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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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어느 아침. 일어나보니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 곧 전화벨이 울리고 엄마는 아빠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밥 잘 챙겨먹고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누워 있던 아빠는 엄마가 방에 들어가자 몸을 일으키며 구역질을 시작했고, 엄마는 옆의 쓰레기통을 잽싸게 가져다 대 이불을 구했고, 토사물에서 처음 맡는 쌔한 냄새가 올라왔고, 구토를 마친 아빠는 기절했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오래 의식을 잃다 깨어나서는 약을 먹었다고 했고, 그제서야 위세척을 했다는 건 내가 성인이 된 후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두꺼운 캡슐제 안에 청산가리를 채우고 삼켰는데, 할아버지 말로는 천운으로, 삼키자마자 녹거나 터지기 직전에 다시 몸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엄마가 쓰레기통을 한참 살폈지만 밖에 나온 위액과 섞여 녹은 건지 흔적조차 없었다고 했다. 음독 후유증은 없었지만 심해진 우울증 때문에 아빠는 정신과로 전원해서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3초만, 3초만 지체할 것을. 이후 십 몇 년 더 가정폭력과 주사에 시달린 엄마는 서러움과 울분이 폭발한 어느 날 그런 말을 입밖에 내기도 했다. 귀금속 세공사인 아빠는 우울증과 자살시도 이력에도 불구하고 쉽게 온갖 화공 약품과 날카로운 연장들과 화력 좋은 버너 토치램프 같은 걸 구해 쟁일 수 있었다. 집집마다 염산이나 황산이나 청산가리 같은 건 간장 소금 후추처럼 갖추는 거 아니었어? 유년기는 그렇게 불안을 넘어 위험과 공포가 일상이었다.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의 시험 통과와 탈출극이 있어야 했다.

그런 덕인가, 전쟁과 학살과 패배 앞의 집단자살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시안화합물이 친숙하게 읽혔다. 전범의 삶의 말미와 도덕감 결여된 과학자의 불행한 개인사 같은 것에 몰입하게 만드는 과거사는 싫다. 화려한 장신구를 볼 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전에, 새빨갛고 새파란 보석을 연마하고 반짝거리는 금은의 광을 살리기 위한 약품 몇 방울이 동네 전체를 몰살할 만큼 유독하고, 연장들은 쉽게 살갗을 베거나 뚫고, 금을 무르게 하려면 유기체 쯤은 쉽사리 태워버릴 수 있는 온도까지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떠올리는 일은 진저리가 난다.

삶을 그때보다는, 그때 내 나이쯤이던 내 부모보다는 낫게 하겠답시고 뒤늦게 수학공부도 과학공부도 시작했다. 그렇지만 겨우 삼차함수 그래프의 미분과 비율 관계 앞에서 주저 앉아 엉엉 울며 생각했다. 나는 아인슈타인이나 슈바르츠실트가 끄적여 놓고 흐뭇해하거나 절망했던 방정식의 어느 한 줄에도 죽을 때까지 다가가지 못하겠구나. 양자 역학에 대한 교양서는 그저 비유로 가득찬 시집이나 신화집, 경전 같은 걸 읽듯 그저 어떤 느낌만 받거나 받지 못하고 이해나 깨달음의 영역에는 발가락 하나 디밀지 못하겠구나.

뭐 그래도, 숫자와 기호와 공식의 세계와 끝내 화해하지도 그곳에 접근하지도 못한다해도, 내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산문으로 어슴푸레한 윤곽이나마 구경시켜주는 책들이 있어 다행이다. 무슨 말인지 완전하게는 모르더라도 내내 빠져 읽을 수 있었던 라바투트의 소설이 그랬고, 평생을 바쳐 알아낸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저술된 과학책들이 또 그렇다. 그래서 언제 다 읽을지도 모르면서 다윈과 월리스와 칼 세이건과 제임스 글릭과 올리버 색스 등등 수많은 책들을 자꾸만 쟁인다. 이 책들 다 읽을 때까지는 독에 담근 사과든 캡슐이든 삼킬 생각은 말아야지. 매끈한 곡선과 수식들이 자꾸만 눈에서 머리에서 튕겨나가도 오래 붙잡고 아는 데까지,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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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11 23: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수능 그날까지
아프지 말귀😸
울지 말귀😹

반유행열반인 2022-08-16 21:32   좋아요 1 | URL
맨날 수학 풀다 울어요 ㅋㅋㅋscott님도 늘 건강하시길 감사합니다!!!!

파이버 2022-08-11 23: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제 수능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요사이 내내 흐린 하늘만 계속되지만 그래도 늘 건강하시고 힘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과학책, 수학책 이해도 못하면서 쟁인거 엄청 많습니다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2-08-16 21:32   좋아요 2 | URL
얼른 공부 마치고 쟁인 책들 하나하나 읽고 싶어요 ㅎㅎㅎㅎ 힘내라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파이버님 오늘 하늘은 맑아서 좋았어요 ㅎㅎㅎ

새파랑 2022-08-12 07: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아픈 기억이 있으시군요 ㅜㅜ
그래도 마지막까지 열공하셔서 만족하실만한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2-08-16 21:33   좋아요 2 | URL
아픈 기억보다도 청산가리 먹고도 안 죽은 사람이 있어! 하는 서프라이즈 나올 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너무 어둡게 썼나보네요 ㅋㅋㅋㅋ 올해 만족 못 하면 소인에게는 내년이 있사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2-08-12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덥고 습도도 높아요.
이 시기가 공부하는데 젤 힘이 들 것 같아요.
건강 잘 챙기시며 열공하시기 바래요^^
책 쟁이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가 될 것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2-08-16 21:34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그 사이 귀뚜라미도 울고 최고기온 앞자리도 삼이 안 넘게 되었어요. 그런 날이 오네요 ㅎㅎㅎ 저 올해는 근래 들어 정말 책 많이 안 산 해 될 거 같아요. 역시 사는 만큼 읽는 거 같습니다 ㅎㅎㅎ응원 감사합니다.

Yeagene 2022-08-12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거에요!
제 친구들이 그랬거든요.제가 지켜봐서 잘 압니다.
열반인님 마지막까지 힘내세요!♡

반유행열반인 2022-08-16 21:36   좋아요 2 | URL
예진님이 지켜보신 결과라면 분명 믿을 만 할 텐데!!!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늦더라도 안 멈추고 천천히 가 볼게요. (그런데 이과 머리는 따로 있는 게 맞나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수학 너무 힘들다ㅠㅠ) 예진님도 곰탱이도 남은 여름 덜 덥게 잘 지내시길!!!!

link123q34 2022-08-16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엉엉에서 뭔가 버튼이 콱 눌리네요. 안은 세상 멈춘듯 조용히 서늘하고 밖은 맴맴 무덥고. 저도 내적으로 엉엉 울다가 한번 눈물이 콱 터져서 에라 모르겠다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요. 이게 왜 안되나 황당하고 불쾌해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원래 다 그런 거라고 하면 그런줄은 아는데 그게 왜 나한테도 그런지 화를 내고. 조금만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들은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내 안까지 닿지 못하고 일정거리에서 프스스 흩어져버리기만 했었어요. 따뜻한 말들을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힘든 게 줄어들지 않지만 더 수월하게 그 시간을 넘어올 수 있었을 텐데 싶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엉엉 울고나니 속시원했고, 울었던 자리를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었어요. 눈물코 휴지로 팽팽 하고 뱉으면 되지~ 운동화끈 다시 꽉 매고 나서면 되지~ 결연하게 아이스커피타서 딱 앉으면 되지~ 밥 꼭꼭 씹어먹으면 되지~ 우선 이거 한 문제 풀어보지~ 하고. 나를 보듬고 응원하는 글로 가끔 소식 들을 수 있어서 행운으로 생각해요. 파이팅!!

반유행열반인 2022-08-16 21:38   좋아요 2 | URL
와 ㅋㅋㅋㅋ 링크님 저의 요즘이랑 앞에 몇 줄 싱크로율 딱 맞아요. 저는 엉엉 우는 데 까지는 같은데 시원해지지 않고 자꾸 울기만 해요 ㅋㅋㅋ링크님 만큼 조금 더 씩씩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냥 느리게 천천히 한 문제씩 하고 있습니다. (겨우 안 멈추는 수준에서요. ㅋㅋㅋ) 파이팅 감사합니다. 얼른 자격증 들고(?) 동종업자(?)되어 찾아뵙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scott 2022-09-14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열공 하시느라 하루에 몇시간도 못 주무실 것 같습니다.

두달 남은 시간동안 열!공
응원합니다!

٩(˘◊˘)۶

반유행열반인 2022-09-28 21:17   좋아요 1 | URL
scott님 늘 건강히 저 대신 좋은 책 많이 읽고 많이 쓰고 계셔요!!! 언젠간(?) 저도 다시 독후감을…한 권도 안 읽는 9월 곧 지나가겠네요 ㅠㅠ ㅋㅋㅋㅋ

라로 2022-09-28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빠의 해방일지> 읽다가 반열샘 생각났어요!! 물론 그 전에도 생각했지만 그 책 읽으며 더욱요. 공부 잘 되시나요?? 너무 열심히 하고 계시는 샘이 떠오릅니다. 열심히 하셔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멀리서 응원합니다!!!!!!!!!!!!!! 아자아자 ~~~~~!!!!!!!!!!!!

반유행열반인 2022-09-28 21:16   좋아요 0 | URL
라로님 응원 감사해요. 라로님 이룬대로 저도 열심히 따라가야 하는데 ㅋㅋ 길게 보고 꾸준히 가려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