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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9월
평점 :
-20201128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바퀴벌레와 단둘이 광막하고 메마른 방안에 갇혀.
아직 만으로 이십 살이 안 되었을 때, 꿈을 꾸었다. 거대한 각진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그 꼭대기를 조감했을 때, 위에는 인간 이라는 두 글자가 양각으로 굵게 새겨져 있었다. 단지 두 글자일 뿐인데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나는 울어버렸다.
오래된 꿈에 관해 쓸 수 있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 뒤 글로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생각나는 대로 적은 뒤에 그 어릴 때 쓴 글을 찾아보았다. 17년이 넘은 글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때 어느 카페에 그 글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서이다.
정확히는 만으로 열여덟, 우리 나이로 이십 살이 된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다. (게시물 작성일자가 말해준다.)
’잠을 자려고 어둠 속에서 자리에 누웠을 때 가상의 조각상이 눈 앞에 나타났다. 길고 높은 사각 돌기둥에 사람의 안면이 네 측면과 꼭대기면에 불규칙적으로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 맨 꼭대기 위에는 명조체로 크게 ‘인간‘ 이라고 써 있었다. 그 조각상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인간이라는 말은 너무 무거워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고 나를 눌렀다. 나는 그냥 울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
꿈이 아니었고, 자기 전에 빠진 망상 같은 것이었다. 양각인지 음각인지 알 수 없지만 명조체라고 한다. ㅋㅋㅋㅋㅋ 궁서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미 너무 진지하잖아...지금 쓰는 중인 이 글은 맑은고딕체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십 여일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G.H.에 따른 수난’에 갇혀 있었다. 이 한 권에만 붙잡힌 것은 아니고 여러 권을 같이 보고 있는데. 이 책은 내가 태어나기 딱 이십 년 전에 출간되었다. 우연히도 같이 읽는 중인 ‘거꾸로’는 딱 나 태어나기 백년 전의 책이었다. 두 책이 기묘하게 겹치는 느낌을 받다가 이내 갈라져버렸다. 두 책 모두 아름다움과 기괴함은 그 경계가 얄팍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여러분 리스펙토르의 첫 글자는 L입니다. 그래도 리스펙트하겠다면 말리지 않습니다요.
올해 가장 마지막으로 초고를 마친 소설에 거대한 바퀴벌레를 등장시켰다.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던 여자는 천장에서 기어올라오는 바퀴벌레를 보고 절망의 종지부를 찍는다. 아주 좆같은 공간의 좆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술 더떠 마음을 콩콩 찟는, 갈기갈기 찢는 말을 던진다. 최악으로 구질구질거리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럭저럭 목표는 이룬 것 같다.
그래서 이후에 읽은 이 소설에서 바퀴벌레가 등장하자 반가웠다. 동시에 싯팔 벌써 모든 사물은 불행은 감정은 절망은 지옥은 탐미는 그로테스크는 사십 년 전 백 몇 년 전에 다 쓰여버렸어, 하고 실망했다.
집에 혼자 있다. 가정부가 떠났다.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몰래 버렸다. 가정부가 쓰던 뒷방부터 집안 정리하기로 했다. 뒷방에서 나체 벽화와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바퀴벌레를 옷장 문짝 사이에 끼워 죽였다(한동안 죽지 않았다). 그러고나서 사막과 신과 죽음과 삶과 중립과 행복과 사랑과 지옥과 인간에 관해(그것 말고도 앞으로 내가 쓸 모든 것에 관해) 주절거린다.
대부분 알아먹지 못할 말들에 오래오래 붙잡혀 있었다. 흰 벽 위로 목탄 그림이 그려져있고 옷장 문 사이에 체액을 흘리며 꺾인 바퀴벌레가 있는 방에서 여자가 나가지 못하던 것처럼 나도 같이 그 방안에서 바퀴벌레의 내장을 핥고 있었다. 책 내내 그녀는 과거 회상 외에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다. 바퀴벌레와 눈을 마주친 걸 소통이라 할 수 없으니. 책의 서술은 온통 내면의 주절거림이고 자기와의 대화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가 죽은 뒤에 생판 모를 나라에서 이걸 읽을 나를 향한 말걸기이다. 글이라는 게 이렇게나 고약하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닿는데 나는 이미 죽어버린 그녀에게도 글 속의 그녀에게도 뭐라고 말을 걸 수가 없다. 어차피 그녀는 나라는 존재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을 걸려고 입을 벙긋거리면 그녀는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눈빛으로 닥쳐, 한 다음 담배 한 개피를 물고 멍하니 쳐다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퀴벌레를 넘어설 더 고약한 무언가를 삼키고 고약한 무엇이 된 다음,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 내가 들을 수 없을 누군가가 듣게 될 무엇인가를 끄적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나만 듣게 될 말들을.
-요약: 뭔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먹었다. 역자 후기에 배수아도 나도 뭔말인지 모르겠고 이 책이 번역이 필요한지 가능한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킹왕짱. 해놨는데,
그 말에 낚인다면 당신은 한 달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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