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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타워'로 상상력을 발휘한 배명훈의 새 소설집 '안녕, 인공존재!' 를 반갑게 맞아 손에 들었다. 손에 든 순간부터 놓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 작가. 그의 머리속은 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런 상상력을 이런 플롯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소설가 신경숙이 이 소설집을 보고 "다른 별에서 써가지고 온 것 같은 서사의 신선함"이라고 논한 것에 완전히 동감한다.
여섯살난 아들은 매일 우주에 대한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진다. 더불어 '트랜스포머'에도, 자동차에도, 스텔스기에도...그보다 다섯살 많은 딸아이는 한번도 이런 것에 빠져 본 적이 없다. 거 참 희한하다. 따로 가르쳐 준 것이 없는데도 집에 있는 전집중에서 그런 책만 골라서 읽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장난감도 점점 그런 쪽으로 구색을 맞춰간다. 배명훈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내 막내인 아들이 생각난다. 남자들만의 세계..과학과 기계와 매뉴얼과 하늘과 우주에 대한 동경...
크레인크레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기중신이 중국의 어느 산간 마을에 크레인을 직접 내려 크레인 운전사가 일종의 무녀 역할을 한다는 기가막힌 줄거리의 단편이다. 한국에서 소형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다 만난 여성에게 부인도 사랑하면서 또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 묘령의 여인이 중국에 들어가 가업을 잇게 되었다는 말에 무작정 휴가를 얻어 중국으로 향한다. 그녀는 크레인 운전사다. 매일 서너번씩 버스를 끌어 올려 윗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아래 땅으로 내려주기도 하고 본래 자리로 올려 주기도 하는 엄청난 역할을 한다. 마을의 모든 사람도 그녀를 보면 합장을 하며 우러러 본다. 남자는 그녀와 결국 사랑에 빠져 사랑을 나누고 그 마을에 남기로 한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짊어질 자신이 없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 크레인이 그를 붙잡는다. 그리고 우주로 저 먼 우주로 기중신이 태초에 있는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체험을 하고 살아난다...무녀가 늙을 때까지 그도 옆에서 늙어간다. 한국에 부인을 남긴 채...
누군가를 만났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가막힌 플롯을 가지고 있다. 에스에프적인 먼 미래에 화성 발굴에 모인 한중일 삼국의 발굴단에 모두가 꿈꾸었던 이상한 꿈...혼령이 숨쉬는 곳엔 고고심령학이...영매까지 등장한다. 한 셔먼이 무언가의 목을 치는 장면을 모두가 꿈꾸고...마침내 발굴된 그 무언가는 화성탐사선과 닮았고...기계가 생명을 가진 것인가.. 내가 읽었음에도 확실히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먼 미래에 고고심령학이라니..발굴단에 필요한 것이 영매라니...정말 기가막힌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안녕, 인공존재! 도 기가막히다. 존재가 제품이 되었다니.. 나의 첫사랑이자 친구인 신우정박사는 어느 날 갑자기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 그녀가 남긴 것은 조그마한 조약돌 모양을 한 존재...신우정 박사는 아무도 구입할 것 같지 않은 제품을 발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안 팔릴 것 같던 제품들은 날개돋친 듯 다 팔리는데...이 존재만큼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존재라니..아이구야..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의 공법으로 디자인 된 존재..미치겠다..
"신우정 박사 유작입니다." ...."인공지능 같은 건가요?" "아니요. '인공존재'라고. 최고의 공학자가 만든 물건입니다. 이건 진짜 예술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쓸모가 하나도 없거든요." "존재라, 태생적으로 외로운 물건이군요." "네, 외롭게 태어난 물건입니다." "우리만 외롭게 태어난 게 아니었군요. 자, 그럼 그 외로운 인공존재를 우주로 내보내도 될까요?" "예." " 그럼 임무 통제관이 고 명령을..."
매뉴얼에서의 이모의 조카사랑...갑자기 여행을 떠난 부모를 잃은 아이...그 아이가 핸드폰 매뉴얼을 읽으며 그 누구도 일찌기 알지 못했던 서사를 읊어댄다. 마로하의 예언을...매뉴얼이 천년전의 예언의 서라는 사실...그것도 핸드폰 매뉴얼이다.. 또 하나의 엄청난 상상력...미성이라는 여섯살난 아이는 매일 혼자서 논다. 이모는 아무것도 교육을 해주지 않는 태평한 언니의 양육방식을 걱정한다..그런데 문체가 딱 신경숙씨나 여성소설가가 쓴 것 처럼 일상생활에서의 대화라든가 상황이 너무나 섬세하다. 총각같은데 어찌 이런 걸 다 알까 싶을 정도로...또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그가 이렇게 희한한 글쓰기를 할수도 있고 정상적인(?)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걸...
얼굴이 커졌다는 저격수의 사랑과 일 이야기이다. 이것도 배명훈 특유의 상상력으로 똘똘 뭉쳐있다. 인터넷 소설들의 가벼움 속에 오히려 배명훈은 뚝심있는 작가로서의 면모가 보이는 진짜 소설가이다. 그의 다른 작품, 특히 앞으로 장편소설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