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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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레오 페루츠. 작가 소개를 보면 오스트리아 소설가인데 독일어권 문학의 거장이란다. 문득 짬뽕 문화권을 가진 루이스 세풀베다가 떠올랐는데, 이런 작가들의 세계관은 확실히 멀쩡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레오 페루츠가 추구하는 환상문학은, 추리 형식에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섞은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초중반까진 현실감 있게 흘러가다가 교묘히 현재와 환상의 경계를 흩트려서 길을 헤매게 만든다. 라틴문학을 싫어하는 나에게 이런 스타일은 정말 모 아니면 도라서, 설정이 과하다 싶으면 집중력 감소로 흥미가 뚝 떨어져 버린다. 전에 읽었던 <9시에서 9시 사이>는 적당한 설정값으로 재밌게 읽었던 반면, <심판의 날의 거장>은 솔직히 무리수였다고 본다. 1923년 작품이니 그땐 신선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글쎄다.


간단한 내용에 비해 이중삼중의 액자소설이라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유명한 궁정 배우가 총기 자살을 하고, 주인공 요슈 남작이 용의자로 지목된다. 현장에서 발견된 그의 파이프 담배가 증거였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배우의 아내와 과거 연인이었고, 배우가 자살할 만한 정보(거래은행의 파산)를 쥐고 있었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즉, 피해자의 아내를 흠모한 나머지 남편을 죽인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주인공은 해명하거나 반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한 엔지니어가 이 사건을 풀겠다며 탐정을 자처한다. 제법 흥미로운 전개였는데 딱 여기까지만 재미있었고, 이다음부터는 내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어서 그만 텐션이 죽어버렸다.


피해자는 죽기 전, 어느 해군 장교의 기묘한 자살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것만큼이나 배우의 죽음도 의문점 투성이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피해자의 후배이자 약국 직원인 여성의 죽음도 등장한다. 이렇듯 해석불가한 죽음이 연달아 발생하자, 그 여성이 언급했던 ‘심판의 날의 거장‘의 단서를 찾아낸 엔지니어도 곧 죽고 만다. 엔지니어가 발견한 의문의 책에는, 어떤 묘약으로 악마의 환영을 본 예술가의 정신착란 이야기가 들어있었고, 뒤에 적힌 묘약의 제조법이 찢겨나가있었다. 아마도 거기 적힌 대로 따라 한 엔지니어가 죽었을 것이었다. 아아, 나는 이런 오컬트 식의 결말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아직 못다 한 내용도 있고, 마지막에 반전 같지도 않은 반전이 남아있다만 이쯤 적으련다.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어유...


아쉬움과 별개로 재미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겨우 두 작품 읽었을 뿐이지만, 이 분도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걸 인정해야겠다. 나는 페루츠의 뚜렷한 개성보다도 서사의 독창성에 점수를 주고 싶다. 총 11권의 장편을 썼다는데 국내에는 겨우 3권만 나와있더라. 다른 작품들도 궁금한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더 출간해 줄 것 같지도 않고. 갈수록 독서 인구가 줄고 있어서 돈 안되는 작품들은 점점 밀려날 테지. 과연 문학의 멸종은 현실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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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8-21 05:36   좋아요 1 | URL
제가 마술문학, 환상문학, 환타지문학, 장르문학 등의 쪽을 읽기 힘들어하는데 물감님 덕분에 진입장벽을 낮출 있을 것 같습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문고라니 좋네요~다만, 열린책들 편집 스타일은 심히 괴롭습디다..행간/자간/여백에 왜 그리 인심이 박한지요..ㅎㅎ 물감님 리뷰를 계속 따라다닐 듯합니다~. 제 리뷰에 ‘좋아요‘도 감사~~

물감 2024-08-21 10:24   좋아요 0 | URL
아니 언제 이렇게 많은 댓글을 달아주셨답니까? 오랜만에 관심받는 거라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ㅋㅋㅋ 저로 인해 입문하신다면 다행이지만, 읽기 힘든 장르를 꼭 읽으실 것 까지야......
저도 열린책들 썩 안좋아합니다요. 특히 그놈의 된발음을 질색하기도 하고요. 딱히 얻어갈 게 없는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림다 ㅋㅋㅋ
 
전몰자의 날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6 미치 랩 시리즈 5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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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 걸렸을 때 읽으려고 계속 미루다가 어느덧 5년이나 지나버린 미치 랩 시리즈. 오랜만에 읽는데도 어색하지 않고 여전히 폭발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스릴러소설 마니아로써 여러 가지 시리즈물을 봐왔지만 그중에 가장 원탑은 빈스 플린의 미치 랩 시리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4편의 리뷰에 잔뜩 써뒀으니 참고해 주시고, 이번에도 촌각을 다투는 CIA 요원 미치 랩의 슈퍼 액션과 인내심 폭발을 다루고 있다. 너무 재밌어서 감탄사가 욕으로 나올 정도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빈스 플린은 천재다.


전편에 이어서 미국은 여전히 이슬람 테러집단과 대치중이다. 파키스탄의 한 산골에 위치한 알카에다의 지휘본부를 급습하는 미치 랩과 CIA 비밀부대. 그곳에서 워싱턴을 표적 삼은 핵무기 폭파계획 지도를 발견하고 초 비상사태가 된다. 핵폭탄을 실은 배가 이틀 뒤에 미국에 도착 예정인데, 무려 4대의 배가 각기 다른 주의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이 내용이 혹여 언론에 퍼졌다간 미국 전역이 난리가 날 것이고, 이에 동요한 적들은 폭파 일정을 앞당길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들로 속전속결 판단과 승인이 필요한데, 대통령 곁에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인간들로 애꿎은 시간만 날리고 있었다. 핵폭탄이 굴러다니는데도 밥그릇 챙기기 바쁜 정치인들에게 열뻗친 미치 랩은 수차례 팩트와 쌍욕을 박아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는 일전에 백악관을 공격한 테러범들에게서 대통령을 구해낸 영웅이었고, 이제는 전 국민이 떠받드는 화제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요 시리즈는 아주 그냥 안팎으로 사이다 액션을 보여준달까.


미치 랩은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윗선의 승인들을 싹 다 생략하고, 어찌어찌해서 발견된 핵폭탄 하나를 처리하는 데에 성공한다. 부디 그거 하나였기를 바랐는데 이슬람 아지트에서는 워싱턴 지도만 있던 게 아니었고, 그것은 또 다른 폭탄이 있음을 의미했다. CIA는 이슬람 최고 지도자가 직접 미국에 행차한 것과 그의 끄나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위치를 알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른다. 도대체 이슬람이 어떻게 핵무기를 손에 넣었나 조사했더니, 러시아의 핵폐기물 장소에 가서 실험 실패한 잔해들을 긁어모아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미국에 대한 증오의 뿌리가 깊었던 이슬람이었다.


미국은 이슬람을 근절하려 했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빼앗는 일에도 지지했다. 이슬람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미국에 분개하여 워싱턴을 파괴하기로 했던 것. 그리하여 경제공황을 불러와 미국을 몰락시킨다는 혁명을 계획하였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모조리 멸절시키기 위해, 그들이 전부 모이는 메모리얼 데이 헌정식 행사를 노리는 이슬람 전사들. 그 행사에 참여한 우방국 고위들도 함께 죽이려는 이슬람의 집념이 정말 대단했다. 무조건 한 쪽 편만 들 수가 없는 게 정치라지만, 알라의 이름으로 살생을 외쳐대는 이슬람은 아무리 봐도 납득이 안되는 법이다. 죽음을 요구하는 신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번 편은 솔직히 스토리 자체는 평범하다. 그럼에도 내공 빵빵한 핵꿀잼을 보여주었는데, 미치 랩은 눈엣가시인 부패 정치인들과의 전쟁을 완전히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바로 CIA 대테러센터를 관두는 식으로 말이다. 절반은 진심이었지만 이 액션으로 자신을 붙잡는 대통령에게, 국가 안보와 전시상황에서 개인 명령 권한을 따내면서 다시 요원 활동을 이어나간다. 누군가의 말대로 미치 랩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짐승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미국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여튼 이번에도 대만족인데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내가 지금껏 읽어본 책 중에서 가장 오탈자가 많은 책이었다. 진짜 이건 편집자를 잘라버려야 할 판이다. 한두 개라야 그러려니 할 텐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니다. 아주 오래간만에 나를 예민 보스로 만든 RHK에게 핵폭탄을 선물해주고 싶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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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7-25 13:15   좋아요 2 | URL
오탈자가 많은 책, 화가 나죠. 특히 아끼는 책이 그럴 때엔 더욱... 저도 경험한 적 있는 1인입니다.

물감 2024-07-25 14:00   좋아요 2 | URL
페크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오탈자 너무 거슬리네요. 저 원래 이정도로 예민하지 않은데 말이죠.
날씨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즐독하시고요^^

stella.K 2024-07-25 17:38   좋아요 1 | URL
지난 5년간 아직 슬럼프는 오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다고 재밌는 책을 일부러 슬럼프를 기다리는 것도 지혜는 아니겠죠? ㅎㅎ
덕분에 모르는 시리즈 많이 알게 되네요.
표지가 미쿡스럽네요. 요즘 읽어도 실감날 것도 같고.

오탈자 한 두 개는 그냥 퍼펙트로 봐 줘야죠.
그런데 물감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심각한가 봅니다.
그래도 핵폭탄 선물은 자재해 주시고요.ㅋㅋ

물감 2024-07-25 17:25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일부러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ㅋㅋㅋ냅다 읽어버려야해요😎
그나저나 번역자보다도 편집자 면상이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확그냥...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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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토울스의 독자 반열에 들어선다. 독서가들 사이에서 꽤나 핫했다던 토울스의 데뷔작 <우아한 연인>은 2011년 작품이지만 작품 배경 때문인지 한편의 고전문학을 읽는 기분이 들더랬다. 작품 특유의 잔잔하고도 품격 있는 분위기가 제법 근사해서 다들 좋아할만 했겠다 싶었다. 토울스도 40대 후반에 작가로 데뷔했다는데, 이렇게 나이 좀 먹고 등단한 작가들은 연륜이 있어서 그런가, 하나같이 분위기가 예술이더라. 지각생인 만큼 열일해 주시길 바랍니다요.


이브와 케이티, 두 친구 앞에 어느 날 팅커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화끈한 이브의 애정공세로 그를 낚아챘으나, 사실 팅커는 차분한 케이티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셋 다 부상을 입고, 아름다운 이브의 얼굴은 심하게 손상된다. 운전자였던 팅커는 죄책감으로 이브를 평생 책임지기로 하는데, 이 일로 세 사람의 우정에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겨난다. 여기까지가 출판사의 소개 글인데, 읽어보니까 막 의미심장한 계기는 아니었다. 이다음부터 이브와 팅커는 들쑥날쑥하고 케이티의 일인칭 시점으로 흘러가는, 얼추 케이티의 성장소설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서머싯 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자처럼, 케이티는 주인공이자 관찰자로써 뉴욕의 번영과 주변인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은행 중개인으로 잘나가는 팅커, 집에 손 벌리진 않지만 부잣집 딸인 이브. 그에 비해 흙수저인 케이티는 법률회사 직원으로 적당히 벌며 그럭저럭 자족하고 살아간다. 팅커와 인연을 맺은 덕분에, 케이티 또한 사교계에 발을 들이면서 유명 인사들을 소개받고 직장도 옮기고 더 좋은 집을 구하는 등, 제법 괜찮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 모든 배경에는 가진 게 없어도 당찼던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주변과 지인들의 서포트가 있었는데, 아무리 소설적 허용이라지만 끌어당김의 법칙을 남발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슬슬 약빨이 떨어지려 할 때쯤, 이브와 팅커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팅커의 마음이 콩밭에 있다는 걸 안 이브는 프러포즈를 걷어찬 뒤에 멀리 떠나버린다. 반대로 케이티는 새로 알게 된 사교계 남성과의 만남으로 미래도 그려보고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지만 역시 케이티에게도 팅커의 존재는 특별했던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제 본심을 찾고 이제 좀 잘해볼까 하는데, 거짓으로 쌓아 올린 팅커의 배경이 발각되자 바로 그냥 불꽃 싸다구를 날려버리는 그녀. 그러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예측불허한 삶과 세월 속에서 정답과 오답의 퍼즐을 맞춰보는 케이티. 용감한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자신처럼 틀에 박혀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또한 누구나가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의미도 곱씹어 본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모습을 감춘 팅커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독자마다 관전 포인트가 다를 텐데, 나는 똑 부러진 주인공이 자신의 미성숙함을 발견해나가는 데에 주목하였다. 엄밀히 보면 사랑도 메인 테마가 아니고, 우정을 그리는 내용도 아니었다. 원제가 ‘정중함의 법칙‘임을 생각해 볼 때, 예의와 교양 있는 케이티가 어째서 팅커의 정중함의 가면을 보고 기겁했는지를 따져봐야 하겠다. 아무튼 잘 읽었고 다른 작품들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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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7-20 09:44   좋아요 2 | URL
분위기가 예술~ 이란 말씀에 동감입니다!^^

물감 2024-07-21 08:25   좋아요 2 | URL
진짜 그렇죠?? 머리에 스쳐가는 작가들마다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ㅎㅎㅎ

자목련 2024-07-25 09:09   좋아요 2 | URL
<모스크바의 신사>가 좋아서 이 책도 읽고 싶은 목록에 있는데. 목록에서 나와야 할 텐데 ㅎㅎ

물감 2024-07-25 09:36   좋아요 1 | URL
모스크바 먼저 읽으셨군요. 저는 최대한 출간순서대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ㅋㅋ
모스크바랑, 링컨하이웨이도 준비해놨어요.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

이 책은 읽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남들이 현대판 개츠비 같다고 해서 좀 비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개츠비보단 재밌었습니다 ㅋㅋㅋ
 
에코 파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2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2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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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역시였던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이번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스릴러에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정통 스릴러는 역시 범죄/액션물 아니겠는가. 작중 배경인 LA에서는 온갖 살인사건과 부패정치가 들끓고 있으나 독자 된 입장에서는 그저 즐겁기만 할 뿐이니 쪼까 거시기허다.


해리가 무려 13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었던 미제 사건을 다룬다. 다년간의 형사 짬밥과 육감이 말해주는 실종 여성의 살해 용의자가 있었는데, 마침 붙잡힌 연쇄살인범이 자기가 죽였다고 자백하는 것이다. 변호사를 대동한 범인의 거래 조건은, 사형 면죄부와 피해자들의 정보 교환이었다. 권한이 없는 해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협상을 하고 범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범인을 따라 해리 일행은 시신이 묻힌 장소로 향한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느슨해진 틈을 타 도망치는 범인. 이 과정에서 경찰 두 명이 죽고 해리의 파트너도 총 맞고 생사를 오간다. 활개치는 범인과 죽어가는 동료 사이에서 패닉이 와버린 해리. 무엇보다 이 사태의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만 할까.


유일한 목격자가 된 해리는 증언을 위해 윗선에 불려간다. 그것도 여러 번 불려가는데 매번 받는 질문들이 묘하게 뭔가 숨기고 있단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궁창 출신의 해리가 이런 구린내는 또 기가 막히게 잘 맡거든. 이번 사건의 담당 검사를 캐봤더니 해리가 점찍었던 용의자의 회사 직원들 명의로 검사에게 거액이 입금된 사실이 밝혀졌다. 역시 자신의 촉은 틀리지 않았지만 저 X-Y의 빼박 관계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읽다 보면 사태의 전말이 대강 보이는데 이걸 공론화 시킬만한 팩트가 부족하다는 게 문제다. 이 애간장 타들어가는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받아본 것 같다.


매번 그랬지만 유독 이번 편에서는 해리의 감정이 뒤죽박죽의 연속이었다. 가장 거시기 했던 점은 총 맞은 파트너가 살아난대도 경찰국에서 잘릴지 모르는데, 해리는 다시 만난 옛 연인과 깨소금 볶는 중이라 정신이 없다. 잦은 애정씬들이 차기작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였겠다만 그래도 과하긴 했다. 강제 자택근무를 하는 동안 자료분석을 하면서 수사 곳곳에 심어진 조작의 기미를 발견하고, 이것이 경찰과 범인의 짜고 치는 고스톱임을 알아챈 해리 보슈. 근데 이상하게도 은퇴를 한 달 앞둔 자신의 팀장이 엮여있었는데,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제 상사가 어째서 이 난장판에 개입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연쇄살인범이 변호사를 배신하고 거래 조건을 파기한 것도 이해가 안 되고, 특히 그의 범죄 동기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해했다. 아 진짜 재밌다 재밌어.


아직 못 읽은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여기까지만 적기로 하겠다. 이번 편은 정말 강약 조절, 완급조절이 잘 되었다고 느껴진다. 주인공이 무력해졌다가 타올랐다가를 내내 반복하는데다, 재회한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해리의 고질병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12편이나 읽었는데 아직도 시리즈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1992년부터 매년 시리즈를 출간하는 코넬리 옹의 넘사벽 열정에 그저 박수를. 56년생으로 올해 68세인데, 이제 슬슬 시리즈 완결 내셔야 하지 않을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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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11 16:35   좋아요 2 | URL
와, 12편이나 냈는데 반밖에 되지 않는다구요? 코 아저씨 괴물이네요.
저는 이런 류의 책 잘 못 읽겠던데. 저의 순백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것 같아서. ㅋㅋㅋㅋ
재밌는게 장땡이긴하죠. 저도 기회되면 함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까짓 상처쯤...ㅎㅎ

물감 2024-07-11 17:30   좋아요 2 | URL
놀랍게도 서브 시리즈와, 스탠드 얼론도 많습니다 ㅋㅋㅋ 괴물 그 잡채...
아무래도 장르물은 취향을 잘 타죠. 그런데 그런 분들도 범죄 드라마나 영화는 잘 보던데요 ㅋㅋㅋ 여튼 저는 스릴러소설 광입니다~~

구단씨 2024-07-11 21:34   좋아요 2 | URL
범인이 참 협상 능력이 좋으네요.
그리고 해리는 왜 이 위급한 순간에 다시 만난 애인이랑 꽁냥꽁냥 할 정신이 있는지, 참나...
말씀하신 것처럼, 조였다 느슨해졌다 하면서 독자를 막 휘두르는 편인가 봅니다. ^^

물감 2024-07-12 09: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시리즈이기 때문에 전작들을 읽어보면 주인공의 배경과 기질 등으로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3자가 보기엔 거시기 합니다 ㅋㅋㅋ
강약 조절을 잘하는 작가들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독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기가막히게 안다는 거잖아요. 사랑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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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주 작가의 <반전이 없다>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를 소설가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수상작 <붉은 소파>를 읽으면서 과연 장르문학에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볼멘소리가 많은 작품이지만 나님은 과감하게 별 다섯을 주겠다. 이만하면 완성도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기존 장르물들과 겹치지 않은 독창성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한국의 미나토 가나에 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스타 사진작가 정석주는 붉은 소파와 함께 전국을 떠돌며 촬영 중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소파 위에서 딸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단서도 없이 오직 ‘촉‘에 의지하는 복수를 위해. 그의 방랑은 스튜디오의 밀린 월세로 협박하는 제자 때문에 끝이 난다. 이후 제자를 통해 형사 김나영을 만나 사건 현장의 촬영 담당을 맡는다. 하기 싫었지만 수입도 짭짤했고, 어쩐지 딸이랑 닮은 이 형사에게 눈이 계속 가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파랗게 어린 나영의 까칠한 태도에도 고분고분했던 주인공.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악연의 시작점이었으니.


각 사건마다 정석주가 촬영하면서 남다른 촉으로 정황을 판단하고 의문점을 풀어나간다. 이제 밀린 월세도 다 갚았고 더는 경찰과 붙어 다닐 이유가 없는데도 나영은 계속해서 석주를 찾아온다. 자신도 석주의 딸과 같은 피해자였다면서 말이다. 범인에게 당하던 중 베란다로 뛰어내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김나영. 그러나 석주는 이 친구 때문에 딸이 죽게 되었음을 알게 돼 마음이 복잡해진다. 딸과 결혼한 제자를 유혹하고 놀아났던 과거 나영의 고백이 이어지고, 제자가 나영에게 놀러 간 사이에 집을 지키던 딸이 살해되었던 것. 딸의 얼굴을 하고서 자백하는 이 또 다른 피해자에게, 원망의 화살을 겨누지 못하는 석주의 마음을 어찌하랴.


읽다 보면 이 작품은 추리 형식을 띈 사회소설이란 걸 알게 된다. 그러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야만 한다. 점점 갈수록 내막을 둘러싼 관계 구도가 복잡해진다. 범인의 연쇄살인은 스타 사진작가인 석주를 찬양했던 누군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범죄의 씨앗은 정석주 자신이 심었던 것이었기에. 먼저 석주의 딸은 그의 친자식이 아니라, 강간당해서 낳은 누나의 딸이었다. 아마추어 시절의 석주는, 누나와 딸을 찍은 사진집으로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화려하게 데뷔하였고, 그 사진집을 알아본 강간범은 몰래 누나를 찾아와 돈으로 입막음하였다. 끝내 누나는 붉은 소파 위에서 자살했고 석주가 대신해서 그 딸을 키워온 것인데, 알고 보니 누나의 자살도 딸의 죽음도 전부 제 탓이었단 말인가.


나영이 석주에게 매달렸던 건, 자신을 헤치려던 범인을 잡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석주의 인상에서, 늘 냉정하고 차가웠던 아버지의 ‘다정한 버전‘을 느껴서였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난 나영의 아버지를 향한 관심 끌기가 삐뚤어진 것이 유부남, 즉 석주의 사위에게 꼬리친 결과로 이어졌고, 그렇게 나영도 피해자가 되어 마치 자업자득이라 믿고 있음을 눈치챈 석주. 그는 나영의 친부가 자신의 광팬이라는 것과, 경찰의 촬영 협조 비용을 대준 것도 그녀의 친부였다는 사실을 듣고 그를 만나보기로 한다.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나영의 친부는 석주 자신과 많은 점이 닮아있었고, 둘 다 가슴속에 괴물을 데리고 사는 공통점도 발견한다. 어째서 나영이 자신에게 친밀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 괴물의 존재까지는 몰랐을 그녀에게 결국 상처를 주기로 하는 주인공. 그리하여 나영과 부친을 붉은 소파에 앉히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제법 복잡한 내용이라 최대한 가리고 추려서 적었다. 석주의 과거와 사건의 내막을 뒷받침하는 내용도 많고, ‘사진사‘라는 직업이 어떻게 사건들을 풀어가는지와, 주인공들의 왜곡된 기억과 마주하게 되는 장면 등등 볼거리가 다양한 작품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진실을 듣고 더 고통스러울 것인가, 아니면 없던 일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정석주도 그 같은 선택지가 주어진다. 진실을 고른 괴물은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서서히 침몰한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괴물이 되느냐, 거짓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느냐.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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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09 14:15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제목은 들어 본 것 같은데...
표지 그림이 꽤 감각적이네요. 평점도 좋고.
근데 물감님이란 저랑 같이 본 영화가 있네요. 매트릭스! ㅎㅎ
이게 뭐 철학적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고 해서 관련 책도 나오고 토론회도하고
그랬다던데 전 잘 모르겠더군요. 좀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SF는 딱히 즐겨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그냥 보고 나온 기억이. ㅋ

물감 2024-07-09 15:12   좋아요 2 | URL
세계문학 수상작이라 들어보신 적은 있을 거에요.
주인공 직업이 사진사라서 풀어가는 방식이 신선했어요. 무엇보다 인물들의 고뇌와 감정선이 미쳤습니다. 이야기를 꽤 잘쓰는 작가네요. <반전이 없다>도 재밌었고요 ㅋ
<매트릭스>는 안본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요 ㅋㅋㅋ 아무리 장르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요. 일단 키아누 리브스가 너무 잘생겼고요 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7-11 14:52   좋아요 2 | URL
물감 님, 무척 재밌게 읽으셨나 봐요. 저도 읽었는데 내용도 제가 쓴 리뷰도 가물가물합니다. 5별은 주지 않은 것만 (이것도 아닐지도 ㅋㅋ)

물감 2024-07-11 15:00   좋아요 1 | URL
방금 자목련 님의 리뷰도 읽고 왔습니다ㅋㅋ 별 넷이던데요. 이정도만 후한 점수네요. 저는 매우 재밌고 흥미로웠어요. 등장인물이 죄다 애증의 관계라니, 요런 설정도 다 있네 싶더라니깐요 ㅋㅋㅋ 근데 은근히 자목련 님도 장르소설 좋아하시는 듯!?

stella.K 2024-08-07 21:17   좋아요 2 | URL
쳇, 알라딘은 물감님만 좋아하는가 봅니다.
그 비결이 뭔가요? 무심한듯 시크한...?
아님 저 표지 여인의 등짝...?ㅎㅎㅎ
암튼 축하합니다. 적립금으로 고기 사 드세요.
헉, 내가 무슨 소리하는 거야? 3=33=333

물감 2024-08-08 11:55   좋아요 2 | URL
허허 당선이 되었군요 ㅎㅎㅎ
저는 뽑힐 생각은 아에 안하고 쓰는 주의라...
스텔라님도 내려놓으시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합니다요 ㅎㅎㅎㅎ

젤소민아 2024-08-21 05:39   좋아요 2 | URL
추리 형식을 띈 사회소설<<<<제가 지향하는 소설!! 이달의 당선작이었네요~belated congratulations!

물감 2024-08-21 10:21   좋아요 1 | URL
축하 감사합니다 ㅎㅎ 조영주 작가님 소설들은 확실히 느낌이 있어요. 나중에 읽어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