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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평점 :
나도 '내가 싫고 좋고' 해서 선택한 책이었는데, 책장을 열자마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마치 이상의 작품, 입체파 작품같은 책이었다. 쉽게 말해 누군가 자신(글,인생)을 이해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이해하지 않길 바라는 책이다. 공감받는 건 끔찍하다고 책에도 적혀있다. 쉬운 이해와 공감에서부터 멀어지기 위해 이 책은 1,2,3,4,...8,9,10 이야 라고 말하지 않고 7! 3!! 아니 2! 9-3! 이런 식으로 말하는 책 같았다. 편안하게 읽기에는 다소 어지럽고 우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작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알고 고른 건 아니었다. 표지와 제목만 보고 골랐을 뿐인데, 페미니즘(에 가까운) 책이었다. 나도 그 부류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완벽하게 그렇다고도 못하겠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글을 옮기기에는 (이미 많은 부분을 옮겨왔지만) 너무... 이건 너무하다 싶어서 옮길 수 없었다. 읽는 것조차 마음이 힘들었다. 여성은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여성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은선 작가님의 시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지만, 앞으로 만나게 된다면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억해보려고 한다. 작가님이 더 힘을 내서 무탈하고 안온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응원해본다.
나는 내가 싫다. 나는 내 삶이 싫으면서 좋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면서 안도한다.
실패의 요인은 방정맞음, 불성실함, 소모적인 생활, 우물쭈물하는 태도,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 의지박약이었다. 열거하라면 더 열거할 수 있지만. 아무튼 나는 나를 파악하는 자질만은 제대로 갖추고 있었고 그러므로 빠르게 포기했다. 한강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착하다기보다 걱정이 많은 것 같고 착한 거 빼면 진짜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될 것 같아서 열심히 착함을 훈련한 거 같다. 자기연민이 너무 심해서 이 문장 진짜 지우고 싶다.
당장 아무하고나 만나고 싶다. 만나서 재롱도 부리고 많은 헛된 얘기를 쏟아내고 후회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 그럼 그 사람은 은선아 은선아, 하고 잘 들어갔어? 카톡하고 그럴 텐데. 뛰쳐나가고 싶다. 소리지르고 싶다.
괴롭다. 살아 있는 게 싫고 내일은 일요일이라서 좋은데 그다음은 월요일인 게 싫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껍데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너무너무 끔찍하다. 내가 시인이라 망정이다. 확실히 나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숨이 막힐 때 내 이름이 적힌 책등을 들여다볼 수 있고 내가 발표한 지면들도 볼 수 있다. 진짜로 보진 않지만....... 그만큼 아이와는 독립된 영토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의 친구 엄마들의 이름을 대부분 모른다. 그들도 내 이름을 모른다. 누구 엄마, 누구 엄마, 그게 다다. 나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이렇게 되어버리는 게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진저리나게 싫다.
지금은 그냥 별생각 없다. 별생각 없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사실 조금 창피하기도 하다. 왜냐면 내가 더이상 절치부심의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조바심이 내게 어느 정도 동력이 되어주기도 하였는데, 나는 왜 점점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지금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참 좋겠다. 이름은 좋은 거니까.
혼인신고서에 애초에 부모 중 누구 성을 따를 건지 명시해야 혼인신고 가능한 거 아세요? 임신 출산 육아도 안 하는 남자의 성을 내 아이한테 주는 거 이상해.
나에게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는 걸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공적인 지면에 그 사실을 쓴 일이 있고 그후에 내 시가 피해지가 쓰는 시, 라는 식으로 납작하게 이야기되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성매매나 성폭력을 저지른 남성 시인의 시에서 성매매 혹은 성폭력의 흔적을 찾거나 가해자가 쓰는 시, 라는 식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왜 나는 낙인을 짊어져야 하고, 그들은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혹은 우리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고 옹호를 받는 건가?
나는 내가 끝없이 질문하면서 그 질문에 더 올바른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이런 삶이 싫다. 왜 싫으냐고? 남자들은 안 그럴 테니까. 무언가를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대답을 돌려주려고 애쓰는 것은 왜 늘 약자의 일인가?
내가 이해한 페미니즘은 기성의 단일화된 목소리에서부터 여러 가지 목소리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기성에 대한 부정이나 남성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단지 조화와 존재에 대한 인정을 원하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아직도 입이 없는 것 같다. 여성은 자신이 겪은 폭력과 수치를 발화하지 못하도록 평생 동안 교육받고 내면화하면서 살아왔다.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주저한다. 나는 아직도 무섭다. 그렇지만 무서워만 하고 침묵해버린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쏟아버린 말과 하고 싶었던 말 사이에는 늘 커다란 강이 있고. 수심은 헤아릴 수 없고.
바람이 많이 불었고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리는 어떤 순간에 대해 골몰했다. 이 년 전 절교한 친구에게서 긴 편지가 왔고 편지는 나를 감동시켰고 그 친구는 드디어 나를 이해했지만 나는 더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알지만 말할 수 없다. 말하고 싶지 않다.
내 꿈은 사랑받는 것이었다. ... 나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를 사랑해주는 제대로 된 사람이 없었다. 왜 그럴까? 내가 이미 너무 많이 망가져버렸나. 나는 생각한다. 내가 엉망진창이 되어도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고.
이제 내 꿈은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앞으로 오십 년은 더 이렇게 살아야겠지. 생각하면 너무 까마득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엄마가 그랬다. 인생은 길지도 짧지도 않다고.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고 이해했다.
더 큰 포부와 야망을 갖기에 어울리는 나이였는데, 포기하는 법을 먼저 내면화하면서 자란 게 서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누군가 그때 내게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남 탓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지지와 응원을 받고 꿈의 크기에 먼저 한계를 설정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면, 하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참 여러 모양의 마음과 삶이 있는데 우리는 너무 ‘정상성‘만 보고 듣고 배우니까 그게 싫다. 정상이고 비정상이고를 누가 정하는데? 처음부터 그런 게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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