만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갈 것을 믿는다. 그렇게 서로를 대리하면서, 그리고 주체의 언어로 상대방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가족‘이 된다. p121
대리운전을 하며 만난 손님과, 어머니와 내가 공유하는 감정은 결국 ‘분노‘다. 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타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아마도 곧 노래와 음식을 넘어 또 다른 대리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다시 열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은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분노할 것이다.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익숙한 공간에까지 이미 침투한 대리사회의 괴물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강요된 환각에서 깨어나 온전한 나로서/우리로서 ‘즐겁게‘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p214-215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 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나 합법도 아닌,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법의 틈새를 이용한 ‘편법‘이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 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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