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을 읽고, 그 거룩함에 놀라 가슴이 데인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진기하고 화려한 볼 것들이 많아지면서, 활자도 덩달아 기교가 더 늘다 보니 읽기에 탐닉하면 할수록 더 허기가 지기 마련이었는데, 선생님의 단정한 문장들은 그 자체가 힘이 있어 가벼이 날리지 않는다. 


일본 땅,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해방 후 우리 나라로 넘어왔으나 빈한한 까닭에, 가족들은 또 뿔뿔이 헤어질 수 밖에 없었고, 선생님은 평생을 괴롭힌 결핵 탓에 시골 교회의 종지기로 헌신하신다. 


불행이 상식이던 시대를 살아오시면서 겪은 아픔과 슬픔을, 꾹꾹 눌러 쓴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소소한 불평과 불만은 감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단순히 선생님이 겪은 아픔이 너무 크니 지금 마주하는 삶의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식의 일차원적인 논리 때문이 아니다. 


열여섯 소년이 이미 2번의 전쟁을 겪을 정도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생애 내내 산문으로 써내려간  활자들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의 현재 삶의 양식과 행동, 사고 방식이 어떻게 핍절되고  굴곡지게 되었는지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 거기에는 모멸감, 힐난 대신 안타까움, 긍휼의 마음이 드리워져 있다. 


그 마음은 꽃들이며 풀들, 벌레며, 나무들,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시선으로 확장되며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바른 삶에 대한 희구, 불행에 대한 긍휼, 하나님을 향한 대담한 사랑은 시로, 동화로, 작은 삽화들로 채워져 마음을 정화시킨다. 


선생님은 산업화, 독재 정치, 통일과 적대 등에 대한 소신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빌뱅이 언덕에서 겪은 삶의 경험, 주변에 대한 관찰 등을 통해 자신만의 사상을 구체화한다. 


소박하지만 정직한 마음, 몸의 연약함을 딛고 영혼의 소성까지 치받는 사고의 힘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각성시킨다. 나를 넘어서서 우리까지, 인간을 넘어서서 자연 만물까지 확대하는 사유의 너비는, 쉽게 가늠할 수가 없다. 

나와 직접 간접으로 관계해 온 이웃들의 실망과 기쁨. 내가 그들에게 받은 실망만큼 나도 그들에게 실망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내 주위는 항시 조용하다. 아니, 조용한 것 같다. 그러나 소리없이 흐느끼는 영혼들의 울음소리로 내 귓전은 조용하지가 않다. 착각도 환청도 아닌 그 소리 때문에 나는 신경과민에 빠져 있다 - P3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