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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두는 여자
베르티나 헨릭스 지음, 이수지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체스 두는 여자는 독일인인 작가 베르티나 헨릭스가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쓴 첫 프랑스어 소설이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마자 프랑스 라파예트 문학상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각종 신인문학상을 휩쓴 화제작이 되었다. 이십대 초반에 단기유학으로 파리에 온 이후 정착해서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파리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프랑스를 동경해서 모국을 떠나 온 그녀답게 정말 멋지게 첫 작품을 써내버렸다.
이 책을 읽는 순간, 잊혀졌던 열정이 되살아났다. 마흔세살의 엘레니는 그리스 제도의 낙소스섬의 토박이로 성장한 낙소스섬의 관광지에 있는 호텔의 룸메이드이다. 호텔룸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바로 그 직업말이다. 성실하고 확실하게 일을 해내는 그녀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도 일을 멋지게 하는 재주가 있어서 손님들도 편하게 하고 호텔의 주인인 마리아의 마음에도 든 여인이었다. 낙소스섬의 다른 여자들처럼 때 맞춰서 남편과 아이들과 식사를 하고 매일 아침 호텔에 출근을 하고, 워낙 어려서부터 본 사람들이라 따로 우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살아 온 세월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마흔이 넘어서 새로운 생각에 사로잡히고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된다니!
발단은 체스를 발견한 프랑스 부부의 룸에서였다. 체스를 두는 프랑스 부부라.. 동경이 일어났다. 그녀는 프랑스로 가고 싶어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여유 있어 보이는 프랑스 여인이 부러웠나 보다. 그 방에 한눈이 팔려서 이것저것 본 미안함에 그녀는 프랑스 여인의 잠옷 드레스를 단정하게 끈을 묶어주고 나온다.(실제로 이 작품의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작가가 여행을 간 호텔에서 이렇게 잠옷을 정리해 둔 룸메이드가 있었고 고마움을 느꼈으며 그 순간 룸메이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작품의 구상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런 세밀한 문체는 여성적이면서 배려심 넘치는 아름다움이 있달까...남자작가와는 다른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여자란.. 누구이며 무엇인가...특히 나이들어 가는 여자란 인간의 어떤 지점일까. 이제는 더 이상 여자들의 질투어린 혹은 부러운 시선도, 남자들이 뒤돌아 보는 일도 없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여자...엘레니이며 바로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작은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이들어 가는 여자들은 강하다. 이 소설에서도 체스에 뒤늦게 눈을 뜬 그녀의 열정어린 체스 사랑이 펼쳐보여진다.
가족들일도 직장일도 체스를 하기 위한 그 순간을 위한 일들로 바뀌어 가는 진정한 몰입의 상태. 몰입은 사람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몰입은 곧 행복감을 주고 희열을 준다. 체스를 배우기 위해 선생님이었던 노인인 쿠로스의 집에서 함께 체스를 두는 장면들은 진정한 인간애를 느끼게 하며 미소를 짓게 한다. 남들의 오해도 사게 되는 상황. 소설은 과연 어떤 식으로 끝이 날까... 소설은 얇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많은 생각을 준다. 아름다운 낙소스섬을 떠올리며 이국적인 감상에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다. 잠시 꿈같은 여행을 다녀 온 기분이 드는 멋진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