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리피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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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004-07-3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서점에서 복효근님의 시집을 골랐다. 주변분이 추천을 했었는데 게으름을 피우다가 이제서야 읽는다. 몇 주동안 시집을 읽지 안았던 탓도 있겠지만 다른 책들보다 먼저 손이 가고, 깊게 음미하게된다. 당분간 책읽는 풍경은 복효근 님의 시가 차지할 듯 싶다.

비로그인 2004-07-3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이건 뒤집기의 명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늘 곧고 의젓한 나무로만 불리어진 그 허구의 내면 뒤엔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가...꼭 우리네 모습을 보는 거 같쟎아요. 음..시 좋다..

잉크냄새 2004-07-30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효근님의 시는 참 의미있는 시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메시지 2004-07-30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감추어진 이면이 잘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잉크냄새님께서 적어주신 '아름다운 번뇌'도 참 좋게 읽었습니다. 복효근 시인이 남원에 살고 있어서인지 지리산과 절의 향기가 묻어나는 시들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