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짜 산모 수첩
야기 에미 지음, 윤지나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2월
평점 :
작가는 끝까지 나(독자)를 속였다. 소설 속 화자인 시바타 씨도 나를 속였고, 더불어 자기 자신까지 속인 것 같다. 어쩜 이럴수가 있는지 책을 읽는 내내 어안이 벙벙했다. 중간까지는 꽤 흥미로워서 하루만에 다 읽을 것만 같았는데, 중간 이후부터는 내내 혼란스러워졌다. 남을 속이려면 나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는 그 말대로 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스스로 진짜라고 믿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임신을 했다는 거짓말에서부터 시작해 수건이나 목도리로 배가 부르게 하고, 산모수첩 앱과 임신부 에어로빅 등의 운동과 식이요법까지 이용을 하고, 실제로 임신부처럼 느끼고 생활했다.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엔 초음파에서도 아이의 윤곽이 보이고 태동과 입덧, 통증까지 이어졌으니 이건 가히 거짓말이 아니라 상상임신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출산(?) 이후에도 아이의 (이름과 성별은 출산전에 이미 준비) 사진을 준비하고 둘째 계획까지 세우며 끝까지 주변 사람뿐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와 자신까지도 아이의 엄마인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어떤 의미에선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책 뒷편에 나온 소개글이다. ''여자'의 역할을 벗어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임신을 선택한 여자. 하지만 현실은 아이를 낳아도 낳지 않아도 지옥이었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선택한 뒤 이 소개글을 보자마자 '여자의 지옥'에 대한 글에 기대를 엄청 했었는데, 책 내용이 가짜 임신의 과정에 많이 치중해있어서 이 소개글의 의미가 뭔지 바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내용을 되새겨보니 그 '지옥'이라는 게 우리가 (적어도 여자라면) 너무 뻔하게 알고 있고 어쩌면 필히 겪어야만 하는 그런 내용들이라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일하는 젊은 여성, 처녀'가 사회와 직장 내에서 갖는 차별적 위치의 지옥, 그리고 '일하면서 육아와 살림을 동시에 맡아야 하는 워킹맘'으로서의 끝없는 노동과 희생의 지옥이 바로 그것이었다.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미처 '지옥'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말았던 그런 '지옥'.
책을 읽으며 놀랐던 건, 우선 자신이 비밀스레 유지하는 '거짓의 세계'에 대한 시바타의 당당함이었다. 소설이긴 하지만 너무 있을 법하게 그려져서 실제로 그렇게 하면 가짜 임신을 할 수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상 둘도 없는 뻔뻔함과 치밀함, 강철 같이 굳건한 정신력 없이는 절대 불가능할 것 같다.) 또 결혼을 하지 않고 임신한 여자에게도 이것저것 묻지 않고 축하와 배려를 해주는 일본의 문화도 무척 놀라웠다. 물론 뒤에서 개인적으로 수근대거나 궁금해할 순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왠지 사회에서 가십거리가 될 것 같고, 엄격하고 보수적인 회사에 근무한다면 윗선에 불려가서 어떤 제재를 받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너무 요즘 세상을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여튼 두 나라 사이의 문화 차이가 조금 느껴진 부분이었다.
그래도 어느 사회에서나 여자가 강요받는 일이라던가 역할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어서 오랜만에 읽은 일본 소설이었는데도 전혀 거부감없이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차 심부름은 그래도 예전보단 조금씩 없어져가는 듯 한데, 일본에는 아직까지도 저런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나 싶기도 하고 소소한 궁금증들이 생기기도 했다.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를 담보로 해서 상대방을 잊지 않게 할 환경을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 외롭다..... 미안, 호소노 씨가 힘들어하는 거랑 완전히 딴 얘기가 돼 버렸네. 그런데 있잖아, 난 항상 외로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태어날 때부터 외로운 존재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아. 결국 인간은 누구나 혼자인데."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남의 일에 간섭하고 싶어 하는 거야? 진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단정 짓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면 이상하다는 등 의외라는 둥 뭐가 그리 말이 많냐고. 난 말이야. 너무 외롭고 싱숭생숭해서 그런가, 가끔 내가 누군지 잊어버릴 것 같은 때도 있어."
"남편이 한 거라곤 배설밖에 없잖아. 사정 말고 뭘 더했냐는 말이지. 내 배가 제멋대로 불러 오고, 심지어 토하기도 하고 움직이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힘들게 임신이며 출산의 과정을 겪는 동안 가끔씩 그저 격려나 한번 하면서 옆에서 보고만 있었잖아. 뭐, 애 낳을 때 옆에서울긴 하더라. 하지만 자기가 배설한 결과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태어난 데 아주 잠깐 감격했던 거뿐이야. 뭐, 애는 여자인 내가 낳는다고 치더라도, 지금은? 애가 태어났잖아. 내가 모유를 먹일 때 빼곤 나랑 조건이 똑같은 거 아냐? 근데 글쎄 그분께서 아빠 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는 거야 ! 열 달 전부터 본인은 이미 아빠였는데! ‘뭘 또 그렇게 멍하니 보냐? 견학 왔어? 대신 난 밖에서 일하잖아.‘ 하길래 ‘나도 직업이 있잖아.‘ 하고 받아쳤어."
"물론 남편 월급이 더 많아. 그래서 내가 육아 휴직을 낸 거고. 지금 당장 그러라는 건 아닌데,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육아 휴직 내고 내가 일하는 상황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겠어? 자기가 기저귀 한번 갈아 준 일로 내가 왜 그렇게까지 고마워해야 되는 거야? 잠시라도 내가 애 보느라 힘들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거야? 아니면 생각은 해 봤는데 어쨌든 애 엄마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뭐야? 하, 이런 내 속을 남편이란 사람이 알기나 할까? 코앞에서 쿨쿨 잘 자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정치인이나 브라질의 어느 길거리에 버려진 유기견보다 멀게 느껴진다니까."
아무도 이런 게 내 일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일들을 하지 않고 방치해두면 "이봐!" 하고 나를 불렀다. "이봐, 전자레인지." 나는 전자레인지가 아닌데.
이렇게 이름 없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손님이 올 때마다 커피를 내가는 일‘이었다. 믹스커피라 뜨거운 물만 부어서 타면 됐다. 다들 자기가 마실 커피는 자기 머그 컵에 타서 잘도 마시면서, 이상하게 손님만 오면 그게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 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 쪽을 봤고, 내가 모르는 척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면 "이봐, 커피." 하고 불렀다. 나는 커피가 아닌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