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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열린책들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치킨 부위 중에 퍽퍽 살을 제일 좋아한다. 계란은 노른자만 좋아하고, 카스테라도 음료 없이 잘 먹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이런 식성을 말해주면 다들 놀라워한다. 아니, 취향 존중이라는 말도 있는데 뭘 그거 가지고 심해어 보듯이 미간을 구기냐 그래. 사람들은 타인의 이상함을 느낄 때면 자동적으로 자신이 정한 평범함의 범위와 저울질을 한다. 그 저울이 기울어지면 어떤 경고등이 켜지면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누구나 타인에게 이해받길 바라면서 정작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근데 반대로 생각해보자. 내가 정해둔 범위가 좁아서 정상인도 문제 있다고 보는 건 아닌지를. 이번에 읽은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도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선입견이 없는 한 소년이 좀머 씨를 소개한다.
좀머 씨는 온종일 쉬지 않고 마을 안팎을 걸어 다니는 워크맨이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늘 걷는 중이었으며,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좀머 씨를 투명인간처럼 인식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비를 맞던 좀머 씨를 보자 소년의 부친은 그를 차에 태우려고 한다. 끈질긴 요청에 못이긴 워크맨이 겨우 하는 말, 나를 제발 좀 놔두시오!
다 그렇듯 나도 <향수>로 쥐스킨트를 알게 되었다. 그 쫀득쫀득한 스릴러 작품을 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좀머 씨 이야기>는 매우 잔잔하다. 두 작품의 온도차가 워낙 커서 작가가 지킬 앤 하이드처럼 느껴진다.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홍철 없는 홍철 팀‘이라고 있었는데 이 책이 딱 그 느낌하고 비슷하다. 분명 좀머 씨에 대한 내용 같은데 화자가 따로 있고, 좀머 씨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 소년의 사고 전환을 돕는 촉매제가 돼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병풍 같은 좀머 씨는 소년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피아노 쌤한테 잔뜩 깨지고서 나무 위에 올라가 뛰어내리려던 소년은, 마침 그 밑을 지나던 좀머 씨를 보고 정신을 차린다. 아무 일면식도 없는 워크맨이 소년의 자살을 막은 셈이었다. 몇 년 뒤 좀머 씨의 행방불명으로 마을이 소란스럽던 날, 소년은 호숫가에 들어가는 좀머 씨를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버린다. 자신의 자살을 막아준 그를 도울 차례였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를 제발 내버려달라는, 좀머 씨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쥐스킨트는 문학 수상까지 거절하고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향수>에서도 주인공의 은둔생활 씬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대놓고 은둔형 캐릭터를 내세우고 있다. 작가는 좀머 씨를 통해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였다. 제발 나를 찾지 말아달라고. 좀머 씨가 전쟁을 겪은 뒤로 두려움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역자의 말이 맞다면, 작가의 은둔 생활 또한 이해가 된다. 이런 배경을 모른다면 누구라도 쥐스킨트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겠지. 또 그처럼 범상치 않은 타인을 보면 저울질을 하고 레드카드를 내밀겠지. 그래 뭐,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진 못해도 안 좋게 생각하지는 말자. 물론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내가 닭 가슴살을 좋아하는 게 문제 될 건 없잖아? 오히려 나랑 치킨 먹고 싶다는 사람이 더 많은데, 서로 다른 취향이 좋을 때도 있으니까 좋게좋게 삽시다. 기승전 치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