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을유세계문학전집 64
샬럿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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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 퇴사 시대. 결국 나님도 퇴사를 했다. 뭐랄까. 일이 많거나 복지가 부실한 것보다도 불편한 직원들과 웃고 지내야 하는 게 가장 곤욕이다. 맞지 않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있다 보면 내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이번 직장에서는 유독 자유를 갈망하면서 겨우 버텼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자유 타령이 웬 말이냐 싶겠지만, 그냥 먹고살기 적당할 만큼의 벌이와, 나 자신이 온전한 주체로써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때마침 읽은 <제인 에어>는 나와 비슷한 고민에 살던 소녀의 이야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내가 그녀에게 공감했던 건 지금 내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이 나에겐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남들이 누리는 그 당연함이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주었기에.


고아였던 제인 에어는 친척 집에 더부살이를 하다 어느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그리고 8년 뒤 어느 집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 집주인이 제인에게 청혼을 하고, 그를 거절한 제인은 소리 없이 떠나버린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이 훗날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


집에서는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학교에서는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했던 주인공. 그런 환경에 있다 보면 점점 주눅 들거나 위축되기 마련인데, 제인은 ‘나‘라는 정체성을 끝까지 부여잡는다. 고분고분한 타 여성들과 달리 고집 세고 성깔 있던 그녀는 저항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매사에 부딪히기보다 상황에 따른 적응 및 판단으로 최상의 융화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급 퍼포먼스였다.


제인은 외모, 재산, 지위 등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다. 반대로 배움의 결과물인 지성, 덕, 분별, 통찰 등을 평생의 무기로 삼았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질 않는다면 내가 나를 사랑해 주자는 쪽이었고, 늘 당당하고 지혜롭게 행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갔다. 그 많은 비교와 모욕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건, 자신과 그들의 관심사가 전혀 달랐기 때문. 독립된 삶과 건강을 완성하는 데에는 타인의 개입이 필요 없는 그녀였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제인의 홀로서기는 계속된다. 주인의 끈질긴 청혼에 좋으면서도 난처해지는 그녀. 주인의 사랑은 진심이지만 제인의 있는 그대로를 원한다기보다 그의 소유물로 두고 싶어 했다. 제인 또한 주인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일부를 버려가면서 결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평탄한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택한 제인. 여기서 독자의 의견은 언니 멋져요 쪽과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는 쪽으로 나뉠 수 있다. 후자의 의견도 이해는 간다. 제인의 사정이 썩 좋은 것도 아닌 데다 비혼 주의자도 아니었으니. 또한 제인 정도의 총명함과 분별력이면 결혼 후에도 충분히 남편을 컨트롤하겠다 싶고. 여하튼 그곳을 떠나 새로 정착한 곳에서 그녀는 또 한 번 플러팅을 받게 된다.


세컨드는 젊은 목사였는데, 제인의 성품에 반하여 선교사 부부가 되자고 조른다. 목사는 제인의 그릇이 결코 가정교사 수준이 아니며, 그 재능을 넓은 세상에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 준 목사에게 잠깐 흔들렸으나, 사랑도 없이 사명감으로 하는 결혼 또한 자신 없었던 제인. 이런 일이 반복되면 오는 기회들을 전부 걷어찬 게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저 나 자신이 더 중요해서 내린 선택이었는데, 어느새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재고 있나 싶어지지. 제인처럼 남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다르다고 느껴져 속을 앓는 유형들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할 게 아니라 제인처럼 잠시 지나가는 성장통으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품 내내 제인은, 여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관념을 타파하고 있다. 헌데 이것은 개성을 드러내거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의 일원이 되어 남들과 잘 섞이고자 하지 않았던가.


이 작품은 ‘여성‘이라는 타이틀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내용이지만 메시지를 더 넓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학생이라면, 신입이라면, 부모라면, 연예인이라면 등등. 포장지가 같다고 해서 내용물까지 똑같을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멋대로 정해놓고 기대에 어긋나면 사회성 부족이니, 의욕이 없다느니, 절실치 않다느니 식의 돌려까기를 해댄다. 이런 게 비일비재한 인간 사회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기란 분명히 쉽지 않다. 현실과의 타협은 필요하나 그것들이 내 영혼을 지켜주진 못하므로, 제인처럼 부끄러움이 없는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러니 부디 독해집시다. 21세기 아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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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4-06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퇴사 하셨군요. 당분간 여유를 가지고 즐겁게 독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제인에어처럼 홀로서기가 성공하시기를~!!

물감 2023-04-06 13:17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의 응원, 왜 눈물이 나죠ㅎㅎㅎ 감사합니다.
근데 백수되고 더 책이 안 읽히는 이유는 뭘까요...

그레이스 2023-04-13 09:24   좋아요 1 | URL
넘 갑작스런 자유시간때문이겠죠.
하루가 짧다고 느껴지는 순간 본격적인 책읽기에 적응하실듯, 시간을 정해놓고 산책하시는걸 권해요, 장소를 정해놓고 독서하는 것두요.
그저 제 짧은 경험과 소견입니다.
물감님의 자유를 위한 퍼포먼스 응원합니다.

독서괭 2023-04-06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공감하며 읽으시고 멋진 리뷰까지!
퇴사하셨다니!! 물감님의 제2의 인생 응원합니다!

물감 2023-04-06 13:33   좋아요 1 | URL
독서괭 님 따라 읽은건데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또 다른 직장을 구하긴 하겠지만... 당분간은 푹 쉬렵니다. 감사해요!

다락방 2023-04-06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 님, 제인 에어 읽고 쓴 리뷰들 중 가장 색다른 리뷰가 아닐까 싶네요. 퇴사한 독자의 사회생활 분투기 공감..
그동안 고생하셨고 푹 쉬셔요. 새로운 시작이 맞춤할 때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물감 2023-04-06 14:59   좋아요 0 | URL
가장 색다른 리뷰라니, 엄청난 찬사로군요. 덕분에 기분 좋아졌어요 ㅎㅎ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거라지만 나를 버려가면서까지 참아야 하나 싶어요. 먹고 살기 위한 일이 반대로 나를 죽게 만드는 모순... 여튼 충분히 쉬면서 독서도 하고 그럴려고요! 감사합니다 ^^

책읽는나무 2023-04-06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결단력 멋지십니다!
열심히 고생하신만큼 푹 쉬시고, 제2의 인생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제인 에어 물감님 리뷰로 읽으니까, 같은 책인데도 느낌 완전 다르게 읽힙니다.

물감 2023-04-06 15:49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오랜만이에요 ㅎㅎ 어째 현실보다 알라딘서 위로를 더 받는 듯 하네요 ^^
이 책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어째선지 여성만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안들었네요. 그래서 이런 리뷰가 나왔나봅니다!

coolcat329 2023-04-07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최근에 큰 결정을 하셨군요. 당분간 맘껏 자유 누리시고 좋은 기회가 꼭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제인에어는 제가 초딩6때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캄캄한 방에서 다읽고 펑펑 운 책이라 참 각별합니다.ㅎㅎ

물감 2023-04-07 10:45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그래도 마음은 홀가분하고 좋아요 ㅎㅎ
어떤 포인트에서 펑펑 우셨는지를 알 것 같네요. 제인을 좋아하지 않을 독자가 과연 있을까 싶고요^^ 뒤늦게 읽었지만 제게도 각별할 듯 합니다.

꼬마요정 2023-04-07 15: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인 에어 리뷰 독특하고 재밌습니다. 그러고보니 제인 더 멋있게 느껴지네요. 물감 님도 큰 결정 하시고 멋지십니다!! 푹 쉬시고, 책도 마음껏 읽으시고, 원하시는 일 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물감 님 화이팅!!

물감 2023-04-07 16:13   좋아요 2 | URL
꼬마요정님 댓글 넘넘 감사합니다! 알라딘 이웃이 최곱니다 ㅎㅎㅎ제인처럼 나를 지키기 위해 퇴사했어요. 더 좋은 곳을 찾게 되겠죠^^ 4월도 파이팅하시고 미세먼지 조심하세요!

잠자냥 2023-04-12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니, 퇴사하기 전에 회사의 자기계발서 다 읽고 나오는 큰 그림을 그렸다니 이런 놀라운 인간이!
물감 님은 대성할 것입니다.

부디 다음번 밥벌이 하는 곳에서는 좀더 인간다운 인간들이 있길 기원합니다!

물감 2023-04-12 16:24   좋아요 1 | URL
ㅋㅋㅋ퇴사가 잡혀서 부랴부랴 읽긴 했지만 딱히 남는 게 없네요. 역시 저는 소설이 좋아요~~ 징글징글한 사람들과 작별했습니다. 아주 속이 후련해요. 저도 잠자냥 님처럼 업무만족도가 높은 곳을 찾아야겠어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2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얽!! 퇴사했어요!? 전쟁터 벗어난 거 축하해여!!! 자 이제 혹독한 지옥의 맛을 좀 봐랏!!!! 으하하하하하하!!!! 제인처럼 꼿꼿히 자기를 지키면 잘 될겁니다!

물감 2023-04-12 18:03   좋아요 1 | URL
아직은 천국이지만 조만간 지옥이겠죠?ㅋㅋㅋㅋ 백수 생활은 처음인데 이거 너무 좋네요 와하하하

공쟝쟝 2023-04-12 18:12   좋아요 2 | URL
체감상 70일 정도 지나면 적응되고 더 천국 ㅋㅋㅋ 140일쯤 지나고 전 초조했어요 ㅋㅋㅋㅋㅋ 내가 다 기분 좋네!!! 즐기라!! 산책 많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