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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8월
평점 :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 의 저자로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알려져 있다. 호모 루덴스는 유희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아마 사람만이 유희를 안다고 해서 지어진 것 같다. 네덜란드 출신의 요한 하위징아는 1872년에 태어나 194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20세기 인물이다. 이름만 들어서는 근대 인물인 줄 알았었다. 교과서에서 익힌 이름 같은데 나이 마흔이 되니 그것도 가물가물하다. 중세의 가을 역시 저명한 저술인데 이제야 호모 루덴스,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이 모두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것인 것 같다.
연암서가의 중세의 가을은 이전에 나왔던 번역본들 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 일단 판본도 까다롭게 결정되었고 한권만 참고하는 것이 아닌 여러 나라의 판본으로 번역했으며 일반인이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을 좀 더 의역하고 나누어서 일반 대중들이 읽기 편하게 했고 원작에는 없는 소제목이 있어서 이 두껍고 웅장한 책을 거뜬히 며칠만에 다 읽게 했으니 말이다.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옮긴이의 말과 네덜란드어판 서문과 독일어판 서문도 함께 소개해 주고 있어서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읽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알 것 같으면서 모를 것 같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책을 다 읽고 다시 옮긴이의 말을 읽으니 한번에 정리가 되는 게 아닌가! 요한 하위징아는 아주 많은 언어에 통달한 언어의 천재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중세의 시나 문학들이 더욱 다가왔다고나 할까. 이 책은 주로 1300년대 중반부터 1400년대와 1500년대 초반까지의 프랑스와 부르고뉴 공국과 잉글랜드와 독일의 이야기를 아우르고 있지만 주로 프랑스와 부르고뉴의 역사와 중세의 시와 문학 그리고 여러가지 유희들, 그리고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 얀 반 에이크에 대한 저술이 양적으로 많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 대담공 필립이니 무외공 장이니 선량공 필립이니 하는 왕들은 부르고뉴의 왕이었고 샤를 5세, 6세, 루이 11세 등의 왕들은 프랑스의 왕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합쳐져서 나오니 헷갈리기 일쑤였는데 옮긴이의 글을 읽고서 확실히 정리가 되었다.
중세의 가을은 중세 후반기를 그리고 있어서 르네상스의 태동기와도 겹친다. 부르고뉴 공국은 서구의 책이나 역사를 보면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전무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 같다. 지금의 네덜란드는 예전의 플랑드르 지역이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아주 세세하게 알 수 있었다.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지역은 남북으로 함께 존재하기도 하였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와 부르고뉴 사이에 백년 전쟁도 일어났으며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잔 다르크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화가들의 초상화만 보고 부인감을 정했던 샤를 왕의 이야기나 부르고뉴 안의 아라스시의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며 중세 특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죽음의 춤의 '당스 마카브르'의 풍속과 메멘토 모리의 정신을 알게 된다. 굳이 인간의 몸이 흉하게 변하는 것들을 조각하고 그려서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고 죽음의 황폐함과 인정사정없는 무자비함을 그리다 보니 자녀가 죽어서 애틋해 하는 그런 모습들도 중세의 기록에서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중세인의 이러한 특징들은 현대인에게는 조금 낯설다.
라블레나 에라스무스, 보카치오등의 작가들의 작품들과 기사도를 보여주는 각종 시들, 그리고 에로틱한 이야기인 '장미 이야기'의 소개등은 중세에 대해 무지했던 나를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중세의 민중들은 오히려 축제나 놀이를 통해서 유희하는 인간들이었고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며 성스러움과 욕설이 결합한 사람들이었다. 중세의 상징주의 또한 특징인데 교황과 수도사들의 세계에서 님프며 그리스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14세기 무렵의 알레고리들은 신화속 님프와 올림푸스 산의 모습과 경합하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그림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 의 화가 얀 반에이크의 중요도 역시 이 책의 예술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당시 플랑드르의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보여주고 분석해 줌으로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 책은 중세 후반기 즉 중세의 가을을 너무도 여실하게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실제 작가가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장소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자료들을 모으고 조사하고 또 편집하고 엄청난 인내심과 노력 그리고 천재성으로 태어난 작품을 우리가 편히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감동적이다. 이 책은 두고두고 몇 번은 읽어야 조금 더 이해가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읽는 동안의 즐거움은 매우 컸다. 다 읽고 나서 정리가 안되고 금방 잊어버려서 그렇지. 그건 나이탓으로 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