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지음 / 양철북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102 이옥남.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 외롭고 슬프고 힘들면 쓴다. 지난 10월까지는 메모장에 남긴 일기가 제법 되는데 11월에는 한 번, 12월에는 두 번, 나는 이제 행복해졌나 보다. 1월1일에도 간만에 썼다.
‘삶에 대해 체념하고 덤덤해진 부분이 많다.’
그렇다고 한다.

어른들과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은 몰래 익힌 글 아는 티를 못 내다가, 다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이옥남 할머니는 도라지 까서 판 돈으로 글씨 연습할 공책 연필을 사서 1987년부터 30년 간 일기를 썼다. 그걸 계절별로 모으니 이 책이 되었다. 밭에서 일하고 자연을 둘러보고 마을 사람과 어울리고 자식 그리워하고 그런 마음을 썼는데 그것 자체로 시 같았다. 남 흉보는 것 싫어하고 삼척이나 대구 화재났을 때 맘이 아파서 성금이나 옷가지 같은 걸 보내는 심성 고운 할머니였다. 살아계시면 올해 백 살이실텐데 여전히 호미로 밭 매고 새 우는 소리에 겨울에 쟤들은 뭐 먹고 사나 하고 걱정하고 계시겠지.

일기만 줄창 쓰다 독후감 쓰기 시작한 뒤로는 독후감을 제일 많이 쓴다. 그것도 나름 일기 같은 것이긴 한데 부쩍 삶의 흔적을 덜 남기게 되었다. 남기면 기억이 되는데 적어두지 않으면 망각이 된다. 오랫동안 사소한 것들 잘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점점 잘 잊는 사람이 되고 있다. 행복하려면 그 편이 나은 것 같긴 하지만. 쓰는 일은 붙드는 일이고 경험과 감정을 붙드는 일을 게을리하면 점점 더 못 쓰게 될 것도 같다. 아직은 쓰는 불행과 쓰지 않는 행복 사이에 갈팡질팡한다. 아흔 일곱까지 살 생각은 없는데 일흔 몇 살까지 죽고 싶어도 참고 살다 죽는 게 소원인데 그때까지 읽고 쓰는 사람일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옥남 할머니는 참 대단하다.


+밑줄 긋기
-1988년 3월 18일
조용한 아침이고 보니 완전한 봄이구나.
산에는 얼룩 눈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데 들과 냇가에는
버들강아지가 봉실봉실 피어 있고 동백꽃도 몽오리를
바름바름 내밀며 밝은 햇살을 먼저 받으려고 재촉하네.
동쪽 하늘에는 밝은 해가 솟아오르고 내 마음은 일하기만 바쁘구나.
봄이 오니 제일 먼저 투둑새가 우는구나.
좀 더 늦어지며는 또 제비새끼가 저 공중으로 날아오겠지.
(꽃 몽오리를 바름바름 내민대ㅎㅎㅎ햇살 받으려고. 시골 봄 풍경 한 쪽에 샥 담으심ㅎㅎㅎ)

-1997년 3월 27일
눈이 오니 마음이 답답하구나.
바깥을 내다보면 더욱 심난한 마음 간절하기만 하네.
날씨가 개이면 밖에 나가 훨훨 다니기나 하지.
겨울 개구리처럼 돌 밑에 잠자듯이 가만히 누워있으니
너무 한가해 바보 같기도 하다.
사람이란 일을 해야지만 힘이 생기고 용기도 나게 매련이지
가만히 누워있으면 바보와 같지 뭐니.
사람은 춥다 웅크리고 방에만 누워 있다가 밖에 나가보니
뭐든지 이젠 봄이야.
(바보와 같지 뭐니. ㅎㅎㅎ아이고 새침한 봄 할머니)

-2016년 10월 5일
올해도 산에 도토리가 많이 떨어졌다.
날마다 도토리 까는 게 일이다. 망치로 깨서 깐다.
안 깨면 못 깐다. 반들반들해서.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ㅋㅋㅋㅋ혼자 에유 씨팔- 하다 웃는 거 왜 내 취향 저격인지...할머니 너무 귀여우심...ㅋㅋㅋㅋ)

-오늘 아침에는 마당에 나가 호미로 풀을 쪼는데 뻐꾸기가 울어서 딸한테 깨모를 부었냐고 물어보니 아직 안 부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뻐꾸기 울기 전에 깨모를 부어야 기름이 잘 난다고 했는데 이제는 날씨가 바뀌어서 뻐구기가 울고도 한참 더 있다가 깨모를 붓는다고 합니다. 콩도 전에는 소만에 심었는데 지금은 하지가 다 되어서 심고. 모든 것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벌써 나와 동갑은 먼저 가고 나 혼자 남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오래 사는 건지 걱정이 된답니다. 2018년 봄 서면 송천리 이옥남.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1-01-02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몽오리를 바름바름, 가만히 누워있으면 바보와 같지 뭐니, 뭐든지 이젠 봄이야, 에서 할머니가 나보다 문학적이다 긴장하다가.... 그간의 새침함 어쩌시고 “에유 씨팔”에 빵 터지는 ㅋㅋㅋㅋㅋ 취향저격 222

반유행열반인 2021-01-02 22:28   좋아요 1 | URL
저거랑 또 웃긴게 쌔빠또(?)라는 말 많은 사람이랑 시비거는 방오달이 라는 동네 사람 욕할 때는 얼마나 센 지 ㅋㅋㅋ감성 터지다 울화 터질 때 안타까우면서도 귀여워요. 역시 화가 많아야 쓰는 사람이지 ㅎㅎㅎ

아침에혹은저녁에☔ 2021-01-02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 한해도 무탈한 시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1-01-02 22:30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에혹은저녁에 님도 한해 건강하시고 좋은 글 계속 남겨주시길 빕니다. ㅎㅎㅎ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수이 2021-01-02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쓰기 좋아요. 좋고도 좋네. 체념은 왜 이렇게 많이 하누. 좀 자주 웃자 응?! 새해에도 그대 글쓰기 응원합니다. 힘내.

반유행열반인 2021-01-03 07:29   좋아요 0 | URL
수연님도 건강하고 힘내는 한 해 보내시길 빌어요!!! 체념 나름 좋은 쪽이에요 처지 비관 안 하고 될대로 되라 하는 ㅋㅋㅋ

러브북스 2021-01-03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책담을때, 구입할때, 어떤 책 리뷰궁금해서 찾아 읽을때마다 보이는 분이셨는데 댓글은 첨 남기네요. 너무 잘 읽고있습니다. 계속해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1-01-03 09:0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러브북스님 ㅋㅋ 제가 엄청 많이 읽고 쓰는 편은 아닌데 자주 출몰한 거 보니 러브북스님과 저의 취향이나 생애주기나 생계유형이 아주 유사한가 봅니다. (디딤돌 4학년 최상위 수학 저도 한 권 샀거든요 ㅋㅋㅋ) 댓글 남겨주셔서,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 한해도 즐거운 독서 많이 하시길 기원합니다!!!!

syo 2021-01-03 1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알라딘 서재에 일기 쓰는 남자 syo2021이옵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다 받아버리세요. ^ㅂ^

반유행열반인 2021-01-03 12:55   좋아요 0 | URL
새해 복 많이많이 받을게요. syo님도 알라딘 서재에 일기 많이많이 써주시고 복도 많이많이 다 받아버리시길 빕니다^3^

2021-01-06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6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6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22598 2021-01-07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외롭고 슬프고 힘들면 편지를 쓰더라고요....예전에는 그렇게나 많이 편지를 쓰고 이메일을 썼는데, 요즘에는 안 쓰는거 보면. 나름 괜찮아진 건지....

도토리까며 1818하는 할머니랑 저도 같이 욕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07 09:04   좋아요 0 | URL
저도 편지쓰기 좋아했어요 ㅎㅎ저도 요즘 안 쓰는 거 보면 괜찮아졌겠죠 ㅎㅎㅎ 같이 욕해주기 취미도 저랑 비슷하시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