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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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30 윤이형


말 그대로 미친 바람이 불어서, 창 밖 창 안 나무들이 꺾어질 듯 흔들리고 단발머리 소녀도 기저귀만 찬 발가숭이도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그러면서도 각자 뭔가 집중해서 들여다본다. 예전에 끄적여둔 낙서가 잔뜩 담긴 스케치북, 바람에 날리는 이면지 같은 것. 습하고 무덥다. 저도 모르게 잔인한 소년이 휘두르던 줄넘기가 내던 소리를 닮은 바람 소리가 무섭다. 세상이 망하는 날의 오전같이 평화롭다. 평화는 깨지고 단발머리와 발가숭이가 싸우는 소리, 울음소리가 그런 날 아니고요, 그냥 평범한 날임을 일깨운다.
그리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읽어도 모르겠다. 더 많이 읽어도 모를 것이다. 읽는 일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읽는다.

작년에 읽은 러브레플리카와 오늘까지 읽은 이 소설 사이에는 십 년 가량의 간극이 있다. 삼십대 초반에서 사십대 초반까지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은 작가의 문장은 날카롭게 갈리고 빛을 발하게 되었다. 온통 어둡고 외롭고 비관적인 속에서 막연하게 기대하던 것들이 제법 자신있게, 조금은 더 희망을 믿으며 자라났다. 물론 지금보다는 거친 십여년 전 이야기들도 집요하고 섬뜩하고 몽상적으로 풀어낸 재주가 보였다. 그 사이 또 어떻게 진화했을까 다음 소설집이 궁금하다.

-검은 불가사리-어려서 쓴 시, 소포로 받은 상자 속, 꿈 속 해변에서 반복되어 등장하고 화자의 눈에 박혀 모두가 외면하고 소중한 이들을 해친 불가사리. 짐작이 되는 은유이다. 불가사리와 작은 병사들의 전투도. 검은 별모양 눈동자의 시각 이미지가 강렬했다. Protect me from what I want.
-셋을 위한 왈츠-그림쟁이 삼남매의 비극의 삼각형, 삼박자의 왈츠. 셋 사이의 긴장이 잘 와닿지는 않았다. 둘도 어려운데 셋은 내게는 너무너무너무 어렵다.
-피의 일요일-와우를 한 번도 안해봐서 구체적인 이미지는 상상이 안 되지만, 게임 속 캐릭터가 바깥 조종자들에게 대항한다는 설정은 흥미로웠다.
-절규-뭉크의 그림으로 겹쳐지는 모습은 다소 식상하지만, 소리지르는 여자와 상처입히는 남자(소리지르게 하는 여자)의 감정선(레즈비언 서사?), 절규 대행이라는 이색 돈벌이 소재는 비현실적이지만 재미있었다. 퀴어 서사는 잘 영글어 나중의 루카에서 제대로 포텐이 터지지.
-DJ론리니스-디제잉을 잘 모르는 내게도 나름 비유들이 와닿았다. 이 소설은 악기들의 도서관 사이에 살짝 껴놓고 김중혁이 쓴 거라고 우겨도 나는 아마 깜짝 속았을 것 같다. 그녀 안에 작게 하반신만 잠긴 채 숨어 있던 존재는 뭔가. 좀 생경한데 또 뻔하다. 굿바이가 조금 더 세련되어진 모습 같다.
-말들이 내게로 걸어왔다-말과 말. 유치할 수 있는 말장난인데 유치하지 않았다. 쌍둥이의 질투. 언어를 지배하는 자와 그러지 못해 시기하는 자. 남의 말을 없앨 수는 있어도 빼앗아 올 수는 없잖아. 그러니 부러워할지언정 미워하진 말자. 추해.
-안개의 섬-자신이 예쁘지 않은 걸 알고,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임 개발자 이야기. 안개섬의 나무와의 대화는 너무 예측 가능해서 김새는데. 직장에서 잘 나가고 어린 남편 있고 뭐가 불만이냐! 육체와 정신 운운하는 건 약간 상투적이지만 공감되는 부분도 없진 않았다. 내가 그래서 거울을 안 봐. ㅋㅋㅋ
-판도라의 여름-비밀을 통제하려는 강박. 그 불행에 대해 잘 그렸다. 작가는 SF소설을 쓸때도 감각이 돋보이는데, 과학과 공상에 방점을 찍는 게 아니라 인간과 관계에 대해 고민한 지점을 잘 풀어내서 그런 것 같다.

바람이 아직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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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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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박상영
저녁을 먹다 아홉 살 딸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좋아할 수 있어? 어떻게 하면 자신감을 얻을까? 애한테 왜 그런 걸 물었나 몰라.
딸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우선, 좋은 취미를 가지는 거야. 그걸 해.
그리고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
안 될 거 같아도 뭐든 일단 해 보고.
확신에 찬 말투로 눈을 빛내며 똑부러지게 말했다.
오 나의 현자야. 지혜와 살아온 기간은 비례하지 않는구나.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지 아이는 자신감이 넘치고 대체로 행복해 보인다.
나도 그렇게 한 번 살아봐야겠네.

박상영의 두번째 소설집을 읽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말 웃기게 쓰는 재주가 있는 작가였다.
작가도, 재희도, 수많은 영이도, 규호도 모두 덜 불행하고 아프지 않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불행해야 글이 나오고 그걸 읽어야 나도 재미있지만 두 권 즐겁게 해줬으면 만족할게. 이제 좀 행복해지렴. 그 방법은 위에 나와 있습니다. 나도 아직 못해봤지만.

재희-게이친구에 대한 여성들의 판타지를 공고하게 공구리치는 또 하나의 컨텐츠랄까. 성별 성적지향 상관없이 저런 무람한 우정을 나눈 이들이 부럽다. 팩을 나눠 붙이고 서로를 위해 냉동 블루베리와 냉동 담배를 채워주며 자신의 연애 상대에 대해 밤늦도록 떠들 수 있다니. 늘 서로의 편이 되어주면서. 아니 세상에 그런 관계가 있긴 한 거야?
마이크만 잡으면 빵 터지는 케이팝 매니아. 이번 소설도 또 나왔다. 왜 훌러간 신나는 가요를 매번 눈물 흘리면서 웃기게 만드는 거지. 세 번 써 먹었으니 다음에 또 써 먹으면 레드 카드입니다. 그땐 진짜 안 웃을 거야.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젊은 작가상 책에서 봤지롱. 조금 있다 마저 한 번 더 봐야겠다.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두 편의 연작소설인데 거의 한 편처럼 읽힌다. 규호란 연인과의 시작과 끝 흥망성쇄 에필로그까지. 매번 걸림돌이 되는 카일리의 존재. 헤어진 뒤에야 그 사람이 정말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아는 일. 약간 중2병 돋는 일기장 같은 감정 표현이 넘치는데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고 그게 뭐라고 부럽네.
인생을 몇 개의 글로 투척하는 이들을 보는 건 참 조마조마하다. 짧은 시간 만에 작가랑 엄청 친해진 거 같은 기분인데 다 털어 놓고 나면 다음엔 뭐 쓸 거야? 나야 재미있는데 넌 괜찮아?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털털 털며 아항, 글이 되려고 이렇게 거지같은 일이 한가득이었구나, 책 잘 팔려서 개꿀 이제부턴 하하호호 이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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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8-19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야 재밌는 데 넌 괜찮아? ㅋㅋ 너무 동감되요 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8-19 18:50   좋아요 1 | URL
쟝쟝님은 괜찮아요? ㅋㅋ박상영을 향한 진실한 팬심이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공쟝쟝 2019-08-19 18:51   좋아요 1 | URL
저 진짜 너무 팬이예요 ㅠㅠㅠ 계속 써줬으면.. 그가 계속 불행했으면..(뭐????!) 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8-19 18:54   좋아요 1 | URL
작가가 불행할수록 재미가 비례하는 현실...잔인하고 모진 독자들ㅋㅋㅋ

공쟝쟝 2019-08-19 18:59   좋아요 1 | URL
다른 작가들은 모르겠는 데.. ‘영’이는 너무 상영이자낰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이 소설을 기점으로 우리 영이는 엄청 뜰테고 그럼 행복할거고 그럼 내 인생은 시궁창이니까 내 인생이랑은 멀어질거고...

반유행열반인 2019-08-19 19:01   좋아요 1 | URL
그래요. 이미 떠서 핵오브핵인싸 암흑의 핵심 코어의 코어로...멀어지라 그래...제일 헛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랑 인기 작가 걱정...나나 잘하쟈...하아...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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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장강명
작년 이맘쯤 장강명에게 꽂혀서 전작을 다 읽어버렸다. 재미있었다. 지금은 좀 식었지만 신작이 나와 읽어보았다. 알라딘의 20주년 선물로.
읽다보니 오락가락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과연...소설일까? 신문 기획 연재물 같기도 하고 소위 말하는 문학성도 떨어지고. 한편으로는 난쏘공 같은 걸 하고 싶었나? 그런데 그건 예쁘고 환상적인데. 여긴 그런게 없어. 그러다가 또 주의깊게 읽게 되고. 다 읽고나서도 모르겠다. 이런 글이 필요하긴 하다. 다만 조금 더 세련되면 좋겠다. 메시지를 담으면 왜 촌스러워지기 쉬운지 모르겠다. 어렵다.

-알바생 자르기-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읽은 걸 다시 보았다. 나는 같이 일하는 보조 비정규 인력에게 일 안 시키고 내가 다해. 그걸 나름 자랑인 줄 알았다. 나는 혜미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은영이었는지도 모른다.

-대기발령-어쩌면 해고보다 더 잔인하다. 우리가 앉은 자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식이면 안 된다. 알면서도 아직 우리 차례가 아니라고 쉽게 눈을 감는다.

-공장 밖에서-구성은 어정쩡했지만 산 자인 해고를 면한 사람들과 죽은 자인 해고자의 대립, 자본가가 아닌 같은 노동자끼리 대립하는 잔혹한 장면을 접하는 건 신선하고 불편하고 슬펐다.

-현수동 빵집 삼국지-제목은 솔직히 모르겠다. 삼국지 붙이기에 어울리진 않는다. 프랜차이즈의 허울과 자영업자의 고충을 그린 점은 좋았다. 치킨 버전이었으면 더 핫했을 것 같다. 진짜 전쟁이지.

-사람 사는 집-그나마 제일 소설 느낌나는 소설이었다.영화 귀여워도 그랬고 난쏘공도 그랬고 철거촌은 늘 디스토피아, 종말 세계처럼(나쁜 의미로) 환상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카메라 테스트-이게 더 전쟁 같았다. 단 한 자리를 위해 모여든. 단 한 순간으로 모든 게 무너지는. 공채에 대한 회의를 보였던 작가의 르포가 이 소설에 압축적으로 녹아든 느낌이었다. 연예인이나 배우 오디션 같은 소재로 해도 마찬가지였을 듯.

-대외 활동의 신-이것도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었다. 사실 재미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다. 취업 시장에서 뭐라도 내세우기 위해 허울 좋은 대외 활동에 자본가들에게 노동을 착취당하고 그렇게 길들여지다 운이 좋아야 대기업 정규직이 되어 안도할 수 있는 청춘이란. 토익을 잠깐 준비했지만 응시한 적은 없다. 대외 활동이니 공모전이니 안 해봤다. 스펙도 없이 직업 세계에 안착한 건 운좋은 일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만일 이런 세상에서 다시 취업을 하라면 과연 날 받아줄 자리가 있긴 할까.

-모두, 친절하다-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서비스 노동의 세계.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 돌아보는 건 의의가 있지만 하루 안에 우겨 넣은 모습이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음악의 가격-디지털 음원을 내고 딱 한 번 정산을 받았다. 만원 안팎. 데이터 없는 요금제를 쓰다보니 스트리밍보다는 다운로드 구매를 하고 최애밴드들은 아직도 시디를 구매한다. 그래서 뭐. 음악이 아니더라도 나는 수많은 재화와 용역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화자의 마지막 넋두리처럼 스트리밍의 시대에 모든 서비스가 원격 제공되는 소위 4차산업혁명 사회가 되면 모든 것들이 공평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 (애초에 그땐 우리의 필요 자체가 남아있을까. )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초반부 읽자마자 웃었다. 하하. 이거. 내 얘기. 장강명이 먼저 써버렸다. 공통점: 고3, 좆같은 급식, 개선 요구 운동, 투서, 차이점: 난 단독범행(?), 익명 투서, 그래서 안 잡힘, 우리 학교는 공립이고 교장은 이 소설 재단처럼 멍청하게 확산시키는 인물이 아니었다. 교활했다. 바로 입단속을 위해 그래그래 다 들어줄게 캄다운 전략을 취했고...이 소설처럼 달라진 것 없이 내가 졸업할 때까지 급식은 개쓰레기처럼 맛없었다. 나중에 주변 몇 아이들에게 내가 범인이라 밝히자 반응은 ‘대학 못 가면 어쩌려고’였다. 입시는 옳고 그름과 상관 없이 한국 고교생에게는 절대 가치이고 아이들이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 굴복하고 예속되게 만드는 족쇄같다. 좆쇄.

친구 카페에 투서 날 남겨둔 글(유인물 원문 포함)이 있어 퍼왔다.
2002년 4월 18일(여고생아. 넌 그로부터 16년 후 이 날 둘째를 낳는단다. 알고 있니. 미래의 너로부터. )
2002.04.18.
교장 선생님께- 급식 개선을 부탁드리며 
안녕하세요. 저희는 학교를 사랑하고 선생님들을 존경하는 학생들입니다. 각설하고, 저희가 교장 선생님께 이 글을 올리는 것은 급식의 개선을 부탁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학생들의 불평과 건의가 있어왔지만 달라지는 게 없는 걸 보면 교장 선생님께서 잘 모르셔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교장 선생님께 직접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희 학생들은 한 끼당 중식 2100원 석식 3000원씩을 내고 하루 대부분의 끼니를 '(주)아벨라고메'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아벨라고메'가 제공하는 음식은 자주 학생들의 지탄을 살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어 중식 반찬에 콩나물, 떡볶이, 깍두기, 무국이 나왔습니다. 단백질은 찾아볼 수 없는 식단이며 떡볶이는 절대 반찬이 아닌 '분식'입니다. 무국에는 고기 한 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중식 반찬 중 쥐포가 나왔었는데 심히 비리고 역한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하고 대부분 버려졌습니다. 석식에서도 반찬이 차지할 넓은 자리에 제리포나 과일조각이 담겨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반찬을 다 갖추고서 그런 것이 나온다면 모를까요. 이 한 면에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한 예들이 있지만...대부분 이런 식으로 부실한 반찬들이 제공되고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주 드뭅니다. 급식 개선건의는 하루 이틀, 몇 주 몇 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몇 년에 걸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설문조사 같은 걸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이쯤 되었다면 업체 자체에 개선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업체 퇴출 및 새 업체 선정도 고려해봤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급식업체의 메뉴와 서비스, 위생상태를 볼 때 도저히 우리가 요구받는 가격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집에서 부모님께서 싸 주시는 도시락을 먹는 게 제일 바람직하다는 것은 알지만 0교시를 위해 일찍 등교해야 하는 저희로써는 새벽같이 도시락 두 개씩을 싸는 어머니의 수고를 참을 수 없어 부득이하게 급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밖의 음식을 집의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최소한 불평 없이 먹을 수준은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잔밥이 많이 나오는 것은 저희가 배가 불러서 그렇겠습니까? 먹을 수 없어서, 맛이 없어서 남기게 됩니다. 한창 자라날 나이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으며 학업에 전념 할 저희의 건강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건강을 지켜나가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정도 저희의 상황을 호소했으니 교장 선생님께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문제 해결에 힘써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급식의 개선이 되었든 새 업체 선정이 되었든 저희 학생들이 만족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저희는 교장 선생님께서 업체와 결탁했다는 둥의 개소리는 믿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께서 그러실 리가 절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급식에는 별 문제가 없다' 는 판단이 서실 경우, 
2주만 저희와 함께 점심을 드시길 간청합니다. 
저희는 한 달간 개선여부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때도 지금 상황에서 별로 나아진 게 없다고 판단될 시에는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학교 내부적 방법이든 외부적 방법이든 폭력적이든 비폭력적이든- 지금보다는 더 과격한 방법이 동원되리라고 기대하시면 됩니다. 협박이 아니라 저희의 건강을 지키고 꼬박꼬박 내는 급식비에 합당한 음식과 서비스를 받고자하는 저희의 몸부림입니다. 
다시 한 번 급식 개선에 힘써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퇴임 전까지 건강하시고 무사하시길 빕니다. -분당 청년 폭도 연맹단 올림. 

일찍 끝난날 워드작성. A4용지에 20장 출력.(소규모;) 
새벽 5시 55분에 집을 나왔다. 빌어 먹을, 버스가 6시 15분에 왔다. 
6시 50분쯤 학교에 도착. 정문에 들어서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게시판에 유인물 부착. 다시 중앙 현관에 유인물 부착. 
학교에 들어서 교장실 문앞에 유인물 부착.(옆에 행정실에 수위 아저씨 
한테 걸릴까봐 열라 조마조마.) 올라가는 계단마다 몇장씩 흩뿌리고 
벽에도 부착. 2학년 교무실, 3학년 교무실 문에 부착. 급식 엘레베이터 
등등에 부착. 
아이들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다들 2학년쪽을 의심. 
어떤애들은 아침에 오다가 남자애들 여렇이 몰려 가는걸 봤다고 함; 
곧 선생님들 임시 직원회의 소집, 각 학년 학년회장, 반장들, 학생회 임원 소집. 
교장 왈: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해주겠다. 
오늘 급식 변경에 관한 안내문 나옴. 
정말 고치는지 어쩌는지는 더 두고봐야겠지만... 
용기없는 공부만 하는 교우들의 가슴에 불을 당긴 것만으로도 
흡족. 소극적이고 순종하는 태도에 다소 실망. 

00(친구 이름), 우린 세상을 바꿀수 있겠지?

졸업식날 00대상이라고, 학교 이름딴 상을 문돌이 대표로 받았다. 학교 최고상이라고 허울은 좋지만 의대 간 애들한테 외부에서 온 좋은 상 다 뿌리고 내신 좋았던 찌그래기에게 털어주는 거였다. 그 때 상을 건네는 교장에게 ‘급식 자보 기억 나세요?누가 했게요?’하고 말을 건넸다면 느와르 영화 같고 폼났겠지만 그땐 순진해서 그런 생각 못했고 이전 교장놈은 1학기 마치고 퇴임해서 다른 할배에게 받았다.

나는 좆같은 급식만 먹다 졸업했지만 다음해 급식 위탁업체가 바뀌고 그 다음해엔 직영급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바꾸었냐 하면 개뿔 나만 바뀌었다. 가끔 송곳인 척 철없이 어른들 들이받다 개까이고 얌전히 있던 다른 어른들이 총알받이 되어 탈탈 털린 내게 뒤늦게 다가와 우리가 미안해…이지랄하는 꼴을 보면서 나는 점점 말이 적어지고 결국엔 어떻게 하면 눈에 안 띄고 처박힐 수 있을까 하며 대가리만 눈 속에 처박은 꿩새끼가 되고 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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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24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분당 청년 폭도 연맹단의 단주이자, 유일한 단원이신 열반인님을 뵙습니다.
저 필력 보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린 널 의심할 뿐이라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저 포석도 좀 보소....

제가 보기에, 고3 때 기준, 열반인님의 필력은 syo같은 허접한 족속을 씹어돌리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7-24 22:05   좋아요 0 | URL
급식이를 맛 없는 급식으로 건드리면 나오는 포효 같은 거죠...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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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3 다니엘 글라타우어

연애소설을 즐겨보는 편은 아닌데 설정 자체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34세, 혼인 생활 8년, 딸 하나 아들 하나, 누군가의 이메일을 기다린다.
뭐 안 비슷한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에미는 아름답고 자신감이 넘친다.
레오는 최선의 끝맺음에 관해 깊이 고민한 듯하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곤경에 처한 인물들이 자신은 누군가 만든 이야기 속 배역일 뿐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섬뜩한 순간을 생각보다 자주 보았다. 클리셰로 살지 않는 길. 이미 있는 이야기와 겹치지 않는 독창적인 방향 찾기. 망했다. 일곱 번째 파도는 당분간 읽지 않겠다. 나는 아홉 번째 파도(최은미)도 이미 봤거든?(...응?) 개체의 삶은 이리도 진부한 것이냐. 손끝 발끝 머리끝으로 퍼져나가는 화학물질의 작용은 그대로 즐기며 머리로는 응, 이야기네. 달달한 이야기야. 가끔 이런 걸 읽으며 정서 순화도 해줘야지.
그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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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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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2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1928년생. 밀란쿤데라보다 한 살 누나인 우리 외할머니.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면 하번천리에 혼자 밥해먹고 사신다. 자식이 일곱이면 뭐해. 구십 넘은 노모 모시려드는 이 하나 없는 걸. 그래도 근처 사는 외삼촌들 돌아가며 수시로 들르고 서울 사는 우리 엄마는 가끔 다녀온다.
엄마가 뵈러 가면 할머니는 일정 때, 전쟁 때 겪은 일을 밤이 깊도록 이야기한다. 나도 가 뵌지 오래됐지만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 풀어 놓던 게 생각난다. 우라질- 거리며 고생한 일들 서러운 날들 이야기하는 할머니는 듣는 사람 귀기울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시골에 다녀온 엄마는 불쌍해. 나 곧 죽을 거 같아 라고 하셔. 하며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한테 다시 전한다.
전쟁통에 미군 놈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여자들은 홍역 앓아 누운 애들도 다 내팽개치고 뒷산 방공호로 숨었대. 그놈들이 그렇게 여자들을 건드리고 다녀서…
그 얘기 좀 그만할 수 없어!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이 얘긴 안 했었는데.
했어! 열 번도 넘게 했어. 뭐 좋은 얘기라고 자꾸해.
천하의 개썅불효녀인 나는 그렇게 엄마의 입을 막았었다. 그거 들어주는게 뭐 힘들다고. 사실 조금 힘들긴 한데 그걸 못참고.
총알이 빗발치는 길을 건너고 나면 나잘나잘 걸레짝이 된 아기 업은 포대기, 일가족이 숨은 방공호에 포탄이 떨어져 다들 숯처럼 까맣게 타버린 걸 보고도 덤덤했다는 이야기, 미국 흑인 병사에게 강간을 당하고 미쳐버린 여자, 미숫가루 꾸러미 같은 걸 하나씩 들고 남하한 중공군 소년병사들은 오히려 착했어, 민간인들 해치지도 않고 농가의 소라도 잡으면 소값으로 인민화폐 같은 거라도 쥐어주고 가고 또 그것때문에 나중에 큰일 칠까 무서워서 숨겨놓고…
내 어머니 이야기 보면 작가는 자기 엄마가 들려주는 할머니 이야기 듣고 만화 그려서 세상에 없어지면 안 되는 책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잖아? 그런데도 내 엄마를 통해 듣는 할머니 목소리를 외면해 버린 나는 잔인하고 멍청한 놈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 어떤 내용일까 내내 궁금했는데 결국 펼쳐 보게 되었다. 읽기 시작하면서 멍청하고 잔인한 나는 ‘아, 왜 재미난 책 잔뜩 사놓고 이런 걸…’ 하고 있었다. 자주 책을 덮었다. 여태까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많은 죽음의 순간을 담지 않았을까 싶다.
벨라루스 출신인 작가는 소련군 또는 빨치산 부대에 속해 싸우거나 그들의 전쟁을 지원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았다. 아주 가끔 작가의 탄식에 가까운 나레이션이 나오고, 책의 대부분은 인터뷰를 통해 수집한 참전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보고 겪은 전쟁이 날 것 그대로 담겨있다.
소련이라는 조국을 믿고, 공산주의를 믿고, 그 땅을 목숨바쳐 지켜야 한다는 마음, 사랑하는 이들을 죽인 파시스트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은 전쟁터로 나갔다.
나의 죽음, 내 소중한 이의 죽음, 같은 편 군인과 적군과 민간인의 죽음, 말과 닭과 개의 죽음, 숲과 마을과 집의 죽음, 피와 상처, 시신, 불타고 남은 게 거의 없는 폐허, 그들이 보고 겪은 시간과 공간이 그야말로 종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와중에도 수를 놓고, 폐허 속에 구두를 사고, 예쁜 다리가 다치거나 진흙탕에 추한 시체로 엎어져 죽을 것을 두려워하고, 전우와 부상병과 사랑에 빠지고, 증오하던 독일군에게조차 빵을 건네고. 인간성과 여성성을 잃지 않고 많은 것을 기억하여 목소리로 전해준 그들의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아름다웠다. 남의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아름다웠다는 한마디로 줄여버리는게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그 이상으로 표현할 능력이 내게 없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이겼다. 겉으로는 승리했지만 전쟁 이후 참전 여성들은 오랜 시간 고통 받았다. 전쟁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그들을 남성 군인들과 문란하게 놀아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포로가 되느니 자살하라는 스탈린의 명령 때문에 포로로 잡혔다 살아 나온 사람들은 반역자로 몰려 전쟁 이후 긴 시간 수용소 생활을 했다. 모두가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에 침묵했다. 참전 남성이 겪은 고통도 있겠지만 여성이 겪은 고통은 이중삼중으로 심했다. 몸과 마음이 병들고 가족을 잃고 혼인상대가 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아픈 아이를 낳자 전쟁터에 나가 사람 죽인 비정상인 여자가 정상인 아이를 낳을 수 있겠냐는 폭언까지 듣는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잔인해지는 것일까. 전쟁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왜 더 큰 고통을 겪은 여성들에게 쏟아 놓았을까.
다른 이의 지난 시간에 귀기울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수많은 죽음과 파괴와 나는 쟤네는 인간이 맞는 걸까 그런데 왜 이럴까 싶은 일들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녹록치는 않은 일 같다.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마음은 어떻겠어. 그들을 찾아간 작가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기뻐했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린다는 것에 고마워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말하려는 사람의 입을 막지 않기.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기. 내 말 한 마디 하기 전에 남의 말을 두 마디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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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스코이 운하를 따라 해군모자들이 둥둥 떠내려오더군. 열을 지어 줄줄이. 크고 새빨간 피얼룩들과 모자들이 한데 엉겨 물결 속에서 일렁이는데…… 나뭇조각 같은 것들도 떠내려오고…… 그건 우리 병사들이 네바 강 어딘가에 버려졌다는 의미였지…… 꽤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는데, 그동안 모자들이 계속 떠내려왔어, 끝도 없이. 처음에 모자 수를 세어보다가 그만뒀어. 그 자리를 떠날 수도 그렇다고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없었지. 모르스코이 운하가 우리 전우들의 무덤이 된 거야……

들판을 따라 걷는데, 세상에, 들에 곡식이 얼마나 탐스럽게 여물었던지! 우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밀이 발에 밟힐 정도였으니까요. 그해는 전에 없이 농사가 잘돼서 호밀이 높게 높게 죽죽 뻗어 있었어요. 풀잎은 푸르고 태양은 밝게 빛났죠. 하지만 천지에 시신들이 버려져 있고 사방이 피였어요…… 살육당한 사람들과 동물들. 나무들은 시커멓게 타버리고…… 기차역들은 다 부서지고…… 검게 그을린 기차칸마다 까맣게 타버린 주검들이 걸려 있었죠…… 

전쟁터에서도 빨래를 하고, 죽을 끓이고, 빵을 굽고, 부엌 식기들을 씻고, 말을 돌보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관을 짜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군화에 밑창을 대고, 담배를 들여온다. 어쩌면 오히려 전쟁터에 더 많은 일상의 삶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찮고 사소한 일들 역시.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 거예요. 그렇죠? 전쟁터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다면 말이에요.” 위생병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미슈티나는 이렇게 회상한다. 군대가 앞서가면 ‘제2전선’이 그 뒤를 쫓아갔다. 세탁부, 요리사, 기계수리공, 우체부……

풀밭에 아냐 카부로바가 누워 있었어…… 아냐는 우리 통신병이었어. 심장에 총을 맞고 죽어가고 있었지. 그런데 마침 그때 우리 머리 위로 학떼가 ‘V’자 모양을 그리며 날아가는 거야. 모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지. 아냐도 눈을 떴어. 하늘을 보며 그러더라고. ‘얘들아, 정말 아쉽구나.’ 그리고 잠깐 말이 없다가 우리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 정말 죽는 거야?’라고 물었어. 바로 그 순간 저만치서 우리 우체부, 클라바가 달려오며 소리치는 거야.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집에서 편지가 왔단 말이야……’ 아냐는 눈을 감지 않았어. 기다렸지……

—‘남자 머리’처럼 이발해.
  —하지만 아가씨인데요.
  —아니지. 아가씨가 아니라 군인이지. 아가씨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하면 돼.

나는 전쟁 내내 다리를 다칠까봐 겁이 났어. 나는 다리가 예뻤거든. 남자들이야 다리가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겠어? 남자들은 설사 다리를 잃는다 해도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니었지.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냄새도 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모르겠어, 왜 화요일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또렷한지. 화요일…… 며칠이었는지, 몇 월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분명 화요일이었어. 우연히 창밖을 봤어. 세상에, 우리집 맞은편 벤치에 소년과 소녀가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끔찍한 살육과 총살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아이들이 키스를 하고 있더라니까. 나는 그 평화로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어……
소년과 소녀가 잠깐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내 고꾸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어. 둘은 함께 쓰러졌어.
그렇게 그 일이 있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다시 하루가 지나는데…… 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야. 알아야만 했어. 그 아이들은 왜 집이 아닌 거리에서 입을 맞췄을까? 왜? 그런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걸까…… 아이들은 언젠간 게토에서 죽을 운명이란 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다른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거고. 그건 사랑이었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어…… 사랑밖엔.

전쟁이 무슨 색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어. 전쟁은 대지의 색이라고. 우리 공병대에게는…… 까맣고 노랗고 황토 빛깔인 흙의 색이라고......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 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남편이 우리 모녀를 보더니…… 잠깐 있다 가버렸어. ‘정상인 여자라면 과연 전쟁터에 나갈 수 있을까? 총 쏘기를 배우고? 그래서 당신이 정상아를 낳을 수 없는 거다’라고 나를 비난하며 가버렸지. 나는 남편을 위해서도 기도해……

나는 그저 눈물만 흘려, 말은 못하고…… 나 스스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확신이 안 서는 걸 어떡해? 믿게 할 자신이 없는 걸…… 사람들은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지. 고통스러운 이야기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어느 마을에 갔다가 한 노인의 장례식을 봤어. 노인은 밤에 목숨을 잃었어. 밭에 씨를 뿌리다가 죽임을 당한 거야. 그런데 별짓을 다해도 노인의 손가락이 펴지질 않는 거야. 씨앗을 어찌나 꼭 쥐고 있던지. 할 수 없이 씨앗을 손에 쥔 채로 땅에 묻었지……

잠시 후 어머니가 고개를 들더니 당신 아들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는 걸 아셨어.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죽어 누워 있는 것을 보신 거지.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그 죽은 병사들을 위해 또 서럽게 우시는 거야. 자기 아들도 아닌 그 젊은이들을 위해서 말이야. ‘아이고, 내 새끼들! 너희 어머니들은 너희들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땅에 묻히는 것도 모르는데! 아이고, 땅속이 얼마나 춥고 차가운데. 이런 엄동설한에 이게 무슨 일일꼬. 내가 너희 어머니들을 대신해서 울어주마. 너희 전부를 가엾게 여겨주마. 내 새끼들아…… 불쌍한 내 새끼들아……’

우리가 독일 땅을 처음 밟은 날, 대위 한 명이 죽었어. 우리가 알기로는, 가족이 아무도 없는 사람이었지. 독일군 점령 치하에서 온 가족이 목숨을 잃었거든. 대위는 아주 용맹했어.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대위는 자기가 먼저 죽을 걸 걱정했어. 놈들 땅에 들어가 놈들의 불행과 고통을 보기도 전에 죽을까봐. 놈들이 울부짖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보기도 전에…… 폐허가 되어 돌덩이만 남은 놈들의 집터를 보기도 전에…… 대위는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었어.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죽었다니까. 독일 땅을 밟고 그 땅을 보고는 그대로 세상을 뜬 거야.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대위를 떠올려. ‘그 대위는 왜 죽었을까?’”

어느 날 누가 우리집에 장난감 전투기와 플라스틱 총을 가져왔더라고.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지. 그 자리에서 바로!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은 선물이거든…… 위대한 선물! 생명은 우리 인간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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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22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묵직- 하군요. 하긴, 이런 아픈 책을 읽고 있으면 몸도 마음도 무겁고 글쓰기도 힘들고 그런 법이지요. 저도 얼른 이 책을 읽어야 할텐데, 요즘은 아프게 하는 책은 무의식이 기피하는 중인 것도 같고..... 가볍고 할랑할랑한 책들만 자꾸 읽습니다.

똑바로 살아야지.

반유행열반인 2019-07-22 16:53   좋아요 0 | URL
가볍고 할랑할랑한 거 많이 읽고 행복하게 사셔요. 저도 추천도서 할랑할랑한 거 읽고 있습니다. (네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