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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한 책들
장윤미 지음 / 사람in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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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책을 읽는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기도 하고,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읽기도 하고, 그저 좋아서 읽기도 하고,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읽기도 한다.

책은 자주 아무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

책이 내게 무언가가 되는 순간은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뒤, '아,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살 수 없겠다'하고 느낄 때다.

그건, 내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고

나의 옆 사람이, 나의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나를 뒤따라 오는 사람이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낄 때다.

장윤미 작가의 <<우세한 책들>>은 나와 너, 우리가 결코 무관한 사람이 아님을, 그러니까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의 모두가 조금씩은 서로에게 책임을 가지고, 다정하게 보듬으며 살았으며 하고 바라게 했다.

스물일곱 권의 책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스물일곱 명 이상의 사람이 나를 통과했다.

스물일곱 개의 모두 다른 모양을 가진 삶이 나보고 그 안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작가는 스물일곱 권의 책 속에서 세상의 약하거나 악한, 자유롭거나 구속당한, 아름답거나 불편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더듬는다.

무조건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듯, 한 권의 책 안에서도 무조건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작은 빛을 찾아낸다.


작가가 읽은 책을 나 역시 대부분 읽었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작가가 발견해 들려줄 때, 신이 나서 다시 그 책을 찾아 펼쳐보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작가와 같은 책을 두고 의견을 나누듯 '그랬군요. 나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같은 생각을 한 부분을 만났을 땐 '어머! 우리 좀 통하는걸요?' 말 걸고 싶었다.

책은, 보이지 않는 나와 당신을 연결한다.

작가는 나와 당신을 연결하기 위해 친절하게 다리를 놓아주었다. 혹시 가다가 넘어지지 말라고, 길을 잃어버리지 말고 서로를 꼭 알아보라고 다정하게 길잡이 해주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된다.

어디서든, 언제든, 기약 없이.

운 좋게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다면, 그건 아마 작가가 놓아 준 책과 책으로 연결된 다리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책임을 띠고 이 땅에 선 존재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 <여는 글>에서

당신은 지금, 어떤 이유로 책을 읽는가.

나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즐겁고 수다스럽게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덧) 작가가 읽은 스물일곱 권의 책을 다 읽지 못했더라도, 혹은 한 권도 읽지 못했더라도 이 책을 읽는데 전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을 통과해 읽는 사람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기에, 그저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책 속을 유영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삶을. 그리고 당신의 삶을.


나는 함부로 타인에게 "당신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는 내 이해의 대상이 아니고 나에게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도 아니다. 게다가 이해의 넓이나 깊이는 내 경험치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해한다는 말 대신 그와 내가 잊고 있던 낯선 감정을 복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나와 타인의 관계를 만드는 괜찮은 장치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은 쉽거나 간단하지 않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갈등도 필수다. 그럼에도 이것이 옳다고 믿는 이유는 나와 타인 모두가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P31

계급 쟁탈전에서 밀려난 아이는 자신이 당한 방법대로 다른 아이들을 차별하고 어떻게 해서든 계급사회의 서열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국 밀려난 최후의 아이는 벌레 아니면 거지라고 놀림받는다. 책이나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이러한 현실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해야 마땅하지만, 그래 봤자 저들에게는 그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불평불만처럼 보일 뿐이다.
- P170

절대적이고 완벽하게 자유로운 선택이란 없다. 선택지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결국 모든 선택은 허용된 조건 아래서 이루어진다. 조건이 공간이나 시간이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이든 간에 말이다. 다만 허용된 조건을 우리가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 P223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뇌의 것이 아니라 뇌가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뇌가 잘못해도 결국 책임은 뇌의 주인인 내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 <뇌가 편해지면 사회는 불편해진다>에서
- P243

정의와 공정의 기준을 능력에 두고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개인이 능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거쳐온 여러 특수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정량화, 수치화된 결과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자신이 쌓아 올렸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 <이것은 시험인가, 도박인가>에서
- P277

우리가 감정을 타인에게 표출하고 이해받기 바라는 이유는 외로움을 피하고, 고립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정이 타인에게 닿길 바란다. 물론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쓰레기 버리듯 타인에게 감정을 쏟아내고, 어떤 사람은 진짜 감정은 보물처럼 숨겨두고 가짜 감정만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감정까지 자본화하여 거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상대를 해칠 의도가 없는 이상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저 각자 살면서 터득한 감정 생존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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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눈 + 어린 왕자 (문고판) 세트 - 전2권
저우바오쑹 지음, 최지희.김경주 옮김 / 블랙피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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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이 막 되고 난 직후였다.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선명하게 기억 남는 건,
보아 구렁이.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

책 속에서 그 장면을 읽었을 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어린 왕자를 떠올리면 그 모자가 같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동안 연습장에, 책 사이사이에 그 그림을 따라 그렸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어린 왕자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 책 <어린 왕자의 눈>을 읽으면서 내가 왜 그 그림을, 그 장면 좋아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아마 그때 나는 '어른'들 때문에 꽤 쉽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기였는데 어린 왕자 속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어' 생각했던 것 같다(이건 물론 지금 짐작해 보는 것).  이 책에서 이야기해주는 '동심'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있는 중.

 

 「어린 왕자의  저자 저우바우쑹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쓴 이다. 저자는 문학을 사랑하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정치철학자.

「2014년 9월 홍콩에서 우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십만 명의 홍콩인과 함께 거리로 나가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했고, 자진해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2015년 가을부터 반년 동안 방문학자로 대만에 갔다. 대만에서 지내는 동안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다시 《어린 왕자》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p5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마 저자도 어린 시절부터 《어린 왕자》를 무척 좋아했을 터. 마음이 힘들 때, 위로받고 싶은 때, 쉬고 싶을 때 다시 만나게 된 어린 왕자를 통해 아마 저자는 철학자 다운 깨달음을 새롭게 얻어낸 듯하다. 그리고 그걸 힘든 시대를 힘겹게 건너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툭, 세상에 한 권의 책으로 던져 놓았다.

총 열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 속에는 각 장마다, 《어린 왕자》 속 한 장면을 통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어낼 수 있는 인생의 지혜를, 위로를,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철학자의 눈으로 다시 한 번 풀어내 이야기해 준다.

'꿈, 동심, 첫사랑, 길들여짐, 책임감, 친구, 고독, 선택, 행복, 이해, 아름다움' 같은 것들에 대해 어린 왕자의 눈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도, 작지도 않다.

 

 《어린 왕자》이야기 중에서 좋아하는 또 다른 부분은 바로 '길들여진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
책 속에는 열다섯 장의 첫 장이 시작될 때마다, 읽는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어린 왕자는 어떻게 장미와 여우, 그리고 조종사까지 그토록 쉽게 길들이고 그들 하나하나와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을까?'

「길들여짐은 절대로 일방적이거나 절대적으로 어느 한쪽의 결정에 따른 행위가 아니다.(중략)
중요한 건 일단 관계가 시작되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가 아니라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된다. 왜냐하면 길들여짐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이 발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주체성도 존중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p83」

어린 왕자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교감하고, 길들일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의 전제는 내가 '나'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물론 이건 꼭 어린 왕자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론적으로 어쩌면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잊고 지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면서 사랑받기를 원하기도 하고,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쉽게 자존감에 상처입지는 않았는지. 연인 간에도 부부간에도 말이지.

이 책은, 알고 있지만 잊고 있었던 것들. 알고 있지만 쉽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아, 그랬지. 그랬어.'하고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내 옆의 가장 가까운 이들을 함께 두고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게 해 준다.

 

 

 어린 왕자는 말한다. 길들여진다는 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결국, 작은 단위의 가족부터 시작해서 친구, 직장, 사회로 나가 우리가 가장 많이 신경 쓰고, 상처받으면서 해 나가고 있는 게 바로 관계 맺기가 아닌가.
어떻게 하면 그 관계들을 조금 더 평등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제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제도는 결국 '우리가' 바꿔 나야가 한다.
권력의 간섭 따위 걱정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신경 쓰지 않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걱정하지 않는 공정한 사회.

이 책을 읽으면서 책장에 꽂혀 있던 《어린 왕자》책들을 다시 꺼내 보았다.
90년에 산 책도 있고, 99년에 대학에 들어가면서 다시 구입한 책도 있다. 일본어로 된 책을 사기도 했고 최근엔 컬러링북으로 발간된 어린 왕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어린 왕자》를 읽는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작은 판형의 어린 왕자로.
잊고 지냈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다. 그런데도, 어제 만났다 헤어진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은 느낌. 반갑고 또 반갑다.
혹시 이 책(어린 왕자의 눈)을 읽는다면, 《어린 왕자》를 꼭 같이 읽어보시길. 반가움이 두 배가 될 테니.

말을 멈춘 여우는 한참 동안 어린 왕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부탁이니 날 길들여 줄래?"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 걸. 난 친구들을 찾아야만 하고 아라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어린 왕자가 대답했다.
"누구든 자신이 길들이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아 갈 시간도 없이 살지. 그들은 상점에서 다 만들어진 걸 사니까.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는 거야. 친구를 원한다면, 날 길들이면 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어린 왕자가 물었다.
"인내심을 가져야 해. 우선 나한테 좀 멀리 떨어져서 아까처럼 풀밭에 앉아 있어. 내가 곁눈질로 널 볼테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말이란 오해의 씨앗이니까. 하지만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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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 - 누구나 삶의 섬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
마크 A. 호킨스 지음, 서지민 옮김, 박찬국 해제 / 틈새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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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반,
호사스러울 만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누군가에게(의사)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쉬세요. 놀아요 놀아.'라는 말을 들었다. 일종의 처방전이었다.
내 몸은 혼자가 아니었고, 내가 열 달 동안 안전하게 품고 있어야 할 약한 생명이 자꾸 위태로운 신호를 보내던 참이었다. 앞뒤 잴 것 없이, 쉬었고 또 쉬었다.
침대에 누워서, 기대서, 앉아서.
그렇게 한 달쯤의 시간을 넘기자 차츰 몸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됐다. 그 정도면 잘 쉬었다' 하는 칭찬처럼 들렸다.

몸이 조금씩 괜찮아지니, 멍하니 누워있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 뭐 좀 해야지 않을까? 이렇게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청소라도 할까? 빨래라도 좀 더 해볼까?' 이런 생각들.

 

아이가 태어나고, 직장생활과 육아, 집안일 등등을 해오면서 '지루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지, 그럴 틈이란 게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늘 '아 좀 쉬고 싶다', '아무도 없이 혼자 좀 있고 싶다', '내 시간이 이렇게 없을 수가'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살았던 기억만 남아있다. 아주 가끔 아이가 잠들고 잠깐의 틈이 생길 때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몸을 움직였던 것 같다.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블로그를 하거나... 그냥 지루하게~라는 건 있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말이다.

이 책 속엔 한국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낸 캐나다인인 저자가 한국 생활 동안 자신과, 한국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 느낀 것들을 '지루함'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해 낸 글들이 담겨 있다.

지루함이 무엇인지, 왜 사람들은 지루함이라는 감정을 회피하는지, 왜 우리에게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공간이 필요한 것인지, 일상 속 지루함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들.

조금 솔직해지자면,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역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상상하는 일은 두렵다.  그러니까 결국엔 '지루함'이라는 것도, '휴식'이라는 것도, 무언가를 부지런히 열심히 해낸 뒤에 따라오는 보상 같은 것이라야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내 스스로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앞으로도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일상 속 지루함의 중요성'에 대해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일상 속 지루함의 중요성>

○ 지루함은 우리의 한계를 무너뜨린다
    충만한 삶을 영위하려면 의미 체계 안에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맞는 의미 체계를 창조하기 전에, 불만족스러운 삶의 기저에 깔린 의미 체계를 파괴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중략) 지루함을 받아들이면, 최고의 인생을 향유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편협하고 제한적인 세계관과 개인적 신념을 무너뜨리기가 수월해진다.

지루함은 인생을 창조하기 위한 무한의 공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유토피아와 삶의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틈새가 있다고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지루함이다. 지루함은 모든 게 지루하고 의미 없는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돕는다. 그 무엇도 우리가 꾸준히 행복한 마음으로 살도록 지켜 주지 않는다. 이 사실을 깨우칠 때, 우리의 행복은 절대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해줄 완벽한 무언가를 찾는 것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하면서 지루함의 공간을 채울 자유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불현듯 다가온 무한한 공간에서 원하는 인생을 창조해 나가게 된다.

지루함을 이용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지루할 때면 인생의 모든 게 다 어그러진 것처럼 느껴진다. 내 인생이지만 타자가 되어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중략) 지루함은 당신에게 속삭인다 '이봐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당신만의 이야기를 써야죠. 행복한 결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다고요.' (중략) 지루함은 당신이 세상 현실이라는 고삐에 끌려가지 않고, 상상을 펼치고 정신적 방랑을 하도록 공간을 마련한다. 당신이 이 상태를 받아들일 때, 지루함의 공간은 당신 인생에서 의미 있는 비전을 창출하도록 돕는다. 지루함의 공간을 인생 안에 더 많이 허용할수록, 더 깊은 개인적인 통찰이 그 공간 안에 들어온다.

지루함의 공간 채우기
    인생을 어떻게 채워야 한다는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지루함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보였던 반응을 자각하는 행위는 길잡이가 된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 둘 게 있다. 술을 몇 잔 마시고, 열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고, 넷플리스에서 시리즈 하나를 탐닉하는 게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의하는 게 이 책의 의도가 아니다. 지루함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는 게 '올바른'지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어떤 개인적 이유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지루함을 채우기 위해 그 순간 당신에게 최선인 활동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인생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깊이 생각한 후에는, 언제든 필요가 느껴지면 지루함의 공간을 이용해 자신의 미래상을 고찰하고 수정해야 한다.

 ○ 지루함은 즐거움을 더한다.
     살면서 지루한 시간을 갖는 건 중요하다. 지루함을 통해 창조 유형과 소비 유형을 누그러뜨릴 수 있고, 인생의 주객이 전도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온갖 활동들로 인해 인생을 빼앗기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지루함은 귀중한 수단인 동시에, 창조나 소비만큼이나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인간 존재의 한 유형이다.

○ 지루함은 의미를 더한다.
    일상 활동에서 지루함이 즐거움을 키워주듯, 인생의 의미도 더한다. 의미 있는 것들과 잠깐 거리를 둠으로써 다시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다 보면, 그저 가게에 걸어가는 활동만으로도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나무에 달린 이파리는 전보다 더 생기 넘치는 초록빛이고, 살결이 간지럽히는 산들바람도 새삼 상쾌하게 느껴진다. 인생에 지루함의 자리를 더 자주 마련해주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예전보다 생명력이 넘칠 것이다.

○ 지루함은 철학적 사유를 더한다
    우리가 지루할 틈을 가질 때마다, 인생과 세상, 존재를 통찰할 기회를 얻는다. 인생에 지루함을 더 많이 허락하면, 이러한 통찰들은 상호작용과 혼합을 반복해 더욱 새롭고 심오한 통찰을 내놓는다. 지루함은 위대한 인생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이 될,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발견이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곳이다.

○ 지루함은 영혼의 훈련
    지루함은 우주의 순수한 경이와 신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또한, 우리가 미지의 우주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과 조우하는 시공이다. 인간의 존재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살면서 겪는 사건들을 한 발 떨어져 보게 해주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조금 더 오래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나'를 온전히 쉬게 내버려두는 '지루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않고, 그러나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비로소 온전히 '나'가 되는 경험.
짧더라도 온전한 그 시간들을 모으고 모아, '나'를 만들어 가는 마음의 여유가 허락되기를.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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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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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곱 살 언니 되면 할게."
나나, 신랑이 아이에게 "이제 혼자 밥 잘 먹어야지~", "옷도 혼자 다 갈아입고~", "장난감방 정리도 하고~", "약속한 건 잘 지켜야지~"라고 말할 때마다 여섯 살 아이가 한 말이다.

아이는 그렇게 일곱 살이 되었다.

지난밤, 아이 아빠는 말 안 듣는 아이에게 말했다.
"일곱 살되면 혼자 잘 한다며~ 말도 잘 듣는다며~, 아빠는 이럴 때 혼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해?"

"음, 화 안 내야 해~"라며 해맑게 웃는 아이.

이제 곧 둘째가 태어나기는 하지만, 아이는 6년 동안 혼자 자랐다. 모두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했고,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건 거의 다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때론 우리가 아이를 너무 버릇없이 키우나, 너무 부족한 거 모르게 키우는 건가 싶어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한 번 큰 소리를 내고 나면 이게 잘하는 건가 싶고, 울먹이는 아이를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가족'이라는 말만큼 마음을 약하게 하는 말도, 행복하게 하는 말도, 슬프게 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 그러고 보면 '가족'이라는 이름만큼, '가족'이라는 공동체만큼 모순적인 게 없다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장 아파야 하고, 가장 아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상처를 주는 어느 집이나 비슷비슷한 모습 말이다.

대부분의 체벌이, 학대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깊게 관심을 갖고 싶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화되는 학대받는 아이들. 버려지는 아이들. 이 아이들 역시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저자는 '가족 내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인 아이를 중심에 놓고 우리의 가족, 가족주의가 불러우는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싶어 ' 이 글을 썼다 했다.

이 책 속의 글들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건, '아이'는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종 나는, 아이에게 느끼는 책임감이 무서울 정도로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아이가 다칠까 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아플까 봐, 공부시키고, 좋은 거 먹이고, 예쁜 옷 입히고 그렇게 내가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 말이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나 역시 아이가 마치 '나'의 부속품인 듯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아이에게 큰소리를 내고, 체벌이라는 이유로 때론 '너 잘 못했지?'하고 윽박지르고......

저자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된 글은 1.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2. 한국에서 '비정상'가족으로 산다는 것, 3.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 가족을 규정하나, 4. 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의 챕터로 나눠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울타리인 가족 안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는 학대,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고 차별하는 현상, 혈연으로 묶이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너무 오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올바른 가족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조금 더 진지하게 하게 했다.

1부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속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자녀 살해 후 자살하는 가해자 중 압도적으로 어머니가 많다는 점. 서양과 달리 국내의 경우 영유아기를 넘어선 뒤에도 부모 중 한쪽이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시도할 경우 어머니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 더불어 아버지 단독에 의해 자녀 살해 후 자살의 경우 가장 중요한 원인은 시대 변화와 상관없이 '배우자의 가출' 이었다는 점.
결국, 한국 사회에서 '친엄마'가 없는 것이 자녀 살해와 죽음을 선택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며, 친엄마 역시 자녀의 생존을 자신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개인이 자신뿐 아니라 자녀의 생사를 선택하는 무서운 결정을 할 때조차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짙게 배어 있다, 내용을 읽으면서는 무섭기까지 했다.

 가족이, 부모가 정상적인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할 때, 아이들은 누가 보호해 주어야 할까.
여전히  개인적인 ' 가족일'로 치부한 채 학대로 내몰리는 아이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위의 단어들은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 정리한 기록이다.

어른들이 느낀다고 해도,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단어들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어 온 무수한 폭력이 더 이상은 아이들에게 행해져서는 안된다는 책임감.
나와 다른 가족의 형태라고 해서 무시하고, 차별하고,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지 말아야겠다는 반성.
아이도 어른도, 가족 안에서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실을 실제 삶에서도 적용시키고 싶다는 바램.

이 한 권의 책이 내게 던져준 질문과 생각거리가 너무 많고 무겁다.

작년부터 나는 '미혼모'와 '입양'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좀 더 올바른 어른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려면 '미혼모'에 대한 지원이, 그들이 키우는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절실하다.

이 책은 여러 통계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정상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행하고 있는 무차별적인 학대와 비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한 번 더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책. 함께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책이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리스트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따로 적어두고 올 한해 천천히 읽고 보고 싶다.

늘어나는 비혼과 저출산으로 가족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나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현실과 달리 사람들의 의식과 제도에는 여전히 가족주의와 그것의 강력한 작동 방식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p9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작은 인간‘이다. 그저 작을 뿐 성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여린 생명체다. 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가 그 사호의 수준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작은 단위의 사회라 할 가족도 이를 중심에 놓고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p11

부모의 훈육적 체벌은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신체의 온전성 및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상 부모 중심, 성인 중심 해석일 뿐이다. 체벌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p29

문제없는 가정에서 자신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저는 맞아도 싸요"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 "나만 없으면 우리 집은 행복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자신이 가족의 행복을 해치는 비정상적이고 문제 많은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p70

우리는 어떤가. 잇따른 아동학대 사망사건들과 세월호의 비극 이후 아이들의 삶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과연 이대로 좋은지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반성과 자각을 하고 있나.
사회가 함께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 없이, 남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불안으로 모두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놀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떨려나거나 부모의 소망은 충족시켰을지언정 자기 인생을 위해서는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아이들에게 맘껏 놀며 자기 속도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힘껏 가보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걸까. p76

과거 친권은 사람의 물건에 대한 지배권처럼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일종의 지배권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부모 권리의 객체였을 뿐이다. 그렇게 친권을 ‘권리‘라고만 표현하다가 ‘자녀를 보호, 교양할 권리, 의무‘라고 정의한<민법> 조항처럼 ‘권리이자 의무‘로 부르게 된 것도 과거에 비하면 큰 진전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친권이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가족이 그 안에 속한 개개인, 특히 아이들의 차별 없는 권리와 평등을 보호해줄 수 있으려면 권리보다는 의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공공의 역할이 필요하다. p109

나는 미혼모가 양육을 선택하지 못하고 아이를 버리게 되는 첫 번째 이유로 출산은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야만 정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벗어나면 ‘비정상‘과 ‘부도덕‘으로 몰아세우는 한국의 가족주의를 꼽겠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인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결혼=출산‘의 등식이 지나치게 확고한 탓에 제도의 바깥에서 출산함으로써 가족의 순수함을 훼손했다고 여겨지는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제도적, 사회적 차별에 시달린다. p115

중요한 것은 친엄마의 양육이 더 좋고 입양이 더 좋고를 떠나서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회구성원들처럼 미혼모에게도 자신과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말뿐인 다양한 가족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차별 없이 다양한 가족이 공존할 수 있도록 결혼을 둘러싼 법 제도의 개선, 여성의 양육권과 아이의 인권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p128

양극화된 가족 삶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사교육 과열 양상이 보여주듯 중산층은 계층 하락을 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총력 경쟁에 나선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므로 아이의 자율성, 개별성이 고려될 여지는 희박하다. 반면 소득과 경제적 유지가 불안정한 저소득층은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돌봄 공백‘ 상태에 빠진다. 이 탓에 아이들은 자주 방임 상태에 놓이고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이 되어 학대에 시달리는 아이들도 늘어난다. 국가가 모든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해버린 탓에 가족이 각자도생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서 가장 약한 자인 아이들이 늘 피해자가 된다. p176

가족주의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심리적 분리는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자신 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모습과 싸우고, 달래고, 도망치고, 협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곧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나이가 든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어쩌면 평생 지속해야 하는 과제이다. 나는 그 과정을 어떻게 치러내는가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각자도생의 경쟁 속에 이기적 가족주의의 강력한 영향이 모든 사람의 삶에 어른거리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p190

거의 모든 복지국가들이 운영 중인 아동수당은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성별, 재산, 혼인상태, 사회적 출신, 종교, 출생지 등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도 차별받지 않고 자라야 한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인식하자는 차원의 제도이다. 그래서 부모의 소득이나 자산을 조사하지 않고, 한 부모인지 아닌지, 부모가 둘 다 취업상태인지 아닌지, 부모가 원하는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지원해야 그 취지에 맞다. 왜냐하면 아동수당은 아이들의 시민권에 대한 공적 보상이고 모든 아동의 생존권과 건강한 발달을 보장하는 것이 핵심인 정책이기 때문이다. p24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을 때 항의하고 신고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이지, 우리가 모두 이웃의 아이를 함께 지키는 대가족 구성원의 마음자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폭행하는 가정폭력에 대한 해법으로 공동체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아동폭력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어릴 뿐 온전한 인간인 ‘작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인권유린을 없애는 게 우선이다. 체벌, 아동학대,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모두 아이들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아서 빚어지는 비극인데 해법도 더 많은 공동체를 내세우며 개인을 소거해서는 안 된다. p260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미 시작되었다. 2016년 겨울부터 전국을 달궜던 촛불집회에서 나는 그 희망을 본다. 그 어떤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도 각 개인이 광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도 연대할 수 있음을 우리는 가슴 뜨겁게 경험했다.(중략) 촛불의 벅찬 경험이, 민주주의의 학습이 각자가 속한 삶의 장에서도 중단 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촛불로 태어난 정부가 공공성 강화를 통해 가족의 짐을 덜어주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각 개인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보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가족 안팎에서 ‘정상가족‘의 숨 막히는 틀 대신 수평적 유대관계를 통해 아이들의 자율을 존중하고, 다음 세대에선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개인들이 자라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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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선 - 나의 섹슈얼리티 기록
홍승희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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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초조하게 임신테스트기를 바라보던 어느 날 오후, 두 개의 붉은 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붉은 선은 '너의 삶은 이제부터 정지될 예정
이라고 선고하는 것 같았다. 예감은 실제였다. 임신중절수술 후 몇 개월 동안 두통과 복통, 외로움과 배신감에 떨었다. p5

하필이면 그랬다.
조산기로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이 책을 읽었다.
배가 아파 병원에 가면서 가방에 챙겨 넣은 책이 하필이면 이 책, 『붉은 선』 이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한 권의 책을 읽는데.
뱃속의 아이를 지키겠다고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 병실 침대에 기대서 누군가가 낙태 수술을 하고,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해 고백한 글을 읽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럴 일도 아니지만 괜히 혼자, 마음 한 켠이 찌릿했다. 그리고 곧 부끄러워졌다. 나의 편견이.

 

 이 책 속에 실린 몇 편의 글을 <일다> 홈페이지에서 이미 읽었다.

책으로 나오기 전의 글들을 읽으면서도 놀랍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그것도 친한 친구에게조차 털어놓기 힘든 경험을 공유하는 글쓰기를 한다는 것 자체로.
개인의 이야기를 할 때, 혹은 글로 적을 때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숨기거나 미화하거나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 건 온전히 내 기준에서였다. 저자는 적어도 숨기거나, 포장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대단하다고 과시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조근조근 털어놓는다.

초등학생 때의 첫 자위, 십 대 시절의 첫 경험, 낙태, 강간, 성노동 경험까지.
쉽게 쓸 수 없었겠지만,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는 저자의 고백이 어쩐지 조금 이해가 될 듯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건 정말이지 꼰대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비슷한 시대에 초, 중, 고를 다니고 이십 대, 삼십 대를 보냈는데 이렇게 삶의 모습(겪은 일들이)이 다를 수가 있다니.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건가. 아니면 저자가 유난히 안 겪어도 될 일을 겪으며 살았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뜨는 저자의 기사 밑에 달리는, 페이스북 저자의 포스팅 글에 달리는 댓글들엔 옹호의 글도, 응원의 글도 많지만 악플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많았다.
이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이 쓴 리뷰가 궁금해 검색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나는 여전히 헷갈린다. 이 책의 글들이, 다수의 사람(아직 어린)들에게 공개되는 경험의 공유가 긍정적인 것인지, 혹은 아직은 어린 사람들에게는 부정한(왜곡된) 시선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인지......
그렇지만,
" 나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쓴다. 세상의 이름과 규정이 더는 나를 대신하지 못하도록 이름을 뚫고 말 거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병이 나거나 몸이 간지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당신 속에 있는 나를, 비체가 된 나를 당신이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중략) 이제 나는 더 크게 숨 쉬고, 더 깊게 잠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나의 꾸물꾸물한 오늘을 지켜냈으면 좋겠다. p11"라는 저자의 고백을 지지한다.

일부러 옹호하고, 지지하고, 권장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리고 내 아이들 역시.

 임신중절수술 자체보다 그 이후에 들이닥친 고통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 수많은 여성이 혼자 갇혀 있었을 독방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남성 중심 사회의 맨얼굴을 온몸으로 직면했다. 지금 나는 그들이(이 사회가) 원하는 것처럼 두렵거나 수치스럽지 않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다. 여성을 억압해온 전형적인 '문란한 여자' 서사의 무기로 나를 입막음하려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여성 인권을 말하며 존경받는 사회라는 게 허무하고 슬프다. 민주주의와 여성 인권ㅇ르 위해 한평생 살아온 그들이 지킨 것은 결국 가족의 명예였다. 자신의 아들,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협박도 불사하는 가족 안의 휴머니스트들. 내가 활자 속 페미니즘, 엘리트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이유다. 나는 내 몸이 겪은 일들만 말할 수 있다. p193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많은 여성들이 읽어야 하고 공유해야 하고, 함께 생각하고 나눠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라나는(아직 어린 혹은 청년인) 남성들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여성 혐오, 반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즘 지지자 뭐 이런 것들도 양분하지 않고, 그냥 좋은 사회, 좀 더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남자라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같이 한 일에 같이 책임을 질 줄 하는 사람으로 자라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여성을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같이 잔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을 때 도망치는 남자들이 결국 숨는 건 여성인 자신의 엄마 뒤가 아닌가. 엄마의 치마폭 뒤에 숨어 자신은 조용히. 엄마가 해결해주는 대로.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상으로 나오는 덜떨어진 인간(남자 이전에)이 되지는 말아야지 않을까.

글만큼이나 함께 실린 그림이 참 좋았다.
그림만으로 저자의 마음을, 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섣불리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겠다.
응원한다고도 말하지 않겠다. 다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조금 더 솔직한 나를 만나게 해줘서. 한 번 더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게 해 줘서.
누구에게나 혼자만 품고 있는 '붉은 선' 하나쯤 있지 않을까.
그 선 밖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갈 용기가 생겼을 때, 나는 진짜 어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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